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목걸이도 금으로 만든 '황금 왕국'.. 유물도 찬란하네
[임영열 기자]
▲ 1921년 경주 노서리에 있는 주막 확장 공사 중에 발견된 국보 제87호 금관총 금관. 높이 44.4cm, 지름 19cm의 금관총 금관은 국내에서 발견된 금관 중 제일 크고 화려한 것으로 신라 금관 양식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 문화재청 |
이는 네덜란드 지리학자 '메르카토르'가 만든 지도보다 400여 년 앞선 시기에 우리의 지명이 세계지도에 표기된 것으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라크 바그다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이드리시 지도'는 그 당시 만들어진 가장 정확한 세계지도로 평가되고 있다.
▲ 관테 양 옆으로 길게 늘어 뜨린 관 드리개. 부활을 상징하는 푸른 곡옥(曲玉)이 달려있다 |
ⓒ 문화재청 |
"신라를 방문한 여행자들은 누구나 그곳에 정착해 나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풍요롭고 이로운 것들이 많다. 금(金)은 너무도 흔하다. 그곳 사람들은 개의 목걸이나 원숭이의 목줄도 금으로 만든다..."
서역의 지리학자 이드리시뿐만 아니었다. 고려 때 일연 스님이 쓴 우리 역사서 <삼국유사>에도 "신라 전성기 때 서라벌에는 17만 9000여 채의 집이 있었고, 그중에 35채는 '금입택(金入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입택이란 집에 금테를 두른 신라 진골 귀족들의 호화 저택을 말한다.
▲ 신라 금관이 발견된 대릉원 일대. 국가사적 제512호로 지정됐다 |
ⓒ 문화재청 |
신라 금관의 맏형, '금관총 금관'
집에다 휘황 찬란하게 금테를 두르고 심지어 개와 원숭이의 목줄까지도 금으로 만들었던 '황금 왕국' 신라의 대표 유물을 꼽으라면 누구든지 '금관'을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왔고, 백제 무령왕릉에서는 금관 대신 검은 비단관에 장식으로 꽂았던 왕과 왕비의 금제 관 꾸미개가 출토됐다. 경북 고령에서 출토된 가야 금관 중 1점은 삼성미술관 '리움'에 있고, 1점은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금관이 발견되지 않았다. 백제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무령왕 금제관식. 국보 제154호 |
ⓒ 문화재청 |
고대 삼국 중 유일하게 발견된 신라의 금관 6점은 모두 경주 대릉원 일대의 고분인 금관총, 금령총, 서봉총, 천마총,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됐으며 나머지 한 점은 도굴범에게 압수한 것으로 교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다.
무덤의 주인이 왕으로 밝혀졌다면 '왕릉(王陵)'이라고 명명됐겠지만 고분의 주인을 모르니 '~총(塚)'이라 이름 붙였다. 6개의 신라 금관 중 국보 제87호로 지정된 '금관총 금관'이 맨 먼저 세상에 나왔다. 신라 금관의 '맏형'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 외관은 원형의 머리띠 위에 山자 모양 3개가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다. 외관의 뒤쪽에 사슴뿔 모양 장식 2개를 세웠다 |
ⓒ 문화재청 |
금관에 숨겨져 있는 '미스터리'
금관총 금관은 외관(外冠)과 내모(內帽)로 이루어져 있다.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진 외관은 형태가 독특하고 화려하다. 원형의 머리띠와 그 위로 솟아오르는 나뭇가지 모양에 뫼산(山) 자 3개를 붙여놓은 형태의 장식을 앞면과 좌·우 양측에 붙였다.
▲ 내모(內帽)는 얇은 금판에 구멍이 뚫린 세모꼴 형태의 모자로 앞쪽에 새가 양 날개를 펼친 모양의 장식을 꽂았다 |
ⓒ 문화재청 |
▲ 내모 앞에 꽂은 새 날개 모양의 장식물 |
ⓒ 문화재청 |
명쾌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출(出) 자 모양 장식은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슴과 새 또한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메신저로 해석하고 있다. 금관에 달려있는 태아 모양의 비취색 곡옥은 '생명의 씨앗'을 상징하는 것으로 '부활'을 꿈꿨던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순금 함유량 85.4%. 세련된 디자인과 독특한 조형미. 푸른 곡옥(曲玉)이 달린 화려한 장식. 관테 양 옆으로 길게 늘어 뜨린 드리개. 금실에 매달린 달개들이 흔들리면서 사방으로 부서지는 황금빛은 찬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저 화려한 금관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실제로 왕들이 사용했던 실용품일까 아니면 의례용품일까. 1500여 년 동안 어둠에 묻혀 있다가 세상에 나온 신라 금관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로움과 함께 무한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 뒤쪽에는 사슴뿔 모양 장식 2개를 세웠다. 뿔에는 나뭇잎과 푸른 열매를 상징하는 굽은옥(曲玉)이 규칙적으로 매달려 있다 |
ⓒ 문화재청 |
주막 뒤뜰에서 나온 금관이 미국 은행으로 간 사연
약 천년 동안 한반도의 동남부 지역을 지배하며 화려한 문화·예술을 꽃피웠던 신라의 왕도 경주에는 "밭고랑에서 김매는 농부의 호미자루에도 보물이 걸려 나온다"라는 말이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유물이 많은 곳이다.
▲ 발굴되기 전 금관총의 옛 모습 |
ⓒ 국립중앙박물관 |
이때 주막 근처를 지나던 일본인 순사가 공사장 인근에서 아이들이 신기하게 생긴 구슬을 가지고 노는 것을 발견했다. 예사 물건이 아님을 직감한 순사는 즉각 상부에 보고했다. 공사는 중단되었고 조선총독부에서 고적 조사단이 내려왔다. 조사 결과 주막 뒤뜰 언덕은 신라 왕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고분에서는 금관과 금제 허리띠(국보 제88호), 금팔찌, 금동 신발, 귀걸이 등의 장신구로 치장한 유해와 함께 환두대도, 덩이쇠, 철도끼 등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인들이 주축이 된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의 발굴은 아마추어 수준이었다. 전문가 한 사람 없이 진행된 조사는 발굴이라기보다는 도굴에 가까웠다. 비전문가들의 준비 없는 발굴은 4일 만에 끝났다.
▲ 금관총 금관과 함께 출토된 국보 제88호 금제 허리띠. 길이 109㎝ 과대에 늘어뜨린 장식인 요패는 17줄로 길게 늘어뜨리고 끝에 여러 가지 장식물을 달았다 |
ⓒ 문화재청 |
1927년 11월 경주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다. 금제 허리띠와 유물들을 싹 쓸어 갔지만 금관은 무사했다. 도둑맞은 유물은 6개월 후 경찰서장의 관사 앞에서 발견됐다. 사람들은 일본인 서장이 범인일 거라고 수군거렸다. 1956년에 또다시 도둑이 들었으나 다행히 진품이 아닌 모조품 금관을 훔쳐갔다.
이렇게 살아남은 금관총 금관은 6・25 전쟁이 터지자 또다시 위기에 처한다. 북한군의 남하로 국립중앙박물관 서울 본관과 부여 분관 등 주요 박물관이 북한군 치하로 넘어갔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승만 정부에서는 경주 분관의 주요 문화재라도 지키기 위해 금관총 금관과 금제 허리띠 등 140여 점을 급하게 미국 은행으로 피신시켰다. 미국으로 건너간 금관은 미국은행(Bank of America) 샌프란시스코 지점에 보관됐다.
전쟁이 끝나고 금관총 유물은 '마스터피시스 오브 코리안 아트(Masterpieces of Korean Art)'라는 전시회로 미국 대도시를 돌며 한국 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린 후 무사히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온 금관은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찬란했던 신라 천년, '황금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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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격월간 문화잡지 <대동문화>123호(2021년 3,4월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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