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양김 단일화 호소하며 사퇴했던 '민중후보' 백기완 별세

오현석 2021. 2. 15.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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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백기완(白基玩)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별세 소식에 여야 정치권은 한목소리로 고인의 뜻을 이어가겠다고 다짐했다.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이날 오전 서면 논평을 통해 “선생님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지켜내셨다”며 “민주당은 선생님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 모두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도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등한 세상 또한 고인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며 “국민의힘은 더 나은 세상을 열망했던 고인의 뜻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주어진 소명에 더욱 충실히 임하겠다”고 말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5일 영면했다. 향년 89세. 백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 생활을 해왔다. 사진은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 1주기 추모식 참석 모습. 뉴스1(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우리 현대사와 민주화의 큰 고비와 이정표마다 늘 고인이 있었다”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그의 숭고한 뜻은 정의당과 우리 사회의 수많은 정의로운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끈질기게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이날 페이스북에 “선생께서 작사하신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처럼 앞서서 나가시는 님을 산 자로서 충실히 따르겠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선생께서 평생 맞섰던 철옹성 같은 기득권의 벽, 두려움 없이 마주하겠다”고 밝혔다.


양김(兩金) 단일화 외치며 사퇴한 민중 후보

제13대 대통령선거 당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선거 벽보. 고인은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투표일 이틀 전 스스로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제공.

고인의 과거 정치 활동은 ‘민중 후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1987년과 1992년 두 차례 독자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다.

1987년 대선에선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촉구하며 큰 화제를 모았다. 기호 8번 후보였던 고인은 1987년 12월 3일 “민주연립정부안(案)만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며 양김(兩金) 후보에 단일화를 공식 제안했다. 사흘 뒤 서울 대학로에서 열린 집회에선 “정말 어물어물하다가는 노태우 씨에게 또 빼앗기게 되니, 두 김씨는 제발 내 말을 좀 들어달라”고도 호소했다. 당시 10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두루마기 차림으로 주먹을 불끈 쥔 채 포효하는 고인의 모습은 세간의 화제였다.

1987년 제13대 대통령선거 후보로 나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당시 서울 대학로에서 유세하는 모습. 뉴스1(통일문제연구소 제공)

고인은 이후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후보와 김대중 당시 평화민주당 후보와 연이틀 개별 회동을 가졌으나, 끝내 설득에 실패했다. 이에 고인은 1987년 12월 14일 “단일화 실패 책임을 내가 지고 물러가겠다”며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틀 뒤 치러진 대선에선 노태우 당시 민주정의당 후보가 34.64%의 득표율로 제13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는 각각 28.04%, 27.05%를 득표했다.

고인은 3당 합당 이후 열린 1992년 대선에선 끝까지 완주했다. 결과는 23만표, 1.0% 득표였다. 하지만 성과가 없었던 건 아니다. 당시 고인이 내세웠던 ‘민중 후보론’은 1997년 대선에서 국민승리21 권영길 후보(30만표·1.2% 득표)의 완주와 민주노동당 창당을 거쳐 현재 정의당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날 정의당에서 “(고인은) 대통령선거에 독자 민중 후보로 출마하심으로써 진보정치의 지평을 열기도 하셨다”(황순식 비상대책위원)는 평가가 나온 이유다.


민주화운동 현장에…재야 출신 정치인과 깊은 인연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이 1974년 독립군 출신 장준화 선생과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군법재판을 받는 모습. 80㎏ 넘는 거구였던 고인은 1979년 대통령 간접선거반대 국민총궐기대회(이른바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로 고문을 당해 체중이 40㎏대로 내려앉았다고 한다. 뉴스1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고인은 생전 재야 출신 정치인들과도 관계가 깊었다. 1973년 고(故) 장준하 선생과 함께 벌였던 ‘유신헌법 개헌 청원 백만인 서명 운동’,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진 직후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개최했던 ‘대통령 간접선거반대 국민총궐기대회’ 사건(일명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 등 굵직한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은 1985년 3월 결성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서울 민통련 의장을 지냈다. 당시 민통련에 참여했던 정치권 인사로는 김문수 전 경기지사, 이부영 전 열린우리당 의장, 임채정 전 국회의장,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 등이 있다. 당시 민주화청년연합(민청련)을 이끌었던 고(故)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도 민통련 창립 과정에 깊이 관여했다. 고인은 2011년 12월 김 전 장관의 장례식 당시 빈소를 찾아 “이 늙은이가 죽어야 하는데 근태가 먼저 죽어 내가 부끄럽다”며 흐느끼기도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도 고인은 한·미 FTA 반대 운동, 용산 참사 규탄 집회 등 시위 현장에 꾸준히 참석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촉구한 2016~2017년 촛불 집회엔 23차례 가운데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7년 7월엔 한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노점상은 죽어가고 있다. 다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현석 기자 oh.hyunseok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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