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문으로 배송하다 재판 넘겨진 택배기사 '선고유예' 이유
[강연주 기자]
"피해자가 300만 원을 주면 합의해 준다고 했었어요. 하지만 당장 그 큰 돈을 마련할 여력이 되질 않았고, 결국 재판까지 오게 됐어요. 이 사건으로 다니던 택배회사는 그만두게 됐어요."
9일 오후, 택배노동자 하아무개씨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법정에 섰다. 혐의는 '건조물 침입'. 잠겨 있지 않은 미용실 뒷문을 이용해 택배 물품을 배달하고 나왔는데 이 일이 화근이 돼 재판까지 오른 사건이었다.
이날 하씨의 재판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형사15부(안재천 판사)의 판단은 '선고유예'였다. 하씨의 범행이 경미하다고 보고 50만 원의 벌금형을 유예하기로 한 것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기타 다른 목적으로 이 사건 미용실에 침입했다고 볼 정황이 없다"고 판시했다.
하씨는 벌금형을 피했지만 직을 잃게 됐다. 이 사건이 계기가 돼 다니던 택배 회사를 그만두게 됐기 때문이다. 현재 그는 다른 일을 구하고자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다. 재판 직후 하씨는 "법이 택배 물건을 두기 위해서 들어간 것 자체를 죄라고 하는데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나. 전에 받았던 벌금형보다 올라간 게 아니라 다행일 뿐"이라며 씁쓸히 웃었다.
▲ 한 택배노동자가 잠겨있지 않은 미용실 뒷문을 이용해 택배 물품을 배달하고 나왔다가 '건조물 침입'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기타 다른 목적으로 이 사건 미용실에 침입했다고 볼 정황이 없다"고 판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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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씨가 직업까지 잃어야 했던 그날의 사건은 무엇일까. 당시 하씨의 배송지는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미용실이었다. 해당 미용실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는 건물 1층에 위치해 있었다.
문제는 해당 미용실을 운영하는 피해자에게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묻고자 연락을 시도했음에도 통화가 닿지 않았던 점이다. 그렇게 공동현관 앞에서 서성이던 중, 하씨는 미용실 뒷문이 잠겨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게 된다. 하씨는 이 뒷문을 이용해 미용실 내부에 들어가 배송 물품을 두고 나오게 된다.
피해자와의 통화는 배송이 이뤄진 후에야 닿았다. 이때 피해자는 전화로 하씨에게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하씨는 다시 뒷문을 이용해 물건을 가지고 나온 후 공동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물품을 미용실 앞문에 두고 나왔다. 비밀번호를 알고 난 후 배송물품을 제 위치에 놓고 나온 셈이다.
배송을 마친 하씨는 몇 시간 후 돌연 경찰 조사를 받게 됐다. 사전 얘기도 없이 열려 있는 미용실 뒷문을 이용해 배달을 했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자가 하씨를 경찰에 신고한 것이다. 하씨에 따르면, 해당 사건이 검찰에 송치된 후, 피해자는 하씨에게 합의금 300만 원을 요구하면서 '합의금을 주면 검찰에 말해 형을 낮춰주겠다'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하씨는 당장 300만 원을 마련할 여력이 없었다. 결국 하씨는 약식기소가 됐고, 지난해(2020년) 10월 벌금 20만 원의 약식명령을 받았다. 그럼에도 검사는 하씨에게 내려진 벌금형이 너무 낮다며 정식재판을 청구했다. 그 결과 하씨는 이날 재판을 포함해 총 두 번의 법적 판단을 받게 됐다.
'선고 유예'의 이유
이날 재판부는 하씨 행동의 위법성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하씨에게 범행의 고의가 없다고 봤다. 먼저 재판부는 피해자와 전화가 연결된 순간까지도 후문을 이용해 배송한 사실을 알리지 않았던 점은 문제가 있다고 봤다.
또한, 하씨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고지받은 직후 다시 뒷문으로 들어가 배송지를 변경한 행동 자체에 스스로가 미필적으로나마 위법성을 인식하고 있었다고 봤다. 비밀번호를 알고 난 후, 마치 처음부터 공동현관을 거쳐 미용실 정문 앞에 물품을 배송한 것처럼 정정했기 때문이다.
다만 재판부는 하씨의 행동에 배달 외의 목적으로 미용실을 침입했다고 볼 정황이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당시 피고인(하씨)은 이미 피해자에게 전화 연락을 시도한 상태였고, 미용실 내부에 배송물품을 두고 나와서 이 사건 미용실 내부에 진입한 게 피고인이었음을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었던 상황"이라며 "범행 경위와 범행 시각 등을 고려해도 피고인이 위법성 인식이 다소 미약한 상태에서 이 사건 범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지 못했으나 사과 의사를 재차 표시한 점, 피해자가 요구한 보상금 300만 원을 마련하지 못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도 하씨의 정상으로 고려됐다. 재판부는 이러한 점을 종합해 "(하씨에게 벌금 20만 원 선고한) 약식명령보다 더 가벼운 판결을 선고한다"면서 선고 유예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후 취재진과 만난 하씨는 "원래 검사가 청구한 금액이 50만 원이었다. 이것에 대한 선고유예가 나온 거라 따로 불복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피해자와의 추가 연락에 대해서는 앞서 300만 원의 합의금에 대한 문자를 주고 받은 것 외에는 닿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는 이 사건 발생 후 택배노동자 업무를 그만두게 됐다고 했다. 하씨는 "저희 택배노동자들은 대부분 개인사업자다. 회사는 이런 우리에게 일만 줄 뿐, 아무것도 책임져주지 않는다"라며 "물건을 잃어버려도, 고객이 주소를 잘못 적어줘서 배송을 잘못해도 모든 게 택배노동자의 잘못이 되는 그런 상황이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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