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새 정부니 잘 판단하라"..피우진 사퇴 종용 재주목
“본인이 스스로 생각을 잘하셔서 판단을 해주셨으면 한다.”
문재인 정부 출범 두 달 뒤인 2017년 7월 4일, 당시 피우진 국가보훈처장의 지시를 받은 오모 보훈처 국장이 윤주경(현 국민의힘 의원) 독립기념관장의 사무실을 찾아 “새롭게 정부가 바뀌었다”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는 윤 의원의 사퇴를 종용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피소됐던 피 전 처장과 오 전 국장에 대한 검찰의 불기소결정서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윤 의원은 독립운동가인 윤봉길 의사의 장손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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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우진 "심각하게 생각 말고 사표 내달라"
9일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법정구속 되면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타 정부부처에서 있었던 산하기관장 사퇴 종용 의혹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김도읍 국민의힘 의원실이 10일 입수한 피 전 처장과 오 전 국장에 대한 불기소결정서엔 직권남용 혐의로 피소됐던 두 사람이 윤 의원의 사표 제출을 압박한 정황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다.
수사 당시 윤 의원은 검찰 참고인 조사에서 오 전 국장이 자신을 찾아와 사표 제출을 종용한 뒤 며칠이 지나 피 전 처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당시 통화에서 피 전 처장은 윤 의원에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고 사표를 제출해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며칠 뒤, 다시 전화를 걸어온 피 전 처장은 사표 제출을 고심하던 윤 의원에게 “여러 사람으로부터 (사표를 받지 말라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사표 제출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했다고 한다. 이후 윤 의원은 남은 임기를 모두 채운 뒤 2017년 12월쯤 퇴임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2019년 야당의 고발로 수사에 착수한 검찰은 이듬해 2월 “공무원의 직권남용 행위가 있었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권리행사의 방해라는 결과가 발생하지 않았다”며 피 전 처장과 오 전 국장에 대해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윤 의원이 독립기념관장 임기를 채웠으니 두 사람의 직권남용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취지의 결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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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피우진 조사 없이 무혐의 결론
검찰의 무혐의 결론에 대해 야당은 “주요 피의자에 대한 조사 없이 나온 결론”이라며 재수사를 촉구했다. 불기소결정서에 따르면 검찰은 주요 피의자인 피 전 처장에 대한 조사를 한 번도 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신 검찰은 피 전 처장에 대한 무혐의 결론을 내린 이유로 또 다른 피의자인 오 전 국장의 진술을 근거로 댔다.
검찰은 불기소결정서에 “피의자(피 전 처장)가 출석요구와 진술서 제출을 모두 거부해 피의자의 입장을 확인하진 못했지만, 오 전 국장이 국장급 회의 결과에 따라 담당 국장으로서 윤 의원의 거취를 물어봤던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하고 있다”며 “그러한 사실만 가지고 피의자가 직권을 남용했다고 보기 어렵고, 달리 피의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적시했다.
하지만 2017년 8월 국회 예결위에 출석한 피 전 처장은 “임기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담당 국장을 보내 사표를 종용한 적이 있느냐”는 야당 의원의 질문에 “예, 그런 적이 있었다”고 답변했다. “국장급 회의 결과에 따라 거취를 물었다”는 오 전 국장의 검찰 진술과 내용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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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부도 사표 다 받았다"
당시 정황에 대한 윤주경 의원의 기억도 구체적이다. 윤 의원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당시 오 전 국장이 날 찾아와 ‘BH(청와대)에서 사표를 받으라는 이야기가 왔다’고 전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며칠 뒤 피 전 처장과 통화를 했는데 그가 ‘다른 데도 다 그런다. 외교부도 이미 다 사표를 받았다. 특별한 일이 아닌데, 굉장히 순진하다’는 취지로 이야기하더라”며 “내가 이런 식으로 물러나는 선례를 남기면 나중에 다른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도 이런 수모를 당할 것 같아 용납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도읍 의원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여러 부처에서 자행된 공공기관 블랙리스트 고발 사건 가운데 주요 피의자에 대한 강제조사 없이 석연찮은 이유로 종결된 것들이 있다”며 “검찰은 법원 판결로 환경부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드러난 만큼 종결사건에 대한 재수사를 통해 현 정부의 블랙리스트를 뿌리까지 뽑아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기정 기자 kim.ki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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