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미술 반기는 20대.."덕수궁 전시는 믿고 본다"

이은주 2021. 2. 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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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문학을..'전 4일 개막
지난 나흘간 관람객 2000명
평일인 9일 사전예약도 매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장. 7일 관람객들이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김성룡 기자


이중섭, '시인 구상의 가족', 1955, 종이에 연필, 유채, 32X49.5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세발자전거를 타는 아이와 아이를 붙잡아주며 흐뭇하게 웃고 있는 아빠. 뒤에선 엄마와 누나가 지켜보고 있고, 앞에 손님으로 보이는 남자가 이 단란한 가족을 바라보고 있다. 누런 색감, 얼굴에 웃음기 하나 없이 이 가족을 바라보는 손님 남자의 모습이 서글퍼 보인다.

이중섭이 1955년에 그린 '시인 구상의 가족'(1955). 전쟁 중 가족(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중섭이 극심한 절망에 빠져있던 때 그린 작품이다. 이중섭은 가족과의 재회를 꿈꾸며 작업에 몰두했으나 1955년 1월에 연 개인전이 실패하자 일본에 있는 아내와 연락도 끊었다. 이 그림은 당시 오래된 친구이자 시인인 구상의 집(부산 왜관(에 머무르며 그린 것으로 그림 속 '손님' 남자는 절망에 찬 이중섭 자신이었다. 이 작은 그림 한 점에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와 시인이 나란히 등장했다. 화가가 감당할 수 없었던 시대와 삶의 무게도 고스란히 담겼다. 근대미술이 전하는 남다른 울림이다.

국립현대미술관(MMCA·이하 국현) 덕수궁관에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이 지난 4일 개막했다. 국현이 여는 올해 첫 기획전으로 일제 강점기와 해방 시기 시인·소설가 등 문인과 화가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세대를 불문하고 중·고교 시절 국어 교과서에서 한 번쯤 접했던 작가들이 대거 출동했다. 정지용·이상·김기림·김광균 등의 시인과 이태준·박태원 등 소설가, 그리고 구본웅·이중섭·김환기 등의 그림과 글을 4개 공간에서 만날 수 있다.


암흑과 매혹의 1930년대

구본웅, '친구의 초상', 1935, 캔버스에 유채 62x50cm.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김용준, '이태준의 초상', 1928, 하드보드에 유채, 32.5x24cm.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화가 구본웅(1906~1953)이 1935년에 그린 ‘친구의 초상’으로 문을 열며 관람객을 1930년대로 안내한다. 미술사가들이 요절한 천재시인 ‘이상’(1910~1937)의 초상이라고 추정하는 그림이다. 1전시실은 1930년대 시인 이상이 경성 종로에서 운영했던 '제비' 다방을 배경으로 당시 예술가들이 공유하고 시도했던 예술적 실험을 조명한다.

소설가 박태원이 직접 그린 소설 삽화. 마치 카메라가 위에서 내려다보며 찍듯이 묘사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 중 하나가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986)이 그린 삽화 6점이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천변풍경』으로 유명한 박태원은 1933년 동아일보에 ‘반년간’을 연재하며 삽화를 직접 그렸는데, 잘 살펴보면 각 그림은 카메라 앵글이 독특하게 잡힌 영화 속 장면 같다. 박태원은 영화 '기생충'을 연출한 봉준호 감독의 외할아버지다.

2전시실은 1920~40년대 신문과 잡지의 표지와 삽화를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김소월의 『진달래꽃』, 백석의 『사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 시집들의 원본을 볼 수 있다. 1936년 출간된 『사슴』은 백석의 유일한 시집이자 100부로 한정해 출판한 것으로 오늘날 수집가들이 가장 소장하고 싶어하는 시집으로 꼽힌다.

최재덕, '한강의 포플라나무' 1940년대, 캔버스에 유채, 65x91cm,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가 열리고 있다. 7일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들이 김환기의 작품을 살펴보고 있다. 김성룡 기자

3전시실은 서로 영감을 주고받았던 문인과 화가들의 교우에 초점을 맞췄다. 글과 그림에서 모두 재능이 남달랐던 예술가 6인의 글과 그림을 소개한다. 장욱진의 '사람'(1957), 천경자의 '정원'(1962), 김환기의 '무제'(1969~73)를 볼 수 있다.


덕수궁 전시 매니어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한국 최초의 석조식 건물 석조전 건물에 자리잡은 미술관이다. 김성룡 기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장 전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김환기 작품을 보고 있는 관람객들. 김성룡 기자

덕구숭관은 이번 전시가 개막한 4일부터 문전성시다. 주말 이틀간 1200여 명 등 개막 후 나흘 간 관람객이 2000명에 달한다. 코로나19 방역 조치로 입장 인원을 1시간당 70명으로 제한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수용 최대치에 가깝다. 8일(월요일) 휴관을 거쳐 다시 문을 연 9일 전시도 사전 예약분이 매진됐다.

국현에선 "덕수궁 전시 매니어가 있다"는 얘기가 돈 지 꽤 오래다. 1998년 국현 분관으로 개관한 '덕수궁미술관'은 한국 근대미술 전문 미술관. 과거 프랑스 인상파전 등 블록버스터 전시도 소개했지만 10년 전부터는 한국 근대미술을 중점적으로 소개해왔다.

특이한 것은 덕수궁관의 근대미술 향연에 20대가 가장 열렬하게 화답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현 통계에 따르면 지난 3년간 관람객은 연령별로 20대가 24.1%로 가장 많았다. 그다음이 초중고생 16.5%(어린이는 별도 3.2%), 60대 15.5% 순이다. 30대, 40대, 50대는 각각 13.1%, 14.9%, 12.7%로 엇비슷했다. 실제로 이번 전시가 시작되자 트위터와 인스타그램 등 SNS에는 "요즘 기획력은 덕수궁관이 가장 트랜디한 것 같다""덕수궁 전시는 믿고 본다"는 게시물이 눈에 띄었다.

김인혜 국현 근대미술팀장은 "우리 근대 시기의 역사와 미술을 중·장년층만 아니라 20~30대를 염두에 두고 전시 내용부터 공간연출까지 특별히 신경 써왔다"면서 "초·중고생은 단체 관람이 많고, 60대는 꾸준히 찾는 관객이 많다. 놀라울 정도로 전 연령층이 고루 찾고 있다"고 말했다.


방탄소년단 RM효과
고궁 속 미술관과 근대 대표 건축물이라는 특수성, 근대미술 콘텐트의 매력, RM효과 등도 덕수궁관의 인기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박래현 전시를 기획한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는 "근대미술은 작가마다 스토리가 있고, 작품과 삶이 모두 역사와 연결돼 있어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접근할 수 있으며 공감할 폭이 크다"고 말했다. 동시대와의 공감을 염두에 둔 기획도 주효했다. 2017년 '신여성 도착하다'도 크게 주목받았고, 지난해 박래현 전은 '김기창의 부인 박래현'이 아니라 독립된 예술가 박래현에 초점 맞췄다. 20대를 끌어들이는 데는 세계적 스타 방탄소년단 리더 RM(김남준)의 영향도 작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RM은 2018년부터 지난해 박래현 전까지 총 여섯 차례 주요 전시 때마다 미술관을 찾았다.

김인혜 근대미술팀장은 "적은 비용으로 고궁 산책과 미술 전시 등 고 퀄리티 문화를 누리기 원하는 젊은 세대가 즐겨 찾아오고 있다는 사실에 더욱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면서 "앞으로도 전문성과 대중성의 균형을 맞춘 전시를 선보이는 게 목표"라고 강조했다. 전시는 5월 30일까지. 11~14일 연휴기간 무휴. 토요일 오후 9시까지. 관람료 무료(덕수궁 입장권 1000원 별도)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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