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익학살, 좌익학살, 민간인학살.. 모든 학살을 겪은 섬

박만순 2021. 2. 13.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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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기 완도에서 일어난 서남부사건과 희생 사례

[오마이뉴스 박만순 기자]

 
 완도군 전경
ⓒ 완도군
 
"유엔(UN)군이 완도를 쑥대밭으로 맹글어 버린다는구만." "시방 뭔 소리여?" "유엔군이 완도로 들어와서 수복작전을 펼친다는구만. 그러면 완도는 전장(戰場)터로 변해버릴 것이여."

1950년 9월 말 전남 완도군 군외면 황진리에는 사람들이 피난 짐을 싸느라 난리가 났다. 그즈음 북한군은 "유엔군이 완도에 수복하면 피난 가지 않은 주민들을 몰살시킨다"고 말을 퍼트렸다. 당시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완도 앞바다를 통과했다. 이를 본 북한군이 상황을 잘못 판단해 유언비어를 만든 것이다.

완도군 덮친 유언비어

북한군 점령기인 소위 '인공(인민공화국)' 때 감투를 쓴 이들은 벌써 종적을 감추었다. 문제는, 부역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었다는 점이다. 그 당시 완도사람들은 '피난 가지 않으면 몰살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었는데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완도뿐만 아니라 인근 해남의 보도연맹원들은 한국전쟁 초기 대한민국 경찰에 의해 진도 갈매기섬과 완도군 청산면 앞바다에서 수장(水葬)되었다. 인공 시절에는 인민군에 의해 완도경찰서 유치장에 구금중이던 우익인사들이 완도읍 추섬에서 수장되었다. 

 
 전남 서남부지도
ⓒ 박만순
 
좌우에 의한 학살을 모두 겪고 나니 완도 사람들은 피난 보따리를 싸기 바빴다. 완도군 군외면 황진리 최병규(당시 46세), 최영이(17), 개똥이(6) 일가족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보림사 계곡으로 피난을 갔다. 하지만 최병규 일가족 5명은 이듬해인 1951년 봄 대한민국 경찰인 서남부경찰에게 사살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현장에서 총상을 입고 살아나온 최남기(최병규 아들)의 증언으로 알려졌다.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 차상규 형제도 마찬가지였다. 차상규(당시 28세)·차명규(20)·차세규(16) 형제는 신지면 피난민들과 함께 역시 가지산 보림사로 갔다. 그곳에는 북한군 사단 본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북한군이 지켜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차상규 형제도 다음해 1951년 초 토벌대에 의해 학살되었다. 형들과 같이 있다가 살아난 차보규(당시 18세, 전남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는 "토벌대의 총격 때 살아남은 이들은 화순군 화학산으로 피신했지만 결국 토벌대에 검거돼 광주포로수용소에 구금되었다"라고 증언했다.

전남 서남부 경찰부대의 무차별 학살과 검거를 지칭하는 이른바 서남부사건은 1950년 10월부터 1951년 초까지 장흥, 강진, 해남, 진도, 완도 일대에서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많은 주민들이 부역 여부에 관계없이 불법적으로 피살되었고, 일부 체포·자수한 주민마저도 지서 및 경찰서 인근에서 학살되거나 광주포로수용소를 거쳐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왜 완도 피해가 컸나

왜 전남 서남부(장흥, 강진, 해남, 진도, 완도)에서는 부역 혐의 학살 피해가 컸을까? 특히 완도는 피해 규모를 추정할 수 없을 정도다.

한국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23 광주시 입구의 산동교(山洞橋) 방어선이 무너지자 대한민국 군경은 7월 25일 여수를 거쳐 7월 26일 부산으로 후퇴했다. 이후 인민군은 광주를 점령했고 부산으로 후퇴하던 화순·영암·광산·나주·무안·강진 경찰부대는 7월 23일 보성을 거쳐 장흥에 집결했다. 이후 서남부경찰은 8월 1일 완도군으로 모여들었다.

서남부 경찰부대는 완도의 본도(本道)와 부속도서에 주둔하면서 인민군과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9월 14일 인민군의 총공세에 밀려 완도군 청산도와 여수시 거문도로 후퇴했다.

인민군 수중에 들어간 전남 서남부 지역에는 군·면 인민위원회 등이 설치되었고, 좌익에 의한 우익인사 학살사건도 벌어졌다. 특히 인민군과 지방좌익은 1950년 9월 말 완도에서 퇴각하면서 완도경찰서에 구금 중이던 우익인사 48명을 완도읍 제1부두 앞 추섬에 수장시켰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이후 완도가 수복되자 대한민국 군경은 인민군에 협력한 민간인을 광범위하게 학살했다. 

해방 이후 완도군

완도군에서는 1945년 8월 해방과 함께 8월 21일 '완도군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완도건국준비위원회는 중학교를 설립하고 공안대를 창설하는 등 완도군 행정을 장악했다. 그러나 그해 9월 22일 일제강점기 항일 독립운동세력 중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이 '완도군 인민위원회'를 결성해, 10월 말 공안대를 해체하고 경찰서를 접수했다.

1945년 11월 완도에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인민위원회를 '정책수행에 유해한 좌익집단'으로 규정하고 인민위원회 인사들을 체포하였다. 미군정이 인민위원회 간부들을 구속하자 주민들은 '구속인사 석방'과 '친일경찰 파면'등을 요구하며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는 요구를 하였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1946년 초부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진보진영(좌익)과 미군정·대한민국 정부와의 대결과 투쟁은 심화되었다. 진보진영(좌익)은 1947년 3·1 기념집회, 5·1 메이데이(노동절) 집회, 8·15 기념집회 등을 개최하였다. 진보진영(좌익)은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전쟁을 맞이했고, 일부 세력이 인민군에 합세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장흥형무소에 수감된 전력이 있는 최세용(1910년생. 전남 완도군 신지면 동고리)은 해방이 되자 '새로운 조국 건설'에 대한 희망에 들떴다. 하지만 미군정이 들어서고 인민위원회가 불법화되자 그 꿈은 사라졌다. 

한국전쟁 발발 후 그는 마을 주민들과 함께 장흥군으로 피난했다가 토벌대에 의해 1950년 10월 말 장흥군 대덕면 분토리에서 학살됐다. 최세용은 물론 같이 죽은 마을 주민들은 인공 시절 특별한 활동을 하지 않았다. 다만 '경찰 수복시 마을에 있으면 모두 죽는다'라는 말에 피난 갔다 죽임을 당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한국전쟁기에 경찰에 의해 학살된 전남 서남부지역 사람 절대 다수가 이념과는 상관없는 이들이었다. '완도가 전쟁터가 된다'라는 말에 살기 위해 장흥 가지산 등지로 피난 갔다가 학살당했다.

산떨이 작전과 보리 한 되 사건

1947년 5·1 메이데이 집회, 1948년 단독정부 반대 집회 후 경찰들이 주동자들을 체포·구금하자 수배된 약산면 사람들을 포함해 완도군 내 다른 면 수배자들도 약산면 해동리 곤고지산으로 입산했다. 이에 완도경찰은 1949년 여름 대규모 체포 작전(일명 '산떨이 작전')을 펼쳐 곤고지산에 은거 중이던 사람들과 이들을 돕던 약산면 해동리 주민 일부를 학살했다. 완도는 한국전쟁 전부터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이 자행되었다.

'보리 한 되 사건'은 더 기가 막히다. 좌익 혐의를 받고 경찰에 수배된 사람들이 산으로 은거하자, 이들을 돕기 위해 동네 주민들이 보리를 걷었다가 금당면 가학리 주민 수십 명이 경찰에게 적발됐다. 주로 보리를 걷었던 반장들은 재판 절차 없이 금당지서나 완도경찰서에 구금 중 희생되었고 보리를 낸 주민들은 재판에 회부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고 목포형무소 등지에 수감되었던 이들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 학살되었고, 전쟁 전 출감자들은 보도연맹에 가입되어 학살되었다.

완도군에서의 민간인 학살은 무척이나 광범위했고 피해자도 대량 발생했다. 채수암(1936년생, 고금면 덕동리)은 고금공립보통학교(고금초등학교의 전신) 2학년으로 1951년 3월 어느 날 하굣길에 고금면 화성리마을 앞에서 고금지서 주임의 처를 보고 '이쁘다'고 했다. 1951년 3월 20일 채수암은 체포되어 고금면 내동리 산에서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보복 학살도 자행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형성된 소안면 횡간도 주민들의 갈등은 해방 후에 좌우익 갈등으로 확대되었다. 1950년 9월 30일 지방좌익에 의해 횡간도 주민 32명 수장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소안면을 수복한 경찰은 1950년 11월 중순 소안면 횡간도에 진주하여 가해자들과 부역혐의자들을 소안지서에 연행했고, 이후에 완도경찰서로 재이송했다. 이들은 완도군 관내 부역혐의자들과 함께 완도군 일원에서 사살되거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완도에서는 한국전쟁 전부터 수복 후까지 대한민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민간인학살이 일어났다. 그중 법적 기준과 절차를 통한 처벌은 극소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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