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름 냄새가 그리운.. 언택트 명절 16년차 며느리입니다

은주연 2021. 2. 12.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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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코로나 명절] 외국에 사는 가족들 때문에 익숙해진 온라인 명절

'가족이라도 주민등록상 거주지가 다르면 5인 이상 집합 금지', 2021년 설의 특징입니다. 감염의 위험을 줄이려면 덜 모이고 적게 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따라 명절 문화에도 변화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온라인으로 성묘를 하고, 영상통화로 안부를 묻고, 온라인으로 새뱃돈을 준다는데요. 전통적인 명절의 변화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시민기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봅니다. <편집자말>

[은주연 기자]

아파트에 살면서 가끔 여기가 주거 공동체임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아무 생각 없이 현관문을 열었을 때 벼락처럼 코 끝을 스치는 진한 기름 냄새. 무향 무취한 집과 달리 복도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기름 냄새를 맡게 되면 비로소 '아, 명절이구나' 한다.

명절을 기름 냄새로 알아차린다니, 대한민국 며느리가 이 무슨 팔자 좋은 소리일까 싶지만, 단지 본의 아니게 온라인 명절을 20년째 보내고 있는 내 이야기이다.

명절에도 모일 수 없게 된 가족들

하나뿐인 언니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갔다. 올해로 이십년째 미국 생활중. 처음엔 매일같이 보고 싶고, 명절이면 더 보고 싶고 하더니 이젠 각자의 자리에서 쿨하게 명절 세리머니를 전한다. 미국에서는 추수감사절과 할로윈데이, 크리스마스에 더 시끌벅적하니 한국 명절에 맞춰 보내는 안부가 밍밍할 때도 많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미국 생활 초반기에는 디지털 세상으로 완벽하게 변화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언니와 우리는 이메일로 사진을 주고 받았다. 국제우편으로 조카의 모습이 담긴 비디오를 받은 적도 있다.

언니에게 간간히 오는 소식이 애틋했다. 백일 아기가 말도 없이 몸을 뒤집는 모습을 편집없이 한 시간 다큐로 보는 일은 상당한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나마 그 비디오가 도착하는 날엔 그리움에 눈물까지 났더랬다.

그야말로 글로벌한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은 수시로 동영상과 사진과 메시지를 전하며 가까운 듯 먼 듯 그렇게 지낸다. 명절이라고 특별할 것이 없어졌다. 멀리서 비는 안부가 더 살뜰할 수도 있는 건, 오랜 시간 온라인 명절을 보내며 터득한 지혜다.

이상하게 멀리 떨어져 보내는 말은 흔한 안부여도 모두 진심으로 가 닿는다. 그래도 명절의 주 무대는 친정보다는 시댁이 아니던가. 친정에서의 언택트가 무슨 상관?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보시길. 시댁에서도 민족 고유의 명절 설에 기름냄새를 맡은 적이 없는 16년차 며느리이기 때문이다.

늘 고요했던 친정 명절, 결혼하면 달라질까 싶었는데
 
 매년 설에는 페이스톡으로 안부를 전하는 것이 내가 했던, 온라인 명절나기였다.
ⓒ elements.envato
 
명색이 맏며느리인 나는 결혼하기 전, 한 가지 로망이 있었다. 친정에서의 명절이 늘 고요했던 탓에, 결혼을 하면 왁자지껄한 집안에서 얼굴도 이름도 다 못 외우는 친척들이 가득한, 북적북적한 명절을 보내고 싶었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드라마에서 한복자락을 휘날리며 쟁반에 음식을 담아나르는 '우리 새애기'가 되어보는 로망. 그러나 그런 운명은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식구가 단촐한 시집에서의 첫 명절도 친정에서 맞이하던 명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니, 내 환상은 와장창 깨졌다. 그러니까 명절 아침, 북적북적 친척들은 포기하더라도 한복 자락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나는 아침부터 부랴부랴 예쁘게 한복 단장을 하고 주방으로 나갔다. 그때 나를 발견한 시어머니의 말 한 마디가 그만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얘는, 불편하게 무슨 한복이야, 가서 다시 갈아입고 와."

어머니는 한복이 싫다고 하셨...다. 결혼하고 한복입고 상차리는 번거로운 일을 내 며느리에겐 절대로 시키지 않겠노라 다짐하셨단다. 그 비장한 결심을 실천하신 어머니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넘쳤고, 그야말로 온 집안의 '새애기'가 되어 보고 싶었던 나는, 휘휘 한복을 벗으며 묘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단출함의 끝판을 볼 것 같은.

그래도 시동생이 결혼을 하면 좀 북적거릴까 내심 기대했는데... 운명은 내 편. 남편의 동생은 고등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간 뒤로 한국땅을 밟지 않았다. 게다가 시동생의 결혼 후, 추석은 큰 아들과 한국에서, 설은 둘째 아들과 미국에서 보내시겠다는 시부모님의 뜻에 따라 그야말로 더욱 단출한 설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매년 설에는 페이스톡으로 안부를 전하는 것이 내가 했던, 온라인 명절나기였다.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그래~ 너희들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명절 음식은 해 드셨어요?"
"응~ 우리는 여기서 만두 만들어서 먹었지. 너희도 맛있는 거 해 먹어~."

여기까지가 결혼 십수년째인 내가 아직도 '며느라기 모드'가 되어 하는 인사다. 폰을 아이들에게 넘기면 가족간의 오붓한 한담이 시작된다. 폰에 주로 등장하는 얼굴은 아이들 얼굴. 나보다 쿨한 아랫동서인 그녀는 아예 목소리만 출연한다.

혼자 계신 친정 엄마는 어쩐다
 
 2일 오전 서울도서관(옛 서울시청) 외벽에 코로나19 방역을 위해 다가오는 설연휴 직접 방문을 자제하고, 세배는 온라인으로 하자는 '설 연휴, 찾아 뵙지 않는게 '효'입니다' 거리두기 캠페인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 권우성
 
올해는 코로나로 시부모님이 한국에 계시지만 달라질 건 없다. 찾아 뵙지 않아도 될지 조심스레 여쭤보았는데 역시나 쿨하게 말씀하신다.

"다음달에 아버님 생신이니 그때 식사하며 얼굴 보지 뭘!"

역시나 흘러 넘치는 내 감성이 똑 떨어지는 시어머니 감성을 못 쫓아가는 것 같다. 문제는 우리 엄마다. 유난히 외로움을 많이 타는 엄마에게 올해 5인 이상 집합 금지를 상의하기가 참 미안했다. 그래도 "가도 될까?" 슬쩍 물었더니 돌아온 엄마의 대답에 힘이 없다.

"그래, 이번엔 다들 안 온다더라. 너도 안 와도 돼. 그런데 안 올 거면 미리 말해줘, 너 먹으라고 해놓은 음식 가져다 줄게. 명절에 먹어."

아이고 참... 힘든데 음식 준비할까 봐 미리 건넨 말인데, 엄마는 언택트 해야 한다는 이 명절이 영 아쉬운가 보다. 온라인 명절에 완벽히 적응한 나와 달리, 멀리 떨어진 언니와 이십년째 보내는 온라인 명절이 아직도 쓸쓸해서 이맘때면 언니가 더욱 보고싶다는 엄마이니 그럴 법도 했다. 엄마가 덜 쓸쓸할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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