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한 여성 강간한 남성 무죄" '준강간 사건' 뒤집힐까 [한승곤의 사건수첩]
163개 여성단체 공대위 조직..'준강간 사건' 조사 착수
[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만취한 여성들만 노려 성폭행 등 범행을 저지르는 악질 범죄자들에 대한 처벌 수위가 현저히 낮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처벌 기준이 제한적으로 적용, 사실상 제대로 된 엄벌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유사 범죄는 지속해서 일어나고 있어 관련 법 개정을 통해 가해자들에 대한 강한 처벌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현행 법은 `준강간` 범죄를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성폭력`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판례를 보면 범죄가 저질러지는 상황인 만취 상태를 말하는 `술에 일시적으로 취하거나 잠이 든 경우`의 경우 심신상실로 판단하지 않는 일도 있어 아예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또 `항거불능`이란 요건도 `폭행 또는 협박이 현저히 곤란한 경우` 등 제한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비판도 있다. 이 때문에 강간죄와 함께 준강간 역시 당사자의 `동의 여부`를 성폭력으로 판단하는 기준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이 여성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실제 한 사건의 경우 가해자는 정신을 잃은 여성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질렀지만 무죄를 선고 받았다. 이 사건에서 여성이 정신을 잃은 상태를 말하는 만취 상태를 노려 가해자가 범행을 저질렀다는 객관적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2017년 5월5일 여성 A 씨는 친구들과 클럽에서 놀다가 한 남성과 합석해 술을 마신 뒤 갑자기 기억을 잃었다. 깨어났을 땐 이미 성폭력이 발생한 뒤였다. A 씨는 피해 사실을 경찰에 신고했고, 폐쇄회로(CC)TV를 통해 4명의 남성이 정신을 잃고 걷지도 못하는 A 씨를 끌고 한 모텔로 데려간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이 사건 가해자들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서울고등법원 제9형사부는 지난해 5월7일 "피해자의 항거불능 상태임은 분명하나 그것이 피고인이 만취 상태를 이용하여 강간하였다는 고의를 증명하기 어렵다"며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 상고심 판결을 앞두고 있다.
상황이 이렇자 여성계 등 시민단체는 가해자에게 엄벌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관련 법 개정을 촉구했다. 천주교성폭력상담소 등 163개 단체는 지난해 7월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정문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준강간사건의 정의로운 판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 출범을 알렸다.
이날 공대위는 A 씨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정의롭고 상식적인 판결"을 촉구했다. 이들은 "피해자가 만취해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었던 상황을 편견 없이 면밀히 검토하길 바란다"며 "만취 상태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고, 그 범죄가 이뤄지도록 조력한 모든 사람을 엄중히 조사하고 처벌하라"고 요구했다.
정은자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공동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준강간의 경우) 술 혹은 약물에 만취한 피해자는 피해 경험을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에 성폭력의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거나 성폭력 피해 자체를 부정당하고 오히려 역고소에 시달린다"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 사건의 1, 2심은 `술 취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처벌되지 않는다`는 잘못된 인식을 강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범죄는 지속해서 일어나는 데 솜방망이 처벌이라는 비판도 이어졌다.
이런 가운데 비슷한 범죄는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1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동부지법 형사합의11부(부장판사 손주철)는 길거리에서 술에 취한 여성을 발견하고 인근 건물로 데려가 유사 성폭행한 혐의(유사강간치상 등) 로 재판에 넘겨진 30대 남성 B 씨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또한,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40시간 이수, 아동·청소년 관련 기관과 장애인 복지시설 각 5년 취업제한도 함께 명령했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은 제반증거에 의해 모두 유죄로 판단한다"며 "피해자와 합의하는 등 유리한 양형요소가 있지만, 범행 내용과 그에 따른 양형 기준상 실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B 씨는 지난해 9월27일 술에 취해 노상에 누워있는 C 씨를 발견해 인근 건물로 데려가 폭행하고, 유사 성폭행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C 씨의 신체 일부를 스마트폰 동영상으로 촬영한 혐의도 있다. 이 과정에서 C 씨는 타박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B씨는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재판부의 양형 이유와 관계없이 강간치상에 대한 처벌이 징역 4년이라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도 있다.
30대 회사원 김 모씨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는데 겨우 징역 4년이라니 이해할 수 없다"면서 "법을 좀 바꿔서라도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8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술과 약물을 매개로 한 성폭력 상담이 전체의 17.6%를 차지한다. 2019년 검찰청의 처분결과에서 강간사건의 검찰 기소율은 44.8%에 불과하다. 여성들이 관련 처벌 규정을 개정해 엄벌하고 이를 통해 더는 이 같은 범죄가 없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내는 이유다.
공대위 기자회견에서 조은희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상담소의 상담통계(2018)를 보면 술과 약물을 매개로 한 성폭력 상담이 전체의 17.6%를 차지할 만큼 많이 일어나는데도 사법부는 가해자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다. 항거불능 상태의 피해자를 남자 여럿이 모텔로 데려간 것부터 가해자의 고의성이 보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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