"네 혀로 똥물 핥아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 순간 탄생했다
통일운동의 거목,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2021년 2월 15일 새벽에 영면했다. 향년 89세이다. '불쌈꾼', '거리의 백발 투사'로 불린 고인의 한평생은 격동의 현대사 그 자체였다. 고 백기완 소장은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 회원이었으며, 오마이북에서 그의 마지막 저서인 <두 어른> <버선발 이야기>를 펴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고인의 격동적인 삶과 노나메기 철학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접했다. 독재정권 시절의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병상에 눕기 직전까지 거리로 나가 통일과 해방을 외쳤던 '불쌈군 백기완'의 삶을 5회에 걸쳐 재조명했다. 이 기사는 그 세번째다. <편집자말>
[김병기 기자]
[넷째 마당]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1979년 10월 16일 부마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열흘 뒤인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와 차지철을 저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날도 백기완은 권총 개머리판에 까여서 감옥으로 끌려갔다. 백기완은 한 달여 만인 11월 24일에 석방됐다. 마침 이날 '명동 YWCA 위장결혼식'이 열렸다. 민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서 서울 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감행한 것이다.
백기완은 이날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이 자리에 참석했다가 주동자로 몰렸고,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에 끌려가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문을 받았다. 구속당할 때 몸무게는 82kg이었는데, 감옥에서 나올 때는 38kg이었다. 백기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고 눈을 감을 때까지 고문 후유증을 앓았지만, 지난 2019년 11월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 재심에서 39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시가 없었으면 난, 벌써 죽었어"
백기완은 1평 남짓한 감옥에서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 감옥에서는 종이와 연필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 옥중에서도 고문 후유증과 싸우며 <젊은 날> <백두산 천지> <민중과 하나 되는 그날까지> 등 해방 정서가 끓어 넘치는 옥중시를 썼다.
"죽음이 심장을 짓누르던 때였어. 고문 때문에 무릎이 축구공만큼 부었지. 거기가 이불 껍데기나 무명실이 스쳐도 아플 정도였다고. 천장에 몸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고문하는 수사관들이 주먹으로 툭툭 치고 지나가. 어떤 때는 배를 발로 걷어찼는데, 목으로, 코로 똥물이 흘러나왔어. 그걸 입으로 핥아 먹으라는 거야.
내 똥물을 혀로 핥아서 청소하라는 거야. 못 핥겠다고 하니 마구 밟는 거야. 내가 이렇게 괄시를 받으며 죽는구나…. 그게 절망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그런데 말이야. 죽어가는 놈을 또 죽이면서 절망을 강요할 때 뭐가 생각난 줄 알아? 짓밟힐수록 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것을 알았어. 그걸 우리말로 '서돌'이라고 해. 불씨지. 절망은 서돌이 지펴 나오기 전의 상황이야. 짓밟힐수록 불꽃이 인다, 이 말이야. 죽일 테면 죽여라, 난 서돌이 있다! 죽어도 죽을 수 없는 생명력, 그게 바로 서돌이지."
그 때 입으로 읊조리면서 천정에서 쓴 시 '묏비나리'는 지금도 많이 불리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모태이다.
벗이여/민중의 배짱에 불을 질러라/장고는 몰아쳐 떼를 부르고/꾕쇠는 갈라쳐 판을 열고/징은 후려쳐 길을 내고/북은 쌔려쳐 저 분단의 먹개(벽)/제국의 불야성, 왕창 쓸어안고 무너져라/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싸움은 용감했어도 깃발은 찢어져/세월은 흘러가도/굽이치는 강물은 안다/벗이여,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갈대마저 일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일어나라 일어나라/소리치는 피맺힌 함성/앞서서 나가니/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
- 「묏비나리」 중에서
백기완은 이후 네 권의 시집을 냈다. 백기완은 "시는 쓰러진 나를 일따 세우는 웅얼거림이었고, 빼앗긴 나를 다시 찾는 나의 안간 불림이었다"면서 "나는 말이야, 시가 없었으면 벌써 죽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백기완은 모진 고문으로 감옥에서 병감정유치로 한양대병원으로 옮겨져 3개월 동안 입원했다가 1981년 석방됐다. 이듬해에는 옥중시를 엮어 <젊은 날>이라는 비매품 시집을 펴냈다. 또 전국을 돌면서 '산자여 따르라, 산자여 따르라'는 제목의 특강을 진행했다. 당시 신군부에 의해 수차례 가택연금을 당했지만, 1983년에도 지팡이를 짚고 전국을 순회하며 '곧은목지 이야기', '썽풀이 이야기', '이런데 그런데 이야기'등 민중들한테 용기를 주는 강연을 했다.
1984년에도 여전히 입 밖으로 통일이라는 말도 꺼내기 힘든 시절이었다. 하지만 백기완은 민중 주도 반독재 투쟁을 새롭게 조직한다는 각오로 백범사상연구소 이름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현재의 '통일문제연구소'로 확대 설립했다. 그해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도 창립했다.
1985년에는 대중강연과 함께 시집과 평론 출판 등 적극적인 저술 활동을 했다. 시집 <이제 때는 왔다>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평론집 <거듭 깨어나서>를 출간했다. 평소 문화운동에도 열정을 보였던 백기완은 민중문화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 민요연구회, 민중문화운동연합, 민족미술협의회, 반핵평화운동연합 등의 고문을 지냈다.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으로 발전적으로 개편되면서 민통련 서울지부 의장에 취임했다. 1986년에는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본부 부의장에 취임했다.
이때 가택연금 상태에서 경찰 몰래 집을 빠져나와 명동성당에서 권인숙 성고문사건 진상폭로대회를 주도하다가 6개월 동안 수배를 받았다. 수배 중 고문 후유증이 도져 극심한 고통 속에서 숨어있던 경북 왜관 파티마 요양원에서 붙잡혀 들것에 실려서 투옥됐다.
1987년 1월, 서울대학교 학생 박종철이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다가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6월 항쟁의 기폭제였다. 당시 감옥에 있던 백기완은 고문 후유증이 도져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그해 6월에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자마자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6월 항쟁에 뛰어들었다. 매일 거리로 뛰어나가 "박종철, 이한열을 살려내라", "독재타도, 학살 원흉 전두환 일당타도"를 외쳤다.
6월 항쟁 이후 재야세력은 야당의 김영삼, 김대중 분열과 궤를 같이해 나뉘었다. 민통련은 1987년 10월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결정했지만, 후보단일화파와 독자후보파는 이에 승복하지 않고 민통련을 탈퇴했다. 백기완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민중대표로 추대돼 민중후보로 출마했다. 후보 백기완은 이 과정에서 노태우에 맞선 반유신세력의 승리를 위해 '민중후보 연립정부안'을 제안하며 김대중, 김영삼 두 후보를 직접 만나서 단일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김대중, 김영삼을 만나서 '가위바위보라도 해라. 둘 중 누구라도 먼저하고, 5년 뒤에 나머지 한명이 하라'고 눈물로 호소했어. 그런데 전두환, 노태우 살인마가 분열을 책동했고 이미 대통령이 된 것처럼 행동한 두 야당 후보는 민중의 역사를 배신했지."
▲ 1979년, 마흔일곱 살. 연이은 구속수감과 고문으로 몸무게가 반토막 나기 전 81kg의 건장한 체구였던 백기완 |
ⓒ 통일문제연구소 |
1989년 통일마당집 마련을 위해 '벽돌 한돌(500원)쌓기 운동'도 전개했다. 벽돌 10만 장을 돌파했고 강연 수익금과 백범 선생의 붓글씨를 판매해 모은 돈으로 서울 대학로에 지금의 통일문제연구소 사무실을 마련했다. <우리겨레 위대한 이야기>도 출간했다. 1990년에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의 고문을 맡았다.
1970~80년대 백기완은 독재정권으로부터 요시찰 대상이었으며 수시로 투옥됐고, 그때마다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화염병과 최루탄이 터지는 투쟁의 거리 맨 선두에 섰고, 백발을 휘날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가두연설을 해 '백발의 거리투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독재시대를 살아오면서 가택연금 횟수는 내가 제일 많아, 그리고 4·19부터 마셨으니 최루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마신 사람일 거야. 그리고 지독한 고문으로 그 후유증에 시달려 한양대병원에 무려 14년 동안을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어."
백기완은 쓰러져도 다시 일어섰다. 상처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다시 거리로 나섰다. 그 힘의 원천에 대해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나에게 왜 그렇게 의지가 강하냐고 묻는데 나는 의지가 강한 게 아니야.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목숨과 알통밖에 없어봐. 끝 간데 없이 굶주려보라고. 그땐 부대끼면 부대낄수록 맞으면 맞을수록 기어코 벌떡 일어서는 내가 있더라고. 그건 뭐이가서. 의지? 신념? 아니야. 강요된 죽음 따위는 끝까지 뿌리치려는 몸부림 그것밖에 없었어. 거기서 깨우친 거야.(중략)
이 세상의 참삶은 무엇이더냐. 생명의 승리. 생명 아닌 반생명과 한사코 맞짱 떠 일으키는 참생명을 '살티' 그러는 것이라니까. 이제 우리는 이 썩은 반생명, 자본주의 문명과 싸워 참생명인 살티를 틔우고 있는 거야." (<두어른> 36쪽)
▲ 1990년, 쉰여덟 살, 영등포시장 골목. 노동자탄압 경찰폭력 규탄 평화행진 중 진압경찰이 휘두른 방패에 맞아 실신. |
ⓒ 통일문제연구소 |
1990년대에도 백기완은 거리에서 외치는 자였다. 1991년에는 수서비리사건 규탄과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철야농성을 벌였다. 강경대 열사 등 잇따르는 분신 정국에서 60여 일 동안 거리투쟁을 하면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서 시작된 타살정국이 분신정국으로 이어지는 것을 규탄하려고 서울시청 앞에서 열린 백골단 해체 투쟁의 날 집회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도 지팡이를 든 채 맨 앞에서 맞서다가 시민과 학생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난사되는 물대포와 최루탄을 맞고 실신했다.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었던 박창수 열사가 감옥에서 옥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백골단과 전경 22개 중대를 투입, 안양병원 영안실 벽을 부수고 들어와 박 열사의 시신을 탈취했다. 백기완은 당시 박창수열사 진상규명 범국민대책회의 고문을 맡아 가열차게 투쟁했고,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백기완에게 저술 활동은 길거리 싸움의 연장이었다. 그해 발간한 <이심이 이야기>는 작고 어질고 착한 물고기인 이심이가 덩치 큰 물고기들에게 당하고만 살다가 마침내 비늘이 철갑으로 둘러싸인 힘센 물고기로 변해 세상을 바꾼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자신의 삶과 사상을 정리한 산문 모음집인 <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 놈 아니오>도 출간했다.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찾아서, 민중해방 사상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본격적인 민족문화특강을 전개했다. 한반도 비핵 군축공동대책위원회도 발족시켰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진보진영의 재야운동권 독자후보로 추대돼 출마했다. 결국 낙선했지만 본격적인 진보의 시대를 알렸다. 백기완은 선거 내내 "보수반동들은 곧 분열주의 독재"라면서 "미국이 강제하는 분단독재는 미국의 분단정책을 대행하는 반역일뿐이니, 민중정권만이 민중해방, 우리 겨레의 통일의 주춧돌을 닦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93년부터 신자유주의에 대한 한반도의 신식민지화 분쇄를 위한 싸움을 전개했다. 그 이전까지는 독재정권과 맞섰지만, 김대중 정부 들어서부터는 노동자 민중들과 함께 인간을 돈의 노예로 만드는 천민자본주의와 싸웠다. 자본권력이 정치권력을 압도하기 시작했고, 민중들의 삶은 독재정권 시절과 달라진 게 없었다. 백기완은 이런 자본과의 싸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자본주의 문명이 거대하다? 거대한 거 없어. 세계에서 돈 많은 놈 6만 3천명이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생산되는 국내 총생산과 맞먹는 돈을 가졌대. 축구장 한 개에 다 들어갈 수 있는 한 움큼이 다 망치고 있는 거야. 또 어떤 신문을 보니 세계에서 돈 많은 놈 85명이 갖고 있는 돈이 미국 국내 총생산에 맞먹고 인류 35억이 갖고 있는 돈과 맞먹는다는 거야. 거대한 것 같아도 몇 놈이 다 쥐고 있으니 두려울 게 없어. 우리들만 깨우치면 돼.
독점 자본주의와 부패에 분노하라는 말을 하는데, 난 그런 거짓말에 가장 분노해. 땀을 흘리면 땀은 한 줌 거름이지 내 것이 아냐. 땀을 흘려 땀으로 맺힌 낟알도 땀의 것이야. 땀을 흘린 사람의 것이 아냐. 그런데 땀이 만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 사적소유고 이게 바로 거짓말이야. 남의 것을 빼앗아서 내 것이라고 하는 거. 이걸 누가 분별할 수 있겠어? 땀 흘리는 노동자 민중은 금방 알아. 분노는 땀을 흘리는 사람의 역사적 깨우침이야."
백기완은 <이심이 이야기>에 이어 자본가 계급에 맞설 수 있는 우리 민중의 슬기와 꿈, 이야기 문학의 위대한 서사시이기도 한 <장산곶매 이야기 1·2>를 출간했다.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기도 했던 백기완은 1994년에는 영화극본 <단돈 만원>, 1995년에는 영화극본 <대륙>, <쾌지나칭칭나네>도 창작했다. 1996년에는 시집 <아, 나에게도> 출간을 기념해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1997년에는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회' 대표를 맡았다.
1998년에도 수사기관의 미행과 도청, 탄압이 이어졌다. 이에 굴하지 않고 재정난으로 사실상 문을 닫았던 통일문제연구소를 다시 살리려고 후원회를 결성했다. 1999년에는 수필집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를 출간했고, 2000년에는 한양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내면서 계간 <노나메기>를 창간해 발행했다.
그해 북쪽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식에 초대되어 열세 살 때 헤어진 누님과 57년 만에 평양에서 눈물의 재회를 했다.
▲ 2003년, 일흔한 살. 미국의 이라크침공에 항의하는 반전집회. 대학로 |
ⓒ 노순택 |
"내가 옛말을 끄집어 쓰는 게 아냐. 무지렁이들의 말로 생각하는거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지만 가진 게 딱 하나 있는 사람들, 알통이지. 그런 무지렁이 삶이 드러난 말이나 글은 어디를 가도 없어. 도서관에도 없고 예술을 한다는 사람에게도 없어. 나는 이땅의 무지렁이들, 요샛말로 하면 민중이지 뭐. 민중의 말로 생각하려고 그냥 몸부림치고 있는 거야."
노년의 백기완은 민중들과 함께 거리와 강단 투쟁을 이어갔다. 2003년에는 '노나메기 문화특강' 무료 공개강좌를 열었다. 이 밖에도 장산곶매 이야기, 이심이 이야기, '백기완의 굽이굽이 나의 인생' 특강 등을 진행했다. <백기완의 통일이야기>도 출간했다. 이라크 파병반대 집회에 참가 했다가 경찰이 내리친 방패에 맞아 손목과 정강이, 입술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다.
2004년에는 우리 겨레 위대한 서사시 <장산곶매 이야기 1·2권>을 보충한 완결판, 2005년에는 <부심이의 엄마생각>을 출간했다. 2006년에는 노동자들에게 올바른 인생관을 심어주기 위해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야기' 특강을 열었다. 이때 "통일의 알짜(실체)는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사는 노나메기 세상을 빚는 것"이라며 노래로 특강을 진행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노동자들과 공동으로 '남북 정상이 만나 무엇을 할 것인가', 젊은 청년들을 위로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등의 특강을 진행했다. 또 이야기 소설 <따끔한 한 모금>을 창작해 온몸으로 말하는 '말림'으로 소극장에서 발표했고, 2008년에는 화가 신학철 선생이 <부심이의 엄마생각> 책 내용을 토대로 연작그림 40점을 그려 '부심이의 엄마생각 그림전시회'를 가졌다. 여기서 얻은 수익금 전액을 노나메기 운동에 기부했다.
[백기완, 영면]
① '불쌈꾼 백기완'이 장산곶매 품은 까닭 http://omn.kr/1s2e9
② "오른쪽 귀 옆 날카로운 도끼 자국... 온 몸을 떨었다" http://omn.kr/1s2oh
④ 거리투쟁, 강연, 저술... '늙은 투사'는 쉴 수 없었다 http://omn.kr/1s2pr
⑤ 백발 사자머리 휘날리며... 혁명가는 살아있다 http://omn.kr/1s2eu
▲ 2008년, 일흔여섯 살. 부당해고에 맞선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의 투쟁 지지방문. 서울 금천구 가산동 기륭전자 옛공장 |
ⓒ 정택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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