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급훈이 '송충이는 없다'인 이유

한세웅 2021. 2. 11. 17:3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상처줬던 중3 담임 선생님의 한 마디.. 아이들은 작은 믿음에도 크게 자란다

[한세웅 기자]

처음에는 돌아간 고개와 귀에서 울리는 '윙윙' 거리는 진동에 의문이 들었다. '뭐지?' 하지만 이내 들린 담임 선생님의 짜증 섞인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나의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체격이 건장한 중년의 남자 선생님이었다. 젊은 시절 군 장교를 하시다 교련 과목으로 넘어오신 분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교련 과목이 없어지며 도덕 과목을 가르치시게 되었는데 항상 엄하고 단호하셔서 모두 두려워하던 선생님이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 선생님이 유독 나를 더욱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뒤돌아 생각해보니 그럴 이유는 차고 넘쳤다.

게임에 빠져있던 나를 변화시킨 그날

MMORPG 게임이 성행하던 시절, 나는 온라인 속 세상에 살았다. '다크에덴'이라는 게임에서 인간들에게 대적하는 뱀파이어로, 수십 명의 길드를 이끄는 군주였다. 한 집단의 대표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는 만족감과 온라인 속 내 캐릭터의 강함에 나는 너무도 행복했었다. 적어도 학교에서 왜 배우는지도 모르겠는 것들을 외우는 삶보다는 가치 있는 삶이라 생각했다. 온라인 속 나의 분신이 더 많은 힘과 세력을 형성할수록, 난 현실의 내가 처해있는 모든 것들에 무감각 해져갔다. 어머님의 절절한 만류나, 아버지의 엄한 호통에도 좀처럼 내 고집은 꺾일 줄 몰랐다.

이는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서도 계속되었다. 출석 문제를 제외하고서라도 커닝 문제나 학교 시설물 파손 등등 다양한 사고를 일으켰고, 성적은 말할 것도 없이 바닥을 기었다. 그러니 그 엄한 선생님이 날 탐탁지 않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담임 선생님은 고등학교 진학과 관련해 인문계와 실업계 중 진로를 정해야 한다고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성적이 많이 낮았지만 이상하게도 커서 아주 멋진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을 가야 하고, 대학을 가려면 인문계를 가는 것이 더 적합하다는 것쯤은 상식으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담임 선생님과의 면담이 진행되었다.

문을 열고 들어간 교무실 안은 언제나처럼 북적거렸다. 판치기 하다 걸린 친구들이 손을 들고 앉아있었고, 평소 짝사랑하던 옆반 반장은 좋아하는 선생님과 농담을 하며 재잘거리고 있었다. 그곳에 나의 담임 선생님이 계셨고, 난 머쓱해하며 다가갔다. "XX 공고 가라." 내 얼굴을 쳐다도 보지 않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내심 처음으로 선생님과 부모님 모두 좋아할 만한 결정을 내렸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나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저 인문계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내 대답에도 선생님은 몇 초간 침묵하셨다. "하.." 짜증 섞인 목소리를 하며 처음으로 날 마주 보신 선생님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차 있었다. 속으로 느끼는 당혹감과 두려움을 선생님이 눈치챌까 애써 눈빛을 피해 고개를 푹 숙였다.

잠시 후 갑자기 내 고개가 빠른 속도로 오른쪽으로 꺾였다. "짝!" 살과 살이 만나는 찰진 소리와 귀에 울리는 진동이 동시에 느껴졌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고개를 돌려 담임 선생님을 쳐다보자, 오른쪽 어깨와 팔을 들고 있던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상황을 이해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무실 안 모든 선생님과 학생이 나와 나의 담임을 지켜봤다. 그 이후의 일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담임 선생님께서 몇 가지를 더 물어보셨고, 난 대답하지 않았다. 이어서 몇 차례의 뺨을 더 맞고 부모님을 데려오라는 말과 함께 선생님은 자리를 떠나셨다. 뺨이 얼얼했지만 남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오히려 목을 꼿꼿이 세워 교무실을 나왔다. 그날 나는 수업을 듣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학창 시절을 보내던 때에는 교사의 체벌이 은연중에 허용되던 때이기도 했지만, 담임 선생님의 체벌은 다른 선생님의 것과는 다른 묵직함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은 그런 묵직함의 문제가 아니었다. 가슴속 무언가가 매우 뜨겁게 올라오는 것을 집에 가는 내내 느꼈다. 처음에는 분노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복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왜인지 모르지만 그때 내가 생각하는 복수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하기'였다.

밤새 부모님을 설득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선언했고 다음날 어머니 손을 잡고 학교로 향했다. 부모님과 선생님 간의 이야기가 끝나고 난 결국 인문계고 진학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가슴속 고통은 하나도 해소되질 않았다. '어쩌면 내가 정말 송충이일 수도 있겠구나. 현실 속 나에게는 감히 도전도 하지 못할 갈잎이 가득 차 있고, 난 무의미한 솔잎들 세상에서 살아가는 하찮은 존재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에게 '송충이'라는 깊은 낙인이 새겨지고 있었다.

내가 선생님이 된 이유

그때부터 내 삶은 증명으로 가득 찼다. 내가 '송충이'가 아니라는 증명과 내가 '갈잎'들을 먹을 수 있다는 증명으로 내 삶을 가득 차게 했다. 학교 성적을 꾸준히 올렸고, 각종 대회에 나가 상을 탔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설 기회가 있으면 손을 들고 자처했고, 그 사람들 앞에서 인정받기 위해 발악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그 낙인은 계속 느껴졌다. 난 나에게 더 큰 목표를 설정해 주었고 이 불가능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내가 '송충이'가 아니라는 분명한 증거라고 스스로에게 외쳐댔다. 마치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백해무익한 노인을 죽여 자신이 나폴레옹과 같은 '인간'인가, '이'인가를 증명하려는 것과 비슷했다.

그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증명에 목숨을 거는 나의 모습에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생겼다. 더불어 증명 과정에 호의를 품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럴수록 난 그런 사람들에게 한 걸음 물러섰다. 내가 '송충이'라는 사실을 들키게 된다면 그 사람들이 실망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기 혐오감과 자아존중감이 이율배반적이게도 높아져 있을 때 난 교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는 내 증명 과정의 하나이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큰 이유가 있었다. 학교에 있을 제2의, 제3의 한세웅이 나와 같은 고통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그 누구보다도 내가 그 아이들의 마음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방향이 결정되었다.

임용에 총 3수를 할 동안의 시간은 정신이 무너질 정도의 고통의 나날들이었다. 정기적으로 설정하던 목표와 성취의 행동이 멈췄다. 장기적인 단 하나의 목표, 임용에 합격해야 되기 때문이었다. 잠시나마 내 고통을 달래주던 목표와 성취를 멈추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더군다나 목표의 성취 실패는 나라는 인간의 능력 부족으로 귀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 나는 부족한 사람이 아니어야 했다. 그래서 정말 최선을 다했다.

초수에 실패하고서는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내 모습이 타인에게 들킬 것만 같았다. 재수에 실패하고서는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탈모까지 오고 말았다. 그때 내 나이 26살이었다. 황금 같은 대학생 시기 여러 활동을 하던 모습에 반해 고백해왔던 여자친구마저 세 번째 시험 한 달을 남기고 떠났다. 공부를 끝내고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힐 때면 중학교 3학년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고는 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그렇게 3번째 임용시험이 다가왔다. 합격. 눈물겨운 일이었다.
 
▲ 임용합격 3수 만에 합격한 교사임용시험
ⓒ 한세웅
 
난 어떤 교사가 되어야 할까? 인간적으로도, 스승으로도 부족한 나라는 인간에게,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급훈을 '송충이는 없다'라고 정했다. '모든 아이들이 타인의 평가에 절망하게 하지 말자.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아이가 되게 하자.' 그렇게 다짐했다. 우여곡절이 많은 교직 생활이었다. 표현에 어려움을 겪던 신규 시절에는 아이들과 마찰도 있었고, 2년 차에 접어들며 학급경영에 익숙해지자 이번에는 교사들과 마찰이 생겼다. 무엇이든 적당히 중간만 하는 것을 싫어하는 내게 이런 갈등은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첫 수업의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항상 나의 옛이야기를 해줬다. 내가 느꼈던 고통, 그 낙인을 지우기 위해 했던 노력. 말뿐만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려고도 많은 노력을 했다. 나 스스로도 새로운 도전들에 겁먹지 않았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프로젝트를 많이 기획했다. 물론 그 목표들에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난 그럴 때마다 학급 목표가 실패한 이유를 정확히 분석하는 시간을 함께 가졌다. 실패가 능력으로 귀결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확한 분석이 이루어지면 목표를 재설정하고 아이들과 될 때까지 다시 도전했다. 돌아보니 실패 후 재도전하는 모습들에서 아이들은 더 크게 성장한 것 같다. 그렇게 4년, 난 내가 학창 시절에 가장 필요했었을 교사가 되고 있었다.

아이들을 믿어주고, 또 그 아이들이 스스로 믿으며 성장하는 것을 보며 내 고통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의 그 어떤 증명으로도 식힐 수 없었던 고통이 식고 있었다. 버릇처럼 말하는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샘이 장담해"라는 말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만은 아니었다. 말을 하는 나 자신에게조차 큰 위로가 되었다. 나의 이 대단치도 않는 작은 믿음에도 아이들은 무럭무럭 성장해 갔다. 송충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나의 가설은 진실이 되었다. 자신에 대한 믿음으로 한계를 깨나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 어떤 세상의 증명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돌아가신 나의 중학교 담임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뭐라고 이야기하실까? 당신의 자리에 서서 송충이에 대해 이야기하는 제자를 조금은 자랑스러워하실까? 내년 새 학기가 되면 난 또 누군가의 담임이 되어 교실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첫 만남의 어색함과 아이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받으며 난 급훈이 들어간 액자를 꺼낼 것이다. 부족한 담임이 너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가르침을 여기 안에 담았다며 말할 것이다. "송충이는 없다"라고.
 
▲ 송충이는 없다. 나의 교육철학
ⓒ 한세웅
▲ 도전결과 송충이는 없다 라는 급훈을 실천한 결과 학급 상장 모음
ⓒ 한세웅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