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건너는 방화대교인데.. 이런 사정 여태 몰랐다니

이영천 2021. 2. 1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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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잇는 다리] 젊은 나이에 지체 높은 자리에 오른 다리

[이영천 기자]

'방화(榜花)'는 '과거에 급제한 사람 중 나이가 가장 젊고 지체가 높은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창릉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곳에, 지체 높은 자리에 오른 젊은 방화대교(傍花大橋)가 있다. 한강을 횡단하는 다리 중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다리다. 매무새가 방화라는 말에 썩 어울린다. 서부 수도권에서 우리나라 관문인 인천공항을 오가는 고속도로 시작점이다.
  
▲ 방화대교 아치-트러스교 곡선 형상이 다른 2중 아치를 K형 트러스로 결구한 멋들어진 다리다. 비행기가 이착륙하는 모습을 형상화시켜 만들었다. 좌우로 상로 트러스교가 보인다.
ⓒ 이영천
 
방화대교 중앙 경간(540m)이 멋진 아치 트러스(Arch Truss)다. 붉은 색칠을 한 날렵한 모습으로, 비행기 이착륙을 형상화하였다. 아치 트러스 좌우는 상로(上路) 트러스 형교다. 아치 트러스는 K-트러스 형으로, 아치 곡면강재 주 부재(rib)를 수평으로 연결하는 기능을 하도록 짜였다. 아치 트러스는 하로(下路)교로 이 구조물이 방화대교를 유려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인천공항 고속도로는 1995년 12월에 착공하여 2000년 11월에 준공하였다. '민간투자 1호 사업'이다. 민간이 자본을 투자해 건설하고, 도로를 이용하는 차량으로부터 통행료를 받아 일정기간 운영하는 방식이다. 올림픽대로와 자유로를 연결하며, 역시 민간투자사업인 서울∼문산 고속도로와도 연결되어 있다. 통일을 대비하여 향후 북한으로 이어지는 길 한 축을 담당할 전망이다.
  
▲ 행주산에서 바라 본 방화대교 방화대교 옆 행주산에서 바라 본 방화대교 모습이다. 수도권 서부지역을 대표하는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
ⓒ 이영천
 
방화대교 나머지 구간은 강재 상자형 형교(Steel box girder)다. 하상기초는 우물통 기초로 시공했고, 현장타설 말뚝과 강관말뚝 기초를 혼용하였다. 교각이 서 있는 하상은 20미터 퇴적층에, 36∼40미터 지하에 기반암이 있었다고 한다. 기초 작업이 무척 난공사였을 것으로 보인다. 인근 창릉천엔 옛 널돌다리인 '강매석교'가 놓여 있다.

행주산에 서린 얼

다리 바로 인근 북측에 덕양산(德陽山, 행주산)이 있다. 고양시(高陽市)는 고봉산(高峰山)의 高(고)와 덕양산(德陽山)의 陽(양)을 이어 붙여 부르는 이름이다.

겸재가 그린 행호관어도(杏湖觀漁圖)를 보면, 행주나루와 행주산은 무척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강에는 너른 모래사장이 있고, 강에는 배들이 유유자적하다. 행주나루는 멋진 별서가 군데군데 들어서 있고, 숲이 우거졌다. 나루터 역할을 하던 우뚝 솟은 바위가 왼쪽 하단에 보인다. 옆으로는 모래펄이 형성되어 있다. 그림 속엔 멀리 고봉산과 심학산, 개성 송악산까지 어렴풋하게 보인다.
 
▲ 행주대첩도 권율 장군이 1만여 군사로 수만 일본군을 무찌른 행주대첩 장면이다. 군사들은 물론 인근 주민들까지 합세하여 치른 대 승리였다. 행주대첩 승리로 한양을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이 수일 만에 남쪽으로 후퇴한다.
ⓒ 문화재청
   
행주산엔 산성이 있어,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행주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진주대첩,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중 하나다. 조명연합군은 평양에서 후퇴하는 일본군을 급격히 추격한다. 권율은 행주산성에 둔취하며 연합군과 더불어 한양 탈환을 궁리한다. 그러나 조명연합군이 고양 '벽제관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만다. 이에 권율은 행주산성에 고립되어 버린다.

산성 동남 측은 가파른 절벽으로 한강에 닿아 있다. 북서 측으로 길게 열려 있고, 낮은 토성으로 방어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산 높이도 120m로 낮은 야산에 불과하다. 한강을 뒤에 둔 배수진을 친 형상이다.

이곳에 권율의 군사 3000명과 의병장 김천일, 승병장 처영의 군사 6000명이 가세해 주둔하고 있었다. 주변에 수많은 백성들도 가세한다. 토성이 너무 낮아 그 위에 목책을 쳐 방어 시설을 보완한 수준이다.

일본군 우키다 히에이에가 수만 군사를 몰고 공격해 온다. 총 7차례 피 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진다. 조선군은 비격진천뢰와 신기전을 비롯해 천차총통과 화차, 화살은 물론 돌과 바위, 불, 끓인 물까지 동원해 적을 막아낸다. 일본군은 행주대첩 패배로 3일 만에 한양을 비워주고 후퇴해야만 했다.
  
▲ 행주대첩비 행주산 정상에 세워진 행주대첩비다. 이 탑 아래엔 예전에 세워진 대첩비가 비각 안에 세워져 있으나, 글이 마모되어 읽기가 쉽지 않다. 행주대첩 승리를 기념한다.
ⓒ 이영천
 
행주대첩으로 생겨난 치마가 '행주치마'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낭설이라 한다. 행주는 '뭔가를 닦는 헝겊'이라는 의미로, 말포(抹布)로 만든 치마라는 설이 유력하다. 또한 사찰에서 식사공양을 하는 행자승이 걸쳐 입는 덧치마로, 부엌일을 하다가 손을 닦는 용도로 걸쳤던 것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 한 마디로 서양에서 쓰는 '에이프런'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백성들, 그것도 아녀자들이 전쟁에 이기기 위해 치마로 돌을 날랐다는 의미까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행주치마라는 말이 어디서 왔건, 그 정신만은 오롯하게 살아남아 있다.
번성한 나루터가 있던 곳
 
▲ 옛 행주나루터 한강 조운의 중심 포구 중 하나였던 옛 행주나루 모습이다. 이 나루를 통해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중국으로 망명 길에 올랐다. 번성하던 포구 모습은 사라지고, 엉크러진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 이영천
   
행주나루는 강화 산이포, 김포 전류리포구와 더불어 마포로 가는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하던 한강의 큰 나루터 중 하나였다. 수천 명 인구가 살았으며, 나루터를 중심으로 저잣거리가 잘 발달되어 있었다. 어물전은 물론이고 대장간에 색주가, 무당집까지 있었다.
또한 행주서원이 있어 주변 교육 기능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서양의 종교가 가장 먼저 들어온 곳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행주성당은 1910년에 지어졌다. 그만큼 행주나루는 열린 공간이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물산과 문물, 문화와 사상의 중간 기착지가 행주나루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이곳 행주나루에서 목선을 타고 망명길에 오른다. 그 심경을 거국가(去國歌)라는 노래로 대신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도 이곳에서 망명길에 오른다.
  
▲ 행주성당 한옥으로 지은 행주성당 모습이다. 명동성당, 약현성당, 강화성당에 이어 1910년에 지어졌다. 물난리 등을 피해 몇 차례 이전하여 현재 있는 곳에 자리 잡았다. 1919년 교인들이 대거 3.1만세운동에 참여하기도 한다.
ⓒ 이영천
 
겨울에 한강 얼음을 채취, 여름까지 보관하던 석빙고도 있었다. 얼음은 물고기는 물론이고 각종 특산품을 저장·보관하는데 사용하였다. 행주나루 고유 민속으로 한강에 출몰하던 수적(水賊)을 몰아냈다는 데서 유래한 '12지신 불한당 몰이 놀이'라는 특이한 풍속이 전하기도 한다. 행주나루에 위어소(葦魚所)를 두어 수산자원과 경강으로 드나드는 세곡선을 관리했다.

해마다 5월이면 많은 웅어가 잡혀, 임금께 진상하기도 했다. 행주나루 웅어는 나라 안에 소문난 특산품으로 명성을 떨친다. 이밖에도 황복, 장어, 게 등 기수역(汽水域)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어종이 풍부해, 사시사철 어물전이 흥청거린다. 이곳 어부들은 계절 따라 강화도와 예성강이 만나는 바다까지 나가 어로작업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강을 가르는 '신곡수중보'로 한강하류가 육화되어 어종 다양성이 사라져 버렸다. 웅어도 예전의 맛을 잃어 버렸다. 물의 흐름이 막힌 탓이다. 행주나루에서 어업은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 이제 화려한 옛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나라가 힘을 잃어 급격히 식민지 수탈체제에 빠짐에 따라, 한강을 운항하는 조운권마저 빼앗겨 버린다. 경강(京江)을 운행하는 일본 대형 상선들에게 물류권을 몽땅 넘겨주어야만 했다. 총칼과 자본의 논리다. 그마저도 경인선과 경의선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나루는 더욱 쇠락의 길로 빠져 버린다. 행주나루 쇠퇴는 이런 수탈적인 기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행주나루 독립운동

행주나루는 1919년 3.1운동 때 '한강선상만세운동'을 벌일 만큼 독립과 민족자주의 힘이 강한 곳이다. 일제 탄압을 피해 한강에 배를 띄워 그 위에서 만세를 외친다. 밤엔 횃불을 밝혀 행주산 정상에 올라 만세를 외친다.
  
▲ 장효근 선생 언론인, 천도교인으로 3.1만세 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한다. 말년에 고향인 행주내리로 내려와 '장효근 일기'로 일제 강점기 사회상과 독립운동 내용을 기록으로 남긴다.
ⓒ 이영천
독립선언서 2만 매를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해 배포한 장효근 선생 고향이 행주 내리(內里)다. 선생은 말년에 이곳으로 와, 1945년까지 식민지 시기를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긴다. 선생의 일기는 국가등록문화재(장효근 일기, 제714호, 2018. 5. 8)로 지정되어 있다. 일기 내용은 '일제강점기 사회상과 국내외 정세, 독립운동에 대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어 역사적 가치가 높은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농민들을 위해 한강에 제방과 수리시설, 관개시설을 만든 '이가순' 선생을 기리는 송덕비가 있다. 행주산성 역사공원 안이다. 선생은 원산에서 3.1운동을 주도하였다. 옥살이를 마치고 고양군 토당리에 자리 잡는다. 사재를 털어 황무지같이 버려져 있던 한강 인근 토지를 매입한다. 제방을 쌓고 수리시설과 관개사업을 펼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수리사업을 주관하던 중 1943년에 생을 마감하고 만다.
 
▲ 이가순 관개 송덕비 고양시 행주산성역사공원 안에 세워진 관개 송덕비다. 옆에는 한강에서 물을 끌어 올린 양수장이 남아 있다. 선생은 사비를 들여 관개수로를 만들어, 고양은 물론 파주 심학산 인근 농토까지 옥토로 바꿔낸다.
ⓒ 이영천
   
의사였던 그의 아들 이원재가 아버지 뒤를 이어 사업을 완료하고 '고양군 수리조합'을 설립한다. 황무지 같던 땅이 옥토로 바뀐다. 고양에 있는 한강제방이 이때 같이 정비된다. 주민들이 그 공덕을 기려 비를 세웠다. 세계적인 음악가 정명화, 정경화, 정명훈, 정명소는 이가순 선생의 외손들이다. 이들 어머니 이원숙이 이원재 여동생이다.

방화대교가 지나는 곳에는 행주산이 있다. 사방으로 고속의 차량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행주산은 이제 도로에 갇힌 섬 모습이다. 나루터는 쇠락해 흔적마저 찾아보기 쉽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한강이 떠안아준 행주산과 나루터는 양양하다. 적들의 침략에 장렬하게 저항했던 올곧은 정신이 푸르게 살아남아 드높기만 하다. 높게 솟은 행주대첩비가, 젊어 빛이 나는 방화대교와 한강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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