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서운하게 엄마만 닮았네" 설날 미혼모엔 괴로운 말

박건 2021. 2. 1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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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 2021 신(新)가족의 탄생
<6회·끝> 다양한 가족들의 새해 소망
우리 사회에서 가족의 형태가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이진영 인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살아야만 법적 보호를 받는 게 구시대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법의 테두리 안에 못 들어간 저희도 세금은 다 내고 있잖아요."
4년째 동거 중인 백팩(활동명·30)과 킴(활동명·33)은 '내 가족이 사회안전망 안에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이들은 20만 구독자 유튜브 채널 '망원댁TV'를 운영하는 동성 커플이죠. 동성 간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한국에선 이방인 같은 존재입니다.

법적으론 남남이지만 둘에겐 서로가 상대방을 돌보며 살아가는 '가족'입니다. 이처럼 결혼과 출산이란 테두리를 벗어나 각자의 방식으로 가족을 꾸리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가족들이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1인 비혼 가구, 입양 가정, 미혼부…. 밀실팀이 만난 아홉 가족은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것'이 새해 소망이라고 입을 모았죠.

#다양한 가족들의 새해 소망을 영상으로 확인하세요.


"아빠 서운하게 엄마 닮아" 살가운 말이 비수로

미혼모 정수진씨와 딸 아정이. 본인 제공

편견과 간섭은 신(新)가족이 공기처럼 마주하는 장애물입니다. 주변에서 무심코 던지는 말이 '평범한' 가족과 이들을 분리하는 높은 장벽이 되곤 하죠. 명절마다 으레 '결혼 언제 하니' '아이 언제 낳니'라고 던지는 인사말과 같은 거죠.

11살 딸 아정이와 사는 미혼모 정수진(40)씨는 지하철 타고 나들이 갈 때 종종 난감한 상황에 처합니다. 같은 칸에 탄 어른들이 아정이를 보며 "아빠 서운하게 엄마 쏙 빼닮았네. 아빠 빼놓고 엄마랑 어디 가?"라고 말을 걸 때죠. 정씨는 "아이 아빠가 당연히 있을 거라 전제하고 살갑게 건네는 말이 더 힘들 때가 있다"고 전했습니다.

신선씨가 보육원에 있던 시절 찍은 사진. 본인 제공

불편한 상황이 반복되니 나름의 '대응 매뉴얼'을 갖추기도 합니다. 9살 때 부모님과 헤어져 보육원에서 자란 신선(28)씨는 "'부모님은 뭐하시냐'는 질문을 워낙 자주 받아서 '화장품 사업을 하신다'는 거짓말 레퍼토리를 만들었다. 고아라는 걸 밝혔을 때 불쌍하게 보는 반응이 싫어 거짓말하는 게 편하다"고 털어놨죠.

하지만 성인이 돼 홀로서기에 나선 신씨는 외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보육원 친구들, 사회복지사 선생님들'이 모두 가족이기 때문이죠.


동거 가구 설움 "내 집 마련, 수술도 어려워"

경기 화성시의 한 공공임대주택. 청와대사진기자단

새로운 가족들이 바라는 건 '특혜'가 아닙니다. 다른 사회 구성원과 동일한 권리를 누리는 것뿐이죠.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에겐 의식주 같은 기본적 권리도 제한될 때가 있죠.

혈연·혼인에 묶인 지원책 탓에 주거 안정의 꿈은 멀어집니다. 20대 초부터 4명의 파트너와 동거한 작가 정만춘(필명·34)씨는 "행복주택을 신청할 때 혼인 신고 안 하면 대개 10평이 안 되는 1인 청년 주택밖에 신청할 수 없다. 둘이 살기엔 좁은데 더 넓은 평수는 신혼부부들만 신청할 수 있어 아쉽다"고 밝혔습니다.

유튜브 '망원댁TV'를 운영하는 동성 커플인 '백팩'과 '킴'. 이진영 인턴

또 다른 문제는 돌봄 공백입니다. 동반자가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을 때도 동거 연인은 서로의 곁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직계 가족만 법적 보호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4년 전 심혈관 질환으로 수술받았던 킴은 "병원에서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은 백팩(애인)이었는데 '직계 가족만 보호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으니 차별처럼 느껴졌다"고 말했습니다. 백팩도 "만약 킴이 하루아침에 잘못된다면 연락도 못 받고 장례식장이 어딘지도 모를 거라 생각하니 무서웠다"고 털어놨죠.


흔들리는 전통 가족 "구체적 대안 필요"

연도별 1인 가구 수 추이 그래픽 이미지. [자료제공=통계청]

신(新)가족은 미래가 아닌 현재입니다. 결혼하고 아이 낳는 사람은 매년 줄고, 1인 가구는 늘어나죠. 전통적인 가족 개념은 뿌리부터 흔들립니다.

정부도 변화를 감지하고 법과 제도를 손질하려 합니다. 지난달 26일 여성가족부는 정부 정책에서 비혼·동거 등 가족 범위를 확대하는 법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정부가 전통적 가족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점은 의미가 있다"면서도 "이제 계획을 어떻게 구체화할지 그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는 "원하는 형태로 가족을 구성하는 것도 개인의 권리다. 개인이 존엄하게 살 수 있는 방향을 국가가 고민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습니다.

손을 잡고 있는 엄마와 딸. 중앙포토

코로나19 탓에 고향도 못 가는 설 연휴, 서로가 그리운 건 신(新)가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혈연·혼인 대신 사랑만으로 연결된 가족은 '다른' 걸까요, '틀린' 걸까요. 이번 명절, 가족의 의미를 고민해보는 건 어떨까요.


박건·백희연·최연수·윤상언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이진영·조예진 인턴, 백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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