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BC도 주목한 이주노동자의 죽음, 무엇이 바뀌었나
[최정규 기자]
▲ 9일 오후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이주노동자 기숙사 산재사망 대책위가 주최한 '이주노동자 열악한 기숙사 대책 온전히 수립하고 이행하라' 기자회견이 열렸다. |
ⓒ 이주노동자 기숙사산재사망사건 대책위 제공 |
캄보디아 출신 이주노동자 속헹씨가 경기도 포천 농장 기숙사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 지 50일이 지났다. 지난 7일 서울 종로구 법련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사회노동위원회 주관으로 고인의 넋을 기리는 49재가 열렸고, 9일에는 청와대 앞에서 시민대책위 주관으로 이주노동자 기숙사 대책을 제대로 수립하고 이행할 것을 정부에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있었다.
엄동설한에 비닐하우스 기숙사에서 동사로 추정되는 이주노동자의 죽음 앞에 시민들은 분노했다. 속헹씨 사인이 동사가 아니라 간경화 합병증이라는 국과수 1차 부검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열악한 기숙사 환경이 지병악화의 원인이라는 분석과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한 채 죽어가는 이주노동자 건강권 문제가 조명되기 시작했다.
▲ BBC 보도. 로라 비커 BBC 서울 특파원이 이주노동자 숙소에 방문해서 실상을 보도하고 있다. |
ⓒ BBC |
영국 공영방송 BBC도 사업장변경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는 현행 고용허가제가 현대판 노예제(modern-day slavery)라는 시민단체의 주장을 담았다. BBC가 이주노동자 기숙사 현장을 보도했고, 세계 3대 통신사인 AP 통신도 취재에 나섰다.
속헹씨의 죽음이 보도되는 이유
현장 활동가들은 속헹씨 사건이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매년 100명 넘는 이주노동자들이 산재로 사망하고 있다. 속헹씨 49재에 참여한 캄보디아 불교센터 린사로 스님은 2020년 한국에서 사망한 캄보디아 노동자들이 19명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속헹씨의 죽음이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주노동자 문제를 취재하고 있는 <매일노동뉴스> 정소희 기자는 속헹씨 죽음이 다른 이주노동자의 죽음보다 시민들에게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 건 사망장소가 '집'이었고, 속헹씨가 살았던 집(기숙사)이 우리가 집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속헹씨 사건을 취재한 또 다른 방송사 기자는 보통 사건·사고 보도는 경찰과 노동부의 조사 결과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데 이번에는 계속 사건을 고용허가제와 이주민 차별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시민단체들이 있어 사건의 본질에 더 접근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속헹씨 죽음을 SNS에 접하고 세상에 알린 시민단체 '지구인의정류장' 김이찬 대표는 2016년부터 '비닐하우스는 집이 아니다'는 구호를 외쳤는데 이주노동자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며, "이번에 많은 시민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걸 보니 이번에는 변화할 것이라는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지난 1일, 캄보디아 노동자 한 명이 경기도 여주에 있는 농장 기숙사에 사망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사인이 '동사'는 아니라고 하지만 평소 진료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노동자들이 겨울철 열악한 주거 환경에서 지내다 사망한 채로 발견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미안해야 할 이주노동자가 더 필요한가?
고용노동부는 1.6 대책을 통해 비닐하우스 내 가설건축물은 이주노동자 기숙사로 불허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지금껏 지자체의 묵인하에 사용하고 있는 농막, 임시숙소를 이주노동자 기숙사로 제공하는 것까지 전면 금지하는 내용은 이번 대책에서 빠졌다. 시민단체들은 고용노동부의 1.6 대책으로는 이주노동자의 피해를 막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2017년 12월 15일 부산 사상구에 있는 공장에서 불이 나 사망한 이주노동자의 기숙사는 '컨테이너 숙소'였다. 비닐하우스 내 가설건축물이 아니기에 고용노동부 1.6 대책대로라면 이런 숙소에서 발생하는 화재로 인한 사망은 막을 수 없다. 국토교통부는 고영인 의원실을 통해 화재 등에 취약한 건축법상 가설건축물을 이주노동자의 주거목적 기숙사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고용노동부는 1.6 대책 발표 당시 사업주의 숙소 운영규정을 명확히 인식하도록 '기숙사 시설표 개선'과 열악한 기숙사 제공의 경우 사업장변경을 허용하는 '외국인 근로자의 책임이 아닌 사업장변경 사유 고시'개정을 약속했다.
시민단체는 고용노동부 대책이 또 다른 이주노동자의 피해를 막아내기 위해서는 1.6 대책보다 더 강한 대책이 나와야 한다며 지난 9일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다.
현재 외국인 고용은 일정 기간 내국인 구인노력을 했지만 내국인 노동자를 고용할 수 없는 사업장에만 허가된다. 이주노동자가 근무하는 노동환경이 상대적으로 더 열악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 노동환경은 하루아침에 개선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주거환경은 다르다.
속헹씨 동료였던 4명의 캄보디아 이주노동자는 속헹씨 사망 이후 비닐하우스 숙소에서 벗어나 농장주가 제공하는 연립주택에 거주하고 있는 거로 파악되고 있다. 열악한 기숙사 환경은 농장주의 노력으로 즉시 개선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농장주들이 농막, 임시숙소를 거주 공간으로 사용하는 것을 지자체가 지역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허용하는 문제와 노동자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고용노동부가 불법 기숙사를 방관하는 문제는 똑같을 수 없다.
농장주가 이주노동자로부터 일정한 비용을 징수하고 제공하는 기숙사는 가설건축물이 아닌 건축법상 허가받은 건물이어야 한다. 고용노동부가 개정을 약속한 고시 등에 이런 내용이 담길지 여부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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