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의 '핫플' 성심당, 밀가루 두 포대로 이룬 기적

추미전 2021. 2. 14.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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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러디스 빅토리호 기적의 사람들 ④] 성심당과 메러디스 빅토리호, 70년의 인연

1950년 12월 25일, 포탄이 빗발치는 흥남부두에서 한 척의 배가 필사적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60인승 미국 화물선인 그 배에는 정원의 200배가 훨씬 넘는 14000명의 피난민이 타고 있었다. 이들의 항해는 훗날 '가장 작은 배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배'로 기네스북에 오른다. 역사의 회오리를 온몸으로 맞으며 치열하게 살아낸 메러디스 빅토리호 사람들, 이들을 추적해 한 편의 방송으로 만드는 기획안은 올해 '한국 콘텐츠 진흥원 방송 제작 지원 프로그램'으로 선정됐다. 1년여에 걸쳐 방송 제작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이야기를 싣고자 한다. <편집자말>

[추미전 기자]

오전 8시, 고소한 빵의 향기가 매장을 넘어 골목까지 퍼져 나간다. 이른 시간이지만 기다렸다는 듯 하나둘 매장으로 들어서는 사람들. 대부분의 빵들은 3층 제빵실에서 만들어지지만 이 곳의 대표적인 메뉴 '튀김 소보로'는 매장 한편, 손님들에게 공개돼 있는 코너에서 직접 튀겨진다. 하루 2만여 개의 빵을 생산한다는 성심당 대전 본점 이야기다.
  
 오전 8시만 넘으면 빵집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다
ⓒ 추미전
 
이곳을 찾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관광객들이다. 대전에 와야 만날 수 있는 빵집이라는 인식 덕분에 성심당은 어느새 빠질 수 없는 관광코스가 됐다. 그런데 빵집 성심당의 탄생이 '메러디스 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성심당의 창업주 임길순의 고향은 함경남도 함흥. 그곳에서 사과농장을 했던 40대의 가장 임길순은 함흥 지역 1세대 가톨릭교도였다. 흥남과 원산은 일제 강점기부터 독일과 프랑스의 신부들이 선교를 시작한 곳으로 1950년 당시에 벌써 57개의 성당이 있을 정도였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임길순

임길순은 그 지역에서도 규모가 꽤 큰 덕원 수도원에 다니는 독실한 가톨릭 신도였다. 성 베네딕도 수도회 산하 덕원 수도원은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선장 마리너스 수사가 평생 머물렀던 미국 성 베네딕도 뉴튼 수도원이 지원하던 성당 중의 한 곳이었다.

그때는 서로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덕원 수도원과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 뉴욕 뉴튼 수도원과 경북 왜관 수도원은 훗날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신비한 인연으로 엮이게 된다(관련기사 : 60명 정원 선박에 1만4천 명 피난민 태운 선장의 결단).

광복 이후 들어선 공산 정권은 종교에 배타적이었다. 흥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임길순의 장녀 임정숙(84)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가톨릭에 대한 탄압은 초등학교 안에까지 미쳤다고 한다.

"성당에 다니는 애들을 흰둥이라고 부르며 놀렸죠. 아무리 똑똑해도 발표도 시켜주지 않고 학교 임원도 시켜주지 않았고 불이익을 많이 줬어요."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던 임길순은 1950년 10월 연합군이 흥남으로 들어오면서 다시 마음 놓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12월에 접어들면서 난데없는 연합군 철수 소식이 전해졌다. 또다시 받게 될 신앙의 박해를 염려한 임길순은 피난을 결심한다. 성당 신도들 가운데 리더격이었던 임길순은 같은 성당의 가톨릭 성도들 200여 명을 이끌고 함께 피난길에 나선다.

무작정 도착한 흥남부두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사람들로 빽빽했다. 임길순의 장녀 임정숙의 증언이다.

"서호 해수욕장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이었어요. 그런데 모래알보다 사람들이 더 많아요. 말도 못 하죠."

탈 수 있는 배의 숫자는 부족했고 언제 배를 탈 수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었다. 그때 임길순의 무리와 함께 있던 2명의 젊은 신부가 아이디어를 냈다. 흰 천에 빨간 십자가를 그린 깃발을 높은 나뭇가지 위에 매달았다. 그리고는 매일 그 십자가를 높이 들고 흥남부두에 서 있었다. 어느 날 그 깃발을 본 미군이 다가와 임길순을 비롯한 성당 식구들을 안내해 배에 오를 수 있었다. 그 배가 바로 메러디스 빅토리호였다.

임길순은 그때 그 배에서 기도했다고 한다.
 
이 전쟁에서 살아나 목숨을 이어가게 된다면 평생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사하며 살아가겠습니다 .
  
 성심당 창업주 고 임길순과 한순덕
ⓒ 추미전
 
배는 사흘 만에 무사히 거제도에 닿았다. 그러나 곧 돌아갈 거라 생각하고 변변한 살림살이 하나 없이 떠나온 피난민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거제도에서 잡아온 생대구를 사서 국을 끓여 파는 장사를 하며 겨우 연명했다. 삶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후 진해로 이사했다가 다시 서울로 갈 결심을 한다.

어느새 자식들도 더 태어나 가족은 7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임길순은 막 개통한 통일호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기차가 대전에서 고장이 나 멈춰 버렸다. 기차가 고쳐질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던 임길순은 가족을 데리고 가까운 성당을 찾아간다. 그곳이 바로 대전 대흥동 성당이었다.

성당에서는 진해에서 올라온 가난한 피난민 임길순에게 구호물자인 밀가루 두 포대를 나눠 주었다. 임길순의 아내 한순덕은 밀가루 두 포대를 먹고 나면 또 살아갈 일이 막막하다는 생각에 아이디어를 낸다. 밀가루로 찐빵을 만들어 팔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장사를 할 만한 곳이 없었다. 일단 오가는 사람들로 붐비는 대전 노점에서 장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임정숙씨는 말을 잇는다.

"대전역도 앉을 틈도 없이 사람들로 붐볐어요. 결국 잔뜩 쌓여 있는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거기서 장사를 시작했지요."

놀라운 것은 그 노점에서 장사를 하면서도 가게 명패를 세운 것이다. '성심당'. 예수의 마음을 나타내는 '성심'을 빵집 이름으로 정하고 그렇게 노점 장사를 시작했다. 초창기 장사는 쉽지 않았다. 장사를 하고 돌아오면 또 다음날 장사 준비를 해야 하는 힘들고 빠듯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임길순은 배에서의 기도를 기억하고 실천했다.

주변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봉사 거리를 찾아 하기 시작했다. 난리통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던 시절, 성당에는 장례를 치를 일이 많았다. 임길순은 장례가 있을 때마다 성당에 가서 시신을 염하는 일을 직접 했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는 그 일을 그는 그 후 수십 년간 이어갔다. 팔고 남은 빵들을 주위에 나눠준 것은 물론이었다.

임정숙씨는 그런 날 중의 하루를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겨울인데 아버지가 아주 추워하시면서 들어와서 내복을 내놓으라는 거예요. 아버지, 내복 안 입고 가셨어요? 하고 내복을 내어 드렸죠. 그랬더니 글쎄, 자신이 입고 계시던 내복을 거지가 너무 추워 떨고 있길래 벗어주고 오셨다는 거예요."

성심당의 사훈
 
 성심당 내부에 걸려있는 사훈, 모두에게 좋은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 추미전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

이 한 마디가 성심당의 사훈이다. 

성심당의 2대 사장 임영진씨는 현재 가톨릭 교회의 사회운동인 '포콜라레'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바뀌기 위해서는 기업이 바뀌어야 하고 기업이 바뀌려면 기업을 운영하는 기업가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게 이 운동의 주요 골자다. 100% 정직한 납세를 기업가의 기본자세로 삼을 뿐만 아니라 한해 발생하는 기업 이윤의 15%를 직원에게 돌려주는 것을 경영의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경쟁이 아닌 상생, 독점이 아닌 나눔을 목표로 운영되는 빵집, 이곳이 대전 시민 모두가 사랑하는,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는 창업주 임길순씨가 메러디스 호에서 했던 간절한 기도에 있다.
 
 1967년 대전 은행동에 자리한 초창기 성심당
ⓒ 추미전
   
임정숙씨의 증언에 따르면 성심당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성장을 한 1990년대 초, 아버지와 어머니는 미국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돌아온 아버지가 뉴튼 수도원에서 메러디스호 선장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글쎄, 보니까 그분이 맞다는 거예요. 옛날 그 배의 선장님, 성당 수위를 하고 있더라고 하시더라고요. 말이 안 통했지만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하셨어요."

어느 지역이든 여행을 가면 항상 수도원이나 성당을 먼저 찾아갔다는 임길순씨는 뉴저지에 갔을 때 성 베네딕도 수도원을 찾았고 수사가 된 레너드 라루 선장을 만날 수 있었다. 4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미국의 한 수도원에서 만난 옛 선장과 피난민의 사연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라 할 만하다.

밀가루 두 포대로 시작해 직원 500여 명을 둔 빵집으로 성장한 성심당. 그 뿌리가 1950년 12월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의 항해에 있었다.
  
 수사가 된 선장, 레너드 라루
ⓒ 추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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