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최천택, '동국역사'를 배포하다

이병길 2021. 2. 8.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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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찰서 투탄·순국 100주년] 의열단원 박재혁과 그 친구들 20

[이병길 기자]

금서(禁書)의 시대에 살다

일제는 조선을 보호국화하기 위하여 조선의 관료제를 장악하고 아울러 조선의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의 기록을 장악해갔다. 구체적으로는 규장각의 기록을 정리함으로써 조선의 역사기록을 파악하고, 정부의 현재 사용 기록을 장악하면서 조선 내부의 취약적인 부분을 알아차렸다.

다른 한편으로 '시정개선(施政改善)'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개혁을 빙자하면서 조선을 침략해 들어갔다. 일제는 단순히 조선을 지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치밀한 계획에 따라 식민지 지배 전략을 수립한 것이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병합하고, 보다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통감부 시절부터 여러 분야에서 조사사업을 벌였다.

1906년 11월부터 1907년 11월까지 부동산법 조사회를 통해 조선 부동산에 관한 조사를 하였으며, 1908년 1월부터 1910년 9월까지는 법전조사국을 통해 조선 관습에 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또한 강제병합 직전, 홍문관, 규장각, 집옥재, 시강원, 북한산 이궁과 강화 정족산 사고의 도서를 궁내부로 이관하여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통해 일제의 식민지 정책의 수립과 동화주의에 입각한 정책을 시행하였으며, 궁극적으로 민족문화의 말살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식민사관을 구축하기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정체성과 저열성 등을 강조하여 일제의 식민통치가 정당함을 조선인에게 주입했다.

1905년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면서 이후 조선에 대한 출판에 대한 간섭과 통제 등 문화 탄압행위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경무청 경찰국에서 '정사(政事) 및 풍속에 관한 출판물 그리고 집회 결사에 관한 사항'을 취급하여 출판물에 대해 검열을 하였다.

대한제국기에 출판되었던 구국 계몽운동 서적은 금서가 되었다. 애국 서적의 출판도 검열을 통해 봉쇄하였다. 1908년 7월 경시청은 <금수회의록> <을지문덕전> <월남망국사> <이태리건국삼걸전> <음빙실자유서> 등 당시 널리 읽히던 서적을 압수하였다. 노래집인 <중등창가>까지 금서로 만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강제 병합 이후 출판법(1909년), 출판규칙(1910년)을 공포했다. 같은 해 3월에는 그때까지 출판된 신서적 280여 종 중 10여 종이 압수되리라는 소문이 소포 영업자 사이에 돌았다. 이윽고 5월 5일 내부대신은 출판법 제16조에 따라 7종의 도서를 발매·반포 금지하고,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법으로 일본인은 신고와 사후검열인 데 비해 한국인은 허가와 사전검열을 받았다.

일본과 달리 식민지 조선을 차별적으로 통제하였다. 압수된 책이 혹시 또 다른 곳으로 흘러 들어갈까 하여 태웠다. "출판법에 의하여 학부에서 금지된 서책 중 압수한 수가 3700여 책이라는데 혹 파전(播傳)될 우려가 있다하여 소화(燒火)한다더라."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생산된 신문, 잡지, 출판, 음반, 연극, 영화 등 언론과 출판 등 문화 전반에 대해 광범위한 탄압과 통제를 하였다. 삭제와 몰수, 폐간 등이 그들의 무기였다. 어린이 운동을 하였던 방정환은 "내용 기사 중에 짭짤한 구절은 원고 검열할 적에 싹둑 삭제(削除)를 당하여 마치 꼬리 뺀 족제비 모양이 되었습니다." 또 "쓰기는 우리 마음대로 쓰고 싶은 것을 쓰지만 책에 싣고 못 싣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불편함을 호소하였다. 검열만이 아니라 출판물이 몰수당하기도 하였다. "뜻밖에 총독부 경무국으로부터 압수의 명령이 내려 본사(개벽사)와 경성 50여 서점은 물론이요. 온 조선 300여 처에서 책(<어린이? 1928. 1월호)을 모두 몰수당하였습니다." 결국에는 잡지가 폐간되기도 하였다.

1965년에 간행된 문정창의 <군국일본조선강점삼십육년사>에는 51종 20만 권에 대한 분서 사건이 언급되어 있다.

"이른바 한일병합이 이룩되자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이제는 조선 민족의 민족정기와 그 국가 의식을 박멸하기 위하여 부월(斧鉞)을 높이 추켜들었으니 그 제1차 작업이 충의록(忠義錄), 무용전(武勇傳), 위인전(偉人傳), 역사서(歷史書) 등의 분소(焚燒) 및 판매금지 소동이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1910년 11월부터 일본 헌병, 경찰, 조선인 헌병 보조원 등을 동원하여 종로 일대의 서점과 전국 각지의 서사(書肆),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 세가(勢家) 등을 급습하여 장지연 저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이채병(李採丙) 저 <애국정신(愛國精神)>, 신채호 저 <을지문덕>, 현은 저 <미국독립사> 등 범 51종 20만여 권을 불사르고 또한 이러한 류의 서적의 판매를 엄금하며 그 소지자와 열람자를 처벌하였다."

하지만 이는 부분적으로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만큼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민족혼을 지우기 위한 분서와 금서 사건을 강조한 것이다.

<조선총독부 관보>의 1910년 11월 19일의 '발매금지·압수처분 도서 목록'을 보면 금서 51종은 맞지만 20만 권의 분서는 사실이 아니다. 51종의 도서 목록은 출판법을 제정하고도 미처 통제하지 못했던 '불온' 출판물들을 강점을 계기로 하여 일괄 정리하려는 계획에서 나온 것이었다.

압수 처분된 서적으로 인해 출판사는 큰 타격을 입었다. 압수 서적은 금서목록에 있는 것으로 수만 권이지 20만 권은 아니었다. 경찰에 의한 전국 각지의 서사(書肆, 서점) 수색은 당연하지만 "향교, 서원, 구가(舊家), 양반세가의 급습"은 법적 근거도 없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헌병 경찰이 고서적을 해독할 정도로 수준이 높지는 않았다. 그리고 1년 2개월의 단속기간은 없었다. 검열은 고등경찰의 일상 업무였다. 하지만, 일제의 출판물 탄압은 분명히 있었고 탈취 역시 있었다.

일본인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일본 도야마대학 명예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고려말부터 일본으로 유출된 한국의 고서는 5만여 권 이상으로 파악되고 있다. 모두 약탈당한 것은 아니다. 우리의 무지로 인해 대한제국 이후 엿가락과 보리 몇 되로 바꾼 것도 있다. 이는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일제 강점기에 저질러진, 데라우치 문고, 아사이 문고, 오쿠라 컬렉션 등 개인 수집품을 포함 '정책적·제도적 약탈'과 구한말 이후 광복 전까지 일본의 관학자들에 의하여 '문화재 조사'라는 명목으로 이루어진 단위 문화재에 대한 공식 학술조사만 보아도 무려 1370건에 이른다고 한다.
 
▲ 동래 영보단 - 일제가 호적대장을 불순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있어 동래주민들이 태우고 비석을 세워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 이병길
 
부산 복천박물관 근처에 '영보단비(永報壇碑)'가 있다. 1909년(순종 3) 일제가 호적 대장을 거두어들이려고 하자 동래 사람들은 조상들의 성명이 적힌 호적 대장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것을 우려하여 동래 지역 13개 면 호적 대장을 모아서 복천박물관 뒷산 마안산 기슭에서 태운 뒤 그 자리에 단을 쌓고 영보단(永報壇)이라 하였다.이후 매년 음력 4월 23일 이 단에 모여 동래기영회 주관으로 제사를 지냈다. 1915년 일제 침탈로부터 우리 것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다짐하며 영보단 비석을 세웠다.

일제는 서적의 강제 탈취 이외에 금서 정책을 펼쳤다. 우리 민족의 혼을 유지할 수 있는 것들은 보지도 읽지도 못 하게 하였다. 일제는 애국 출판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조선의 주체적인 민족사상은 물론 자유주의 사상, 사회주의 사상 분야는 물론, 자주독립 사상을 억압하고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말살하기 위하여 족보나 만세력 같은 출판물까지도 조선사람이 찍어내는 것은 엄격하게 통제하여 무조건 금서화하였다.

시기별로 1910년대는 구국 계몽운동 관련 출판물, 1920년대는 민족운동 관련 출판물,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는 사회주의 관련 출판물, 1930년대 후반부터는 총독부의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모든 출판물로 나눌 수 있다. 일제는 1909년 2월 공포한 '출판법'을 통해 사전검열제도를 확립하여 체계적인 금서 정책을 취했다.

을사늑약 이후 민족의식이나 조선의 주권을 강조하는 책은 소각하고 압수했기 때문에 일제에 의한 금서 조처의 역사는 40년 이상이다. 일제의 금서 기준은 첫째, 민족사상의 말살 책동으로서 우리 역사책이나 의사·열사·영웅들에 관한 전기류, 족보·만세력까지 포함한다. 둘째, 전통문화와 고유문화를 말살시키고자 한 인문·지리·풍습에 관한 서적. 셋째, 독립정신을 저해시키고자 하여 외국의 독립운동사·망국사와 같은 외국의 역사책. 넷째, 민족혼을 일깨우지 못하도록 무궁화·태극기 등에 관한 책. 다섯째, 서양의 민주주의 사상, 러시아의 사회주의 사상에 관련된 모두 문헌. 여섯째, 농민운동·청년운동·여성운동과 야학 운동의 내용을 다룬 책이었다.

기록상으로 볼 때, 일제 강점기의 마지막 금서는 바로 '한글사전'이었다. 일제는 '내선일체'에 어긋나는 내용이나 민족운동에 직접이나 간접으로 관계되는 모든 책에 족쇄를 채웠는데, 일제 말기에 한글로 된 모든 책을 금서화하였다.

1910년의 51종을 비롯해 출판법 제정 이후 1917년 8월 8일까지 모두 130종의 출판물이 발매반포금지 되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 <최도통>, 현채의 <대한지지> <동국역사>, 정인호의 <대한역사> 등은 물론이고 구국 계몽의식을 고취하던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박은식의 <서사건국지> <몽배금태조> 등의 저서가 금서가 되었다. 1910년 11월 대한제국기의 대표적인 출판사인 김상만의 <광학서포>에서 출판한 서적 12종 1만6238권이 압수되어 4170원64전의 손해를 입어 경술국치 이후에 출판 활동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출판사들은 정치색이 덜한 사랑타령류의 소설을 출판할 수밖에 없었다.

분서와 금서의 시대에는 사상의 자유가 없다. 생각을 통제함으로써 일제는 한국인을 천황의 충실한 신민이 되도록 하고, 한국인의 일제에 대한 저항 의식을 거세하여 식민지 백성으로 순종의 삶을 살도록 유도하였다. 하지만 한국인은 강제와 강압 앞에서는 언제나 굴종하지 않는 민족이다. 누르면 누를수록 튀어 오르는 용수철과 같은 민족이다.

최천택, <동국역사>를 배포하다 
 
▲ 현채의 동국역사(1899)-  1899년 광무3년 학부편집국에서 간행된 보통교과 동국역사, 대한 제국 말의 학자이며 서예가인 현채(玄采)가 지은 역사책.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가르쳐 애국심을 길러 주기 위해 지은 교과서이다.
ⓒ 이병길
 
최천택은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17세에 우리나라 역사를 먼저 알아야 되겠다고 느끼고 소장한 <동국역사(東國歷史)>를 복사 출판하고자 등사판을 구입하여 하학(下學) 후에는 자필로 원지에 옮겨 쓰고, 한 편 찍어내어 배부하였다. 이때 일본 관헌은 일한 합방 때 한국 역사에 관한 서적을 가가호호(家家戶戶)마다 수색하여 압수한 뒤 불태워 버릴 때라 나 자신도 발각되어 제1차로 경찰에 붙잡히었다. 나는 피검 10일 만에 부형들의 운동으로 석방되어 무사하였으나 이때부터 일본인 북촌(北村) 형사가 부단히 나를 감시하게 되었다."

정공단 아이들뿐만 아니라, 생각이 깨어있는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나라 걱정을 했다. 지금이야 어린아이로 생각할 10대 초반에 그들은 대한제국의 망국을 눈앞에 두었고. 쇄국과 개화 갈등을 시시각각 온몸으로 느끼며 살았다.

무엇보다 부산은 다른 지역보다 일본의 신문물이 일찍 들어와 격랑의 현장이라 애국적 정열이 자연 샘솟게 하였다. 사회적 환경이 그들을 애국자로 만들고 있었다. 1907년 최익현의 장례식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1909년 남순(南巡) 길에 나선 융희황제(순종)가 부산항에 정박 중인 일본 군함을 참관하러 가는 도중 지금의 자갈치 시장에서 초라하기 짝이 없는 목선을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치욕감과 참담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목선과 군함은 한국과 일본의 경제와 국력 차이를 상징적으로 느끼게 했다.

왜병들은 의병에게 자신들이 묻힐 구덩이를 스스로 파게 하고 끓어 앉힌 후 왜병이 칼로 목을 치면 구덩이에 떨어지고 그것을 동료 의병이 파묻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이들은 자랐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애국심이 솟아나지 않았겠는가? 때로는 웅변가와 애국자인 이동휘, 안창호, 남형우 등의 애국을 강조하는 강연을 들으며 독립에의 의지를 다짐했다. 이제 교육을 통해 신문물을 접하고, 언문을 깨치면서 <대한매일신문> 등의 신문 기사를 돌려 읽었다. 그리고 국내외 영웅 위인전을 읽었다. 경술국치로 나라 잃은 치욕 울분은 가슴에 평생을 두고 민족적 분노로 쌓여있었다. 점차 아이에서 소년으로 성장하며 애국심이 가슴 한가운데에 자리한 학생들이 있었다. 정공단 아이들도 그런 학생이 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1906년 8월 통감부는 '보통학교령'을 반포하고 소학교의 폐지와 함께 역사교육과 지리과를 통합하여 국사교과서의 입지가 사라졌다. 1908년 '교과용도서검정규정'에 이어 1909년 출판법 반포로 '구 학부' 편찬 교과서를 발매 금지했다. 이 때문에 당시 학생들이 보았던 한국사 책들이 사라졌다. 조선사람이 조선의 역사를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역사교육의 부재는 민족정신의 퇴화로 연결될 수 있었다.

부산공립상업학교에 진학을 한 최천택은 상업과목 중심의 학교 교육에서 우리 역사를 가르치지 않고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이 사라짐에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한국사 책을 압수하고 판매 금지한 상황이라 역사책을 구할 수도 읽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천택은 '우리 역사 알기'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았다. 그의 나이 17살이었던 상업학교 2학년 때인 1913년이었다.

최천택이 배포하려 한 역사책은 <동국역사(東國歷史)>였다. 천택은 한문체로 간행된 현채(玄采, 1856~1925)가 쓴 중등용 교과서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1899)을 소학교용으로 쉽게 고쳐 국한문혼용체로 서술하여 1899년 학부에서 간행한 소학교용 한국사 교과서인 <보통교과동국역사(普通敎科東國歷史)>에 주목했다.

충군 애국정신을 고취하고 만국(萬國)에 명예를 떨칠 수 있는 교과서였다. 5권 2책으로 총 359면 12행 28자로 이루어졌으며, 단군부터 고려 말까지를 대상으로 하여 편년체 서술체제였다. 단군에서 역사를 시작한 것은 자주적 역사 인식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최천택은 부산진공립보통학교 은사가 가지고 있던 책을 빌려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은사는 김용세 선생이었을 것이다.

최천택은 역사책을 등사하기 위해 등사기와 잉크, 종이 등이 필요했다. 일단 경비는 다소 유복한 최천택이 부담했다. 그의 아버지 최차구(崔此球)는 당시 해운대, 가야 등지에 많은 논밭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친의 사망으로 모친이 재산을 관리했지만, 최천택이 어느 정도 사용할 능력이 되었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자 최천택은 정공단 인근에 사는 박재혁, 김병태, 박흥규와 함께 모여 등사를 하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조선인이 조선의 뿌리를 모르고서야 어찌 조선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라며 민족혼을 찾기 위해 역사책 읽기가 중요함을 역설하였다. 천택은 일제가 압수하여 볼 수 없는 역사책을 읽게 하자는 목표를 가졌다. 배포 대상은 보통학교 학생이 아닌 상업학교 학생들로 생각했다.

400쪽이나 되는 책을 등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먼저 푸른색 밀납종이에 철필로 글씨를 썼다. 힘을 조금만 주어도 밀납종이가 찢어질 수 있어 조심해야 했다. 철필로 글을 쓰면 양초 같은 것이 긁어져 나왔다. 그것을 등사판에 고정하고 밑에 종이를 두고 잉크로 묻힌 롤러를 밀면 종이에 등사가 되었다.

글을 쓰는 일과 등사하는 일, 그리고 책을 제본하는 3단계의 작업이었다. 때는 봄날의 5월이라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신나게 일을 하였다. 처음에는 2백 부를 찍어 상업학교 학생에게만 나눠주기로 했었다. 그러다가 욕심이 생겨 총 3백 부를 찍었다.

박재혁이 "책을 만들면 어디에 배포하는 것이 좋을까?" 하자, 동생뻘인 김병태가 "형, 이왕이면 형이 다니는 부산공립상업학교에만 배포하지 말고 다른 학교에도 배포하는 것이 어떨까?" 하였다. 그러자 천택이 "그래, 민족의식이 강한 동래고보(현 동래고교), 일신여고(현 동래여고), 부산항고녀(현 경남여고), 조선인 학숙 등의 학생대표들에게 나누어 돌려보게 하자"라고 하였다.

결국 처음보다 계획이 확대되었다. 책을 배포할 대표 학생은 최천택이 관계한 광복단원이었다. 당시에 오택이 관계했다면 경남학생연합회 대표 학생이었지만 동국역사 배포에 오택은 관계하지 않았다. 동국역사 배포사건은 그만큼 은밀한 작업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항일 행동을 하는 것이기에 또래이지만 비밀을 보장할 만한 사람 중심이어야 했다. 결국 좌천동의 정공단 아이들 중심일 수밖에 없었다.

1차로 110부는 네 사람이 나누어 보자기에 싸 들고 각자 맡은 대로 지목된 학우들을 꾀내어 나누어 주었다. 은밀한 작업은 성공했다. 2차 배본 대상은 상업학교가 아닌 동래고보와 일신여고, 항고녀의 학생과 임정학숙 같은 조선인 학숙 학생이었다. 개개인을 방문하여 2차로 70권을 나누어주었다. 3차분 90권을 완성해 최천택의 집에 보관하여 배부하려 하였다. 3회째 배부할 무렵 형사에게 체포되어 등사기 등 일체를 빼앗겼다.

책을 불법으로 등사하여 배포하는 일은 출판법 위반이었다. 그는 10일간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을 배신하지 않았다. 배신하지 않은 대가는 반죽음 상태였다. 정공단 아이들은 조마조마했다. 언제 형사가 와서 잡으러 올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형사들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 사이 최천택의 모친은 뻔질나게 경찰서를 드나들며 간곡한 교섭을 하였다.

학교에서도 최천택을 책임지겠다며 선처를 요구했다. 아직 배움에 있는 학생으로 단지 친구들에게 역사를 알게 하겠다는 것이지 그것이 배일 활동은 아니라고 모친은 경찰에게 말하고,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하겠다 하였다. 물론 모친은 경찰에게 싫지만 어떤 비용을 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뿐인 아들을 영영 볼 수 없는 상황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천택을 학교와 모친의 보증으로 10일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이후로 그는 일본 경찰의 요시찰 대상이 되어 항상 가타무라(北村) 형사의 감시를 받았다.

최천택이 고문을 당하면서도 동국역사 등사와 관련하여 자백하지 않았기에 친구들은 피해를 당하지 않았다. 최천택의 일제 경찰 고문 버티기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32년 동안 크고 작은 사건에 연관돼 무려 54회나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지만 한 번도 형을 살지 않았다. 그만큼 고문을 받고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본 경찰도 "부산에서 매 잘 맞기로는 최천택이 제일"이라고 탄복했다. 해방 후 좌익으로 몰려 헌병대에 끌려가 최천택은 살아남았지만, 친구인 동산 김형기와 엄양준은 돌아오지 못했다.

<동국역사> 책은 연활자본(22.8×16.2㎝), 5권 2책으로 총 359면 12행 28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을 등사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등사기와 푸른색 밀랍종이, 가리방, 철필, 등사용 잉크 그리고 종이가 필요하다. 1917년에 습자지 20장이 4전이었다. 습자지로 1권의 종잇값만 대략 70전이 든다. 300부라면 210원이 든다. 1914년에 관립고등학교 한 달 월사금이 50전이니 1년 월사비 합이 6원이니 210원은 엄청난 돈이다. 실상 등사본을 360쪽 300부를 만든다는 것은 경비만이 아니라 인력도 많이 필요한 일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학생 4명이 이와 같은 일을 했다는 것은 상상외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최천택 자신의 수기에는 '한 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등사기를 사서 한 편만 찍었다고는 볼 수 없다. 누군가의 경제적 도움이 없이 학생 4명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임은 분명하다.

또 당시 부산 시내 학생 200여 명에게 배포하였다는 것은 다소 과장된 것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최천택, 박재혁, 김병태, 박흥규가 동국역사 배포사건에 관계하였고, 책은 분명히 등사하여 배되었고 최천택은 형사에게 체포되었다. 등사한 책의 수량과 경비와 관계없이 최천택과 정공단의 아이들이 함께 항일운동을 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지금도 쉬운 일이 아닌 일을 당시에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다. 때론 독립운동이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과장은 국내외 민족 구성원들에 항일운동의 성과를 드러내고 그것을 강조함으로 독립의식을 고취하려 한 측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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