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싶니? 그럼 뛰어.. '샤넬 오픈런' 오늘도 계속 된다
지난 4일 오전 9시30분. 서울의 한 백화점 앞에는 오픈 시간 한참 전부터 수십명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30분쯤 지나자 단정한 옷차림의 한 여성이 태블릿 PC를 들고나와서 대기 번호를 등록하기 시작했다. 영하의 날씨에 칼바람이 부는 백화점 앞에 모인 인파가 기다린 것은 명품 브랜드 ‘샤넬’ 매장에 입장할 수 있는 번호였다.
‘샤넬 오픈런’은 해가 바뀌고도 식지 않았다. 지난해 상반기 가격 인상을 앞두고 뜨거웠던 오픈런은 샤넬이 누렸던 반짝 특수가 아니었다. ‘오픈런’ 현상은 개점 전부터 매장 앞에서 기다렸다가 제품을 구입하는 것으로, 대개는 인기 있는 한정판 제품이 나오거나 명품 브랜드의 가격이 오르기 전에 나타난다. 하지만 샤넬 오픈런은 최근 몇 개월 동안 가격 인상과 무관하게 이뤄지고 있다.
‘5시간 대기’에도 번호표 받아가는 사람들
가격 인상이나 한정판 제품 출시 등의 특별한 이슈가 없었던 4일 오후 1시40분쯤, 서울의 한 샤넬 매장에 방문했다. 평일 오후 한가로운 백화점 풍경과 달리 샤넬 매장 안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입구에는 태블릿 PC가 비치돼 있었고, 점원의 안내를 받으며 태블릿에 휴대폰 번호를 등록했다. 점원은 “입장 가능한 때를 카카오톡으로 알려준다”며 동행인이 있는지 물었다. “없다”고 답하자 점원은 “추가로 동반 입장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절차를 거쳐서 받은 대기번호는 ‘144번’이었다.
대기번호 ‘144번’은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할까. 점원은 2시간30분을 예상했다. 점원의 설명은 이랬다. “저희 매장 직원들이 최대한 투입돼 입장하신 고객들을 돕고 있는데, 들어오신 분들이 얼마나 오래 매장을 둘러보는지에 따라 대기 시간이 달라집니다. 보통 이 정도면 최소 2시간30분 정도는 예상하셔야 해요.” 점원의 예측은 비슷하게 맞아떨어졌다. 실제 알림이 온 시간은 그날 오후 5시50분쯤이었다.
샤넬 직원 등에 따르면 평일에 오픈런을 하지 않으면 적게는 150명 안팎, 많게는 250명 안팎을 기다려야 한다. 대기 인원은 매장마다 차이가 있지만 주말에는 대체로 평일보다 1.5~2.5배 정도 많아진다. 주말에 대기 인원이 급증하는 것은 오픈런이 어려운 직장인들이 합류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샤넬 매장이 있는 곳은 서울(8개), 대구(1개), 부산(1개) 3개 지역에 총 10곳이다.
주말에는 오픈런에 합류하지 못하면 5시간 안팎을 기다리는 일이 허다하다. 지난달 3주 연속 주말마다 샤넬 매장을 방문했던 안지원(36·가명)씨는 대기번호 ‘301번’을 받기도 했다. 안씨는 “가방 수선 때문에 매장에 갔는데, 대기번호는 301번이고 적어도 5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 안내를 받았다. 그 날은 예상 대기 시간인 5시간을 훌쩍 넘겼을 뿐 아니라 백화점이 문을 닫을 때까지도 ‘입장 가능’ 알림을 결국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주말에만 시간을 낼 수 있었던 안씨는 일주일 뒤 낮 12시쯤 샤넬 매장을 찾았고, 대기번호 200번대를 받았다. 입장 알림을 받으면 10분 안에 매장을 방문해야 한다. 이 시간을 놓치면 대기번호를 갖고 있어도 입장할 수 없다. 그날은 입장 가능 시간을 놓쳐서 끝내 수선을 맡기지 못했다고 한다. 안씨는 세 번째 주말 오전 11시30분쯤 방문해서 대기번호 187번을 받았고, 그날 오후 6시가 넘어서야 매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직장인 최모(35)씨는 아내 선물을 사기 위해 오픈런을 마다하지 않았다. 주말 두 차례 입장에 실패한 뒤 평일 오픈런을 결심했다. 최씨는 지난달 말 평일 하루 휴가를 내서 오픈런을 시도했고, 대기번호 42번을 받은 뒤 점심시간 무렵 입장에 성공했다. 하지만 살 만한 가방이 없었다. 그는 실망하지 않고 바로 대기 번호를 다시 받아 나왔다. 3시간 가까이 더 기다린 끝에 그날 오후 두 번째 입장을 했고, 운 좋게 원하던 가방을 살 수 있었다.
최씨는 “어디서 보니까 샤넬은 고르는 게 아니라 샤넬의 선택을 받는 것이라는 말이 있더라. 어떤 날은 오전에 새 물건이 들어오지만, 오후에 들어오는 날도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인 것 같다”며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안 됐는데, 한 번 오픈런을 해 보니 오기 같은 게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여자들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퀘스트를 수행하고 레벨을 올리는 기분”이라며 “샤넬의 마케팅이 승부욕을 자극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꺾이지 않는 ‘샤넬 오픈런’, 이유는
샤넬 오픈런의 열기가 식지 않는 것은 왜일까. ‘가격 인상’을 먼저 떠올릴 수 있겠다. 지난해 샤넬 제품 일부의 가격 인상을 앞두고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라는 게 무색할 정도로 오픈런이 화제가 됐을 때는 가격이 주된 요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오픈런은 가격 인상과는 무관하다는 게 정설이다.
샤넬 한 관계자는 “가격 인상 요인과는 무관한 것 같다”며 “가격 인상이 예고되지 않았을 때도, 가격 인상이 지난 뒤에도 비슷하게 고객들이 찾고 있다”고 말했다. 값이 오르기 전 조금이라도 낮은 가격에 장만하려는 이들 때문에 빚어지는 반짝 이벤트는 아니라는 것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3가지 이유를 꼽고 있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을 못 가는 대신 명품을 구매하려는 심리, 샤넬 구매가 재테크라는 믿음, 중국인 대상 구매대행 증가와 한국인 리셀러들의 러시. 어떤 요인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이후 샤넬이 해외여행의 대체품으로 떠올랐고 여기에는 ‘샤테크’(샤넬+재테크)에 대한 믿음이 뒷받침됐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면서 아낀 기회비용을 명품 소비로 전환하는 이들이 늘었다는 것이다. 샤넬은 연 2~3회 이상 가격을 올리기 때문에 ‘오늘 사는 게 가장 싸게 사는 것’이라는 심리도 샤넬 구매를 부추긴다.
패션업계 한 종사자는 “현금 유동성이 높아진 코로나19 상황에서 샤넬을 포함한 명품 구매가 예전보다 훨씬 보편화됐다”며 “요즘 유행하는 ‘샤린이’(샤넬과 어린이를 조합한 말로 샤넬 입문자를 뜻하는 말)라는 표현에서도 확인되듯이 샤넬을 구매하는 심리적 진입장벽이 많이 낮아졌다”고 설명했다.
오픈런 현장에 있었던 이들도 비슷한 견해를 보였다. 대부분 “구매대행이나 리셀러로 보이지 않는 손님들이 더 많은 것 같았다”고 했다. 3주 연속 주말마다 샤넬 매장을 방문했던 안씨는 “구매대행이나 리셀러는 티가 난다”며 “정말 쇼핑을 하러 온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주말과 평일에 샤넬 매장을 방문했던 최씨는 “신세계 강남점 같은 경우에는 지방에서 샤넬을 사러 온 사람들이 확실히 많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중국인 고객을 상대로 한 구매대행업자가 늘었고, 중고 거래가 활성화되면서 리셀러들이 증가한 측면도 오픈런의 주된 이유 중 하나로 꼽힌다. 구매대행업자나 리셀러의 증가를 수치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없지만 업계 안팎의 심증은 굳건하다.
백화점 업계 한 관계자는 “고객 중 누가 구매대행이고 누가 아닌지를 구분할 방법은 전혀 없다”면서도 “아무래도 면세점 쇼핑에 제한이 생기면서 구매대행이 증가했다고들 하더라. 우리나라 샤넬 가격이 최근까지 미국이나 중국보다 낮은 편이었기 때문에 수요가 늘었다는 소문은 있다”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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