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만 열리는 환상적인 테마파크, 통영에 이런 곳이
[홍기표 기자]
'황홀했다.'
통영 '디피랑'(DIPIRANG)에 대한 감상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과장이 아니다. 통영시는 디지털미디어아트를 활용해 남망산공원 산책로를 빛의 정원, 즉 디피랑으로 재탄생시켰다. 디피랑은 '디지털과 피랑'이 합쳐진 말이다. 피랑은 언덕을 뜻하는 통영 속어다. 익숙한 동피랑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반원을 그리면 남망산이 나오고 그곳에 디지털 테마파크 '디피랑'이 자리 잡고 있다.
남망산공원은 낮에는 가볍게 산책하기 좋은 조각공원으로 있다가, 밤이 되면 오색빛깔 찬란함을 뿌린다. 어둠을 이용해 디지털 시각 효과로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것을 '포가튼 도어즈'라고 부른다. 지난 7일, 직접 디피랑을 방문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선 나는 어린아이처럼 "우와" 하며 그저 입을 벌리고 우두커니 서 있다가, 뒤늦게 사진과 영상을 남겼다.
언덕을 돌아 펼쳐지는 빛의 향연
입구에 'DIPIRANG'이라는 글씨가 작은 회오리처럼 돌돌 말려 새겨져 있다. 입구를 지나 동굴처럼 보이는 곳에 사람들이 서서 무언가를 기다렸다. 곧 증강현실로 사람 키보다 큰 곰처럼 생긴 캐릭터가 나타났다. 빛을 툭툭 던지는 모습이 신기해 눈길을 빼앗겼다가 그가 건네는 말을 들어보았다. 그는 "동피랑과 서피랑에서 사라진 벽화는 어디에 갔을까"라고 묻고 있었다.
동피랑과 서피랑 벽화는 2년에 한 번씩 새로이 그려진다고 한다. 이 디지털 테마 파크를 제작한 '닷밀'은 영리하게 이 사라진 벽화가 남망산에 들어와 밤에 살아 움직인다는 스토리를 담아냈다. 버려진 인형들이 모여서 산다는 전설 속의 섬 이야기처럼, 한적한 남해 바닷가 동네를 아름답게 꾸민 정성이 흘러 흘러 이곳에 와 생기를 찾는다고 생각하니 재밌었다.
이렇게 통영의 낮과 밤은 동서피랑과 디피랑이 이어주고 있었다.
나무와 바닥에 새겨진 형광빛의 그림이 아주 멋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나무 숲에 보랏빛이 점점이 박힌 곳에서는 마치 우주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낮의 숲이 그늘과 신선한 공기로 평온함을 가져다줬다면 디피랑, 그 밤의 숲은 영혼을 춤추게 만들었다.
원을 그리며 언덕을 오르는 길은 그저 시각적인 요소로만 꾸며진 게 아니었다. 나무와 벽에 마련된 작은 구멍에 라이트볼을 넣으면 재밌는 소리가 나오거나 꽃이 피었다. 오래된 동백나무에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가 라이트볼을 넣으면 우수수 일어나는 파스텔 빛깔의 선과 꽃들은 모든 이의 얼굴에 닿아 미소로 번졌다. 아이들은 신나서 폴짝폴짝 뛰며 혹여나 잡힐까 손을 뻗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곳은 <그림바다>였다. 직사각형의 넓은 공간 벽면에 수많은 빛들이 부딪혀 다양한 그림과 영상을 연출했다. 뿌려지는 꽃잎과 아름다운 무늬는 파도가 밀려오듯 압도적이었다.
나는 공간 구석구석을 돌아다녔다. 쭈그려 앉아도 보고 코너에 등을 대고 서보기도 했다. 살아 움직이는 미술관에 들어온 기분이었다. 색감 또한 촌스럽지 않고 너무나 아름다웠기에 약 20여 분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두 번이나 보고 나서야 반대편 문으로 나올 수 있었다.
▲ 디피랑 코스를 보여주는 지도. |
ⓒ 디피랑 홈페이지 화면 캡처 |
통영은 예술 도시다. 현대 음악가 윤이상의 이름을 딴 음악축제는 국내외적으로 유명하다. 또한 대한민국 대표 화가인 이중섭은 한국전쟁 당시 통영에 약 2년간 머물며 훌륭한 작품을 남겼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인 김춘수 또한 통영 출신이다. 디피랑과 맞닿은 통영시민문화회관 옆 언덕에는 국내 최초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가진 김용주의 화비가 세워져 있다.
통영은 최근 조선업 불황으로 지역 경제가 어려워졌다. 코로나 19로 관광 수입도 줄었다. 통영시는 이러한 어려움을 타계하고자 관광도시로의 변모를 선언하고 옛 조선소 부지 등을 테마파크로 조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 출발점에 이 디피랑 테마파크가 있다.
근처 섬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이와 같은 활동에 아주 고무되었으나 조금 걱정을 했었다. 관광도시 건설이 그저 보여주기식 행정이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통영의 고유함과 독특함이 사라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디피랑에 다녀온 후 이곳이 루지나 케이블카와 같은 뚜렷한 정체성이 없는 관광지가 아니라, 통영의 바다와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 아주 반가웠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빛 좋은 개살구가 아니라 속이 꽉 찬 다이아를 보고 온 듯한 밤이었다. 이처럼 각자의 고유한 이야기가 새로운 빛으로 다시 새겨지는 도시와 나라가 되면 얼마나 근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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