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영면

이소연 2021. 2. 15.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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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큰어른'으로 꼽히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별세했다.

통일문제연구소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새벽 서울대병원에서 영면했다.

분단으로 인해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통일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통일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빈민운동 등에도 투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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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이 15일 별세했다. 연합뉴스
[쿠키뉴스] 이소연 기자 =‘진보의 큰어른’으로 꼽히는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통일문제연구소에 따르면 백 소장은 이날 새벽 서울대병원에서 영면했다. 백 소장은 지난해 1월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지속해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백미담·백현담, 아들 백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구체적인 발인 및 장례 일정은 이날 오후 1시 발표된다. 

백 소장은 지난 1933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 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주거지를 옮겼다. 분단으로 인해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나지 못하게 되자 통일운동을 시작하게 됐다. 통일운동뿐만 아니라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 빈민운동 등에도 투신했다. 

1960년 4·19 항쟁부터 1964년 한일협정 반대투쟁, 1969년 3선 개헌 반대투쟁 등 독재 정권에 맞섰다. 1974년에는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으로 고(故) 장준하 선생과 함께 구속됐다. 1979년에는 ‘명동 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구속돼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구속 수감됐다. 권인숙 성고문사건 진상폭로대회를 주도하다 구속됐고 가택연금 되는 일도 있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이뤄진 대선에서 민중대통령 후보로 추대됐다. 그러나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1992년 대선에도 출마, 완주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투쟁은 이어졌다. 반핵운동, 원진레이온 직업병 은폐 규탄, 백골단 해체 투쟁, 국가보안법 철폐 운동,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 참석, 기륭전자, 용산참사, 쌍용차, 유성기업, 콜트·콜텍, 파인텍, 한진중공업, 밀양송전탑 반대 투쟁,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투쟁,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 등 투쟁의 현장에 늘 백 소장이 함께 했다. 2016년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지자 광화문 촛불집회에서 23차례 동안 빠짐없이 참석해 앞자리를 지켰다. 

시인이자 수필가로도 활동했다.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토대가 된 장편 시 ‘묏비나리’의 원작자다.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장산곶매 이야기’,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버선발 이야기’, ‘젊은 날’, ‘아, 나에게도’ 등의 저서를 남겼다. 

soyeo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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