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인천 사람들은 이곳을 참 좋아했다
'인천, 그림이 되다.' 낡은가 하면 새롭고, 평범한가 싶으면서도 특별한. 골목길만 지나도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도시, 인천. 추억이 그리움으로, 때론 일상으로 흐르는 공간이 작가의 화폭에 담겼다. 김재열 화백의 손끝에서 피어난 자유공원과 개항장 거리. 그 따뜻하고 섬세한 붓 터치를 따라, 인천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기자말>
[글 정경숙, 사진 임학현]
▲ 인천자유공원 맥아더 동상을 바라보면서 53×45.5(cm) 2014. 인천 사람 중에 그 시절 자유공원에 관한 추억 하나쯤 없는 이가 있을까. 서울에 남산이 있다면 인천에는 자유공원이 있었다. |
ⓒ 김재열 |
자유공원의 나이 든 사진사
'참, 변하지도 않지. 예전 그대로야...'
여기는 자유공원. 낡은 사진첩, 빛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보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188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로 세운 서구식 근대 공원. 서울 탑골공원보다 9년이나 앞섰다. 원래 이름은 각국(各國)공원으로 개항기 때 들어온 외국인들을 위해 조성했다. 자유, 지금의 이름은 1957년 이곳에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한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면서 지어졌다.
▲ 자유공원의 하나뿐인 사진사. 50여 년, 인천 사람들의 '빛나는 한때'를 렌즈 너머로 보았다. |
ⓒ 임학현 |
지금도 맥아더만 찍는 건 2천 원, 함께 찍는 건 3천 원. 아, 자유공원엔 그때 그 시절의 사진사가 아직,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다. 며칠만의 영업 개시인가, 뜻밖의 손님 방문에 그와 함께 있던 어르신들이 더 반가워한다. "어디서 찍어드릴까. 아무렴, 맥아더 앞에서 찍어야지." 사진사는 누군가는 동상을 없애라 한다지만 자신은 맥아더 덕분에 여태 먹고 산다며, 그가 있어 이 자리를 떠날 수 없다고 했다.
"잘 나올지 모르겠네. '일반 사람'은 괜찮은데 '근대 사람'은 사진을 많이 찍어봤기 때문에. 내, 떨려요." 나이 든 사진사는 현란한 촬영 기술에 익숙한 요즘 사람을 찍는 게 아무래도 부담스럽다. 하지만 50여 년 세월을 카메라 하나로 버텨오지 않았던가. 뷰파인더 너머로 표정과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잡아내는 그의 눈빛에서, 노장의 노련함과 진지함이 묻어난다.
이름은 이선우, 나이는 여든. '긴담모퉁이길'에서 태어났다. 사진을 처음 찍은 건 스물다섯 살 때. 카메라가 '재산'이던 시절, 운 좋게 미제 필름 카메라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동네 아이들이 예뻐서 찍어주곤 했는데, 그러면 부모들이 고맙다며 용돈을 쥐여줬다.
▲ 자유공원의 하나뿐인 사진사. 50여 년, 인천 사람들의 '빛나는 한때'를 렌즈 너머로 보았다. |
ⓒ 임학현 |
오늘 자유공원의 사진사는, 그 혼자다. 휴대폰으로도 누구나 쉽게 사진을 찍는 시대에 손님이 있을 리 없다. 매일 자유공원을 지키고 있어도, 카메라 셔터 한번 못 누르는 날이 허다하다. 장롱 깊숙이 간직한 먼지 쌓인 앨범 속 흔적을 찾아, 그를 보러 오는 사람이 아주 가끔 있을 뿐이다.
▲ ‘생애 가장 빛나던 시절’이 깃든 자유공원은, 인생의 황혼기마저 품어준다. |
ⓒ 임학현 |
자유공원 광장 한편에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구멍가게. 낡은 지붕엔 이름이 하얗게 지워진 간판이 아무렇게나 얹혀 있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주인장이 손님이 쓰는 테이블에 후루룩 끓인 찌개에 밥 한 공기 놓고 때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조명환(53)씨는 이 오래된 가게를 아내와 오붓이 꾸려가고 있다. 누이가 하던 일을 잠시 도와주려던 것이 어느새 10년을 훌쩍 넘겼다.
자유식당은 1960년대에 처음 문을 열었다. 자유공원이 전성기를 누리던 1970~1980년대 이곳도 잘나갔다. 가게 일에 식당 일에, 2층 옥상에선 새벽까지 포장마차를 열었다.
장사가 잘됐다고 해서 돈을 많이 번 것은 아니다. 당시 주인 어르신들은 음식이며 물건값을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받았다. 가게를 찾는 이들은 그들에게 손님이 아니라, 사는 이야기 주고받고 때론 밤늦도록 술잔을 함께 기울이는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오늘 이 자리를 지키는 부부도 욕심이 없다. 이곳은 자유공원 사람들의 쉼터고 사랑방이다. 삶이 저물어갈 무렵, 젊은 시절부터 찾던 공원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노인들은 추우면 이 안에서 온기를 채우고, 주머니가 비었을 땐 외상으로 커피 한잔 편히 마시고 간다.
부부는 쉬고 싶어도, 가게 문을 마음대로 못 닫는다. 매일같이 오는 단골 어르신들이 실망할까, 문득 그리움을 좇아온 사람들이 헛걸음이라도 할까 싶어.
▲ 그대로 있어줘서, 고마운. 자유공원의 쉼터, 추억의 공간 |
ⓒ 임학현 |
가파른 세상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래전 기억을 붙잡고 있는 곳. 그 낡아가는 풍경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 오늘도 자유공원의 구멍가게는 지나온 날처럼, 문을 활짝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 관동교회 앞길 75×56(cm) 2013 인천 개항장. 거리 전체가 '아프기에, 아픈 만큼' 기억해야 할 역사의 박물관이다. |
ⓒ 김재열 |
▲ 팟알은 일본식 근대건축물이지만 그 안은 인천, 대한민국으로 꽉 차 있다. |
ⓒ 임학현 |
▲ 옛 문헌 그대로 빚은, 팟알의 팥죽과 나가사키 카스텔라 |
ⓒ 임학현 |
카페 '팟알(pot_R)'. 시간의 풍상을 고스란히 간직한 근대건축이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곳은 개항기 인천항에 노동자들을 대주던 하역업체 대화조(大和組)의 사무소(등록문화재 제567호)였다. 일본의 전형적인 '마찌야(町家)' 양식이지만, 인천만의 이야기로 꽉 채워 전국에서 찾는 명소로 거듭났다.
▲ 1970년대 2층 양옥집에서 문화예술의 새 숨을 튼 도든아트하우스 |
ⓒ 임학현 |
▲ 도든아트하우스 이창구 관장 |
ⓒ 임학현 |
옆 골목으로 들어서면 시곗바늘은 1880년대에서 1970년대로 돌아간다. '도든아트하우스'는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에 지은 전형적인 2층 양옥집이었다. 이창구(60) 작가가 먼지 자욱이 쌓인 빈집을 발견해 쓸고 닦아 새 숨을 불어넣었다. 남겨진 것은 최대한 살렸다. 공간에 스민 시간의 흔적은 한번 지우면 되돌릴 수 없기에.
'도든'은 '도(圖), 그림이 든 집'과 '돋아나다'라는 뜻을 품고 있다.
▲ 작지만 깊은 공간, 花요일. 그 안에서 행복한, 공간지기 신월계 |
ⓒ 임학현 |
문화 살롱 '花(화)요일'. 테이블 두 개로도 꽉 차는 작은 공간이지만, 깊고 풍요롭다. 그 안엔 세상 모든 이야기가 담긴 책이 가득하고, 한 뼘 갤러리가 있고, 비밀스러운 다락방이 있다.'화요일'에서 인문학 강의를 한 작가 김훈은 이 공간을 '재미있다'라고 표현했다.
공간지기의 이름도 달의 계수나무, 신월계(55). 삶의 결도 다르다. 그의 고향은 홍천.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따라 30년 전 인천으로 왔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위로가 필요할 때면, 자유공원을 돌다 개항장 거리를 거닐곤 했다. 그러다 문득 '책을 맘껏 읽고 싶어서' 7년 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카페 문을 열었다. "이 안에서 난 끌림이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만난답니다." 따뜻한 골목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그는, 행복하다.
긴긴 세월을 보듬은 나무로 지은 집과 오래된 돌계단, 구불구불한 골목, 그리고 햇살 좋은 날이면 더 짙푸르게 빛나는 키 큰 플라타너스... 마음으로 걷는 그 길 위에서, 발걸음은 점점 느려져만 간다. 여기는 아프지만, 우리가 사랑하고 추억하는 인천 개항장이다.
도든아트하우스 중구 신포로 3번길 90 032-777-5446
花요일 중구 신포로23번길 80 032-762-1003
▲ 인천만개(仁川滿開) 488×112(cm) 2013. 자유공원 남쪽 기슭에 서면, 시간이 고인 집들과 인천 앞바다부터 멀리 섬들이 펼쳐진다. |
ⓒ 김재열 |
▲ 인천 그림을 그린 김재열 작가. 인천예총 회장,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교수 등을 역임한 인천의 원로 작가다. 인천 구석구석의 풍경과 건물에 내재된 가치를 캔버스에 담는다. 18회에 걸쳐 수채화 개인전을 열었으며, NIB남인천방송 '인천 여행 스케치 기행', 인천일보 '풍경 드로잉'을 연재하며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현재 인천미술협회와 한국미술협회 고문, 대한민국 수채화 작가 원로회 의장을 맡고 있다. |
ⓒ 김재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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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에서 발행하는 종합 매거진 <굿모닝인천> 2021년 2월호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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