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태봉산에는 '융릉'과 관련한 비석이 있다?
김희태 2021. 2. 14. 17:33
현륭원 외금양지에 설치된 화성 외금양계비, 보호와 관심 필요해
이러한 융릉과 관련한 장소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외금양계비(外禁養界碑)다. 외금양계비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과 봉담읍의 경계에 있는 태봉산(泰峰山)에 있다. 외금양계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외금양계(外禁養界)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금양지(禁養地)란 어떠한 목적으로 보호를 위해 지정된 지역에서 나무의 벌채와 농지의 개간, 가축을 기르는 행위를 금지한 것을 말한다.
외금양계비를 세운 목적은 인근에 있는 융릉과 관련이 있는데, 여기서 융릉은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헌경의황후(혜빈 홍씨, 1735~1815) 홍씨의 합장릉이다. 융릉은 여러 차례 무덤 명칭의 변경이 있었는데, 최초 세자의 시호는 사도(思悼), 무덤의 명칭은 수은묘(垂恩墓)라 불렸다.
외금양계비의 경우 교차 분석을 통해 표석을 세운 시기와 목적 등이 확인된다. 왕의 행적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인 <일성록>을 보면 홍범산(洪範山)과 태봉산(泰峰山), 독산산성(禿山山城, 현 오산 독산성) 일대가 현륭원의 외금양지에 속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외금양계비는 왕릉에서 발견된 최초의 금표석으로, 이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융릉(현륭원) 이외에 다른 왕릉에서도 화소와 금양지를 조성한 기록은 확인된다. 하지만 외금양계비의 사례처럼 금표석의 실물이 확인된 적은 없다.
[김희태 기자]
경기도 화성시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를 이야기할 때 화성 융릉과 건릉(사적 제206호)을 언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지금의 수원시나 화성시의 경우 해당 장소가 차지하는 비중은 단순히 문화재로의 가치뿐만 아니라 도시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실제 매년 열렸던 정조대왕 능행차 행사의 최종 목적지 역시 융릉(隆陵)과 건릉(健陵)이기에 해당 장소가 가지는 의미를 짐작해볼 수 있다.
▲ 태봉산 외금양계비를 찾아가는 길 |
ⓒ 김희태 |
이러한 융릉과 관련한 장소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외금양계비(外禁養界碑)다. 외금양계비는 경기도 화성시 정남면과 봉담읍의 경계에 있는 태봉산(泰峰山)에 있다. 외금양계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외금양계(外禁養界)가 새겨져 있다. 여기서 금양지(禁養地)란 어떠한 목적으로 보호를 위해 지정된 지역에서 나무의 벌채와 농지의 개간, 가축을 기르는 행위를 금지한 것을 말한다.
보통 조선 왕릉이 조성되면 왕릉을 중심으로, 산불로부터 능을 보호하기 위한 화소(火巢)와 일종의 산림보호 구역이라고 할 수 있는 금양지를 조성했다. 외금양계비는 현륭원(융릉)의 외금양지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표석으로, 산림문화의 관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 화소 표석 홍성 순종 태실지에 남아 있는 표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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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융릉(隆陵) 장조와 헌경의황후의 능으로, 여러 차례 시호와 능호의 변경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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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금양계비를 세운 목적은 인근에 있는 융릉과 관련이 있는데, 여기서 융릉은 장조(사도세자, 1735~1762)와 헌경의황후(혜빈 홍씨, 1735~1815) 홍씨의 합장릉이다. 융릉은 여러 차례 무덤 명칭의 변경이 있었는데, 최초 세자의 시호는 사도(思悼), 무덤의 명칭은 수은묘(垂恩墓)라 불렸다.
하지만 정조가 즉위한 뒤 사도세자는 장헌세자(莊獻世子)로, 무덤의 명칭은 영우원(永祐園)으로 높여졌다. 이후 지금의 위치인 수원부의 화산으로 영우원을 옮긴 후 무덤의 명칭은 현륭원(顯隆園)으로 바뀌게 된다. 지금처럼 융릉의 능호를 받은 것은 1899년(고종 36)으로, 이때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이 되었고, 이때부터 융릉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 태봉산과 외금양계비 정남면과 봉담읍의 경계에 있는 태봉산에 세워져 있다. |
ⓒ 김희태 |
▲ 외금양계비 전면에는 외금양계(外禁養界)가 새겨져 있다. |
ⓒ 김희태 |
외금양계비의 경우 교차 분석을 통해 표석을 세운 시기와 목적 등이 확인된다. 왕의 행적과 국정을 기록한 일기인 <일성록>을 보면 홍범산(洪範山)과 태봉산(泰峰山), 독산산성(禿山山城, 현 오산 독산성) 일대가 현륭원의 외금양지에 속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1798년(정조 22) 2월 19일자 기록을 보면 태봉산 아래에 사는 신광린(申光隣)이 외금양지의 보호와 관련한 민원을 올리게 된다. 이에 현륭원 영 서직수(徐直修)로부터 관련 민원을 보고 받은 조심태(趙心泰, 1740∼1799)는 외금양지의 보호를 위해 정조에게 산(태봉산) 허리 아래 금표와 표석을 세워 경계의 표지로 삼도록 청했다. 이를 정조가 받아들이면서 세워진 것이 바로 외금양계비인 것이다.
▲ 외금양계비의 옆면 총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
ⓒ 김희태 |
한편 외금양계비는 왕릉에서 발견된 최초의 금표석으로, 이는 매우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융릉(현륭원) 이외에 다른 왕릉에서도 화소와 금양지를 조성한 기록은 확인된다. 하지만 외금양계비의 사례처럼 금표석의 실물이 확인된 적은 없다.
또한 외금양계비를 통해 융릉과 건릉의 화소와 외금양지 규모와 이후 확대되는 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문화재다. 실제 지난 2004년 금표석의 최초 발견에 대한 <경인일보> 기사를 보면 외금양계비에 대해 조선 후기 산림행정 자료로 가치가 높다는 점과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있다.
▲ 측면에서 바라본 외금양계비 융릉과 관련이 있는 장소이자 산림행정 자료인 외금양계비 |
ⓒ 김희태 |
하지만 외금양계비가 발견된 지 17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비지정 문화재로,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성시의 대표적 관광지로 융릉과 건릉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정작 융릉과 관련이 있는 외금양계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은 안타까운 부분이다. 외금양계비는 융릉과 연계되는 장소이자 동시에 산림문화자산으로 그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릴 필요가 있으며, 보존과 관리가 될 수 있도록 관심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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