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위에 직접 새긴 이 가문의 족보가 특별한 이유

이완우 2021. 2. 8.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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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 이야기] 임실 현곡리 연화실 마을과 퇴적암 족보 바위

향토에 한적한 작은 고갯길을 답사하여 전해오는 설화, 역사, 자연 생태의 정보를 이야기로 싣는다. <기자말>

[이완우 기자]

고갯길은 길이면서 목표와 방향이다.

고갯길에 입춘 절기가 머물러 있다. 벚나무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서 제 자리를 굳게 지키고 있다. 나무가 봄여름에 피워내는 푸른 잎과 색채 머금은 꽃은 어쩌면 나무의 본질이 아니다. 겨울의 추위와 함께 침묵하고 있는 뿌리와 줄기 가지에서 꾸밈없는 나무의 본질을 본다.

본질은 기다림에 익숙하다. 아 벚나무 가지에 꽃 피는 봄의 꿈이 걸려있구나. 걸음을 멈추고 나뭇가지에 걸린 봄의 꿈을 이리저리 살피느라 해찰한다. 벚나무의 나무껍질도 꽃피는 봄날 화사한 찰나를 꿈꾼다. 나무 껍질의 소박한 갈색이 입춘 절기를 맞아 생기 있다.
 
▲ 쉰재 옛길은 흔적이 없고 자동차도로가 S자를 그리며 고개를 넘는다.
ⓒ 이완우
 
임실읍 성가리의 서북쪽으로 힘차게 뻗은 산줄기를 고갯길로 넘는다. 고갯길은 2차선 도로를 S자형으로 몇 굽이 휘돌아 1km 정도 이어진다. 이 고갯길이 너무 험해서 사람들이 쉰 명은 모여야 함께 넘어가는 고개라 하여 쉰재(五十峙)라 했단다.

사람들이 걸어서 넘던 옛길은 이제 2차선 도로에 지워져 흔적을 찾기 어렵다. 쉰재 어귀 가까이에 왜가리 백로 서식지가 있는데 이 옆의 동산 능선을 따라 옛길이 있었다고 한다. 길을 걸으면 전진하는 목표와 방향이 정해진다. 이 쉰재를 넘어서 현곡리의 연화실 마을을 찾아간다.

연꽃 핀 이상향 연화실 마을
 
▲ 연화만세낙원 마을이 물에 뜬 연꽃 모양의 명당이라고 한다.
ⓒ 이완우
쉰재를 넘으니 현곡 저수지의 푸른 물결이 햇살에 반짝인다. 거먹골을 바라보며 한참을 더 내려가면 '여기가 내 고향 蓮花實'이라는 마을 표지석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마을이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명당으로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형국이란다. 마을 어귀에 '蓮花萬世樂園'이란 글씨가 새겨진 돌기둥이 장승처럼 우뚝하다. '연꽃이 영원한 세월 피어 있는 낙원'이라는 선언하고 있다. 이 마을의 긍지와 자부심이 큰 북소리처럼 울려 퍼진다.

마을 가운데로 작은 개울이 흐른다. 개울 상류에서 동서남북의 물이 모여서 함께 흐른다고 하여 십자수(十字水)라 한다. 느티나무 두 그루가 마을의 당산나무로서 주인다운 품격이 충분하다. 이 당산나무 아래에 들독이 3개 있다. 마을 청년들이 힘자랑하며 들메던 왕성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을 우물은 연화암정(蓮花岩井)인데, 이 샘물은 연잎에 머문 맑은 아침 이슬 같았다고 한다. 마을에 생활민속관이 있다. 연자방아가 전시되어 멍에 끼고 돌며 탈곡하던 소를 추억하고 있다. 살쾡이나 족제비로부터 병아리를 보호하는 안전한 보금자리였던 병아리 엇가리도 보인다. 전통과 유산을 소중히 지켜가는 마을이다.

거북바위의 족보에 새겨진 생명력과 희망

마을의 중심인 당산나무에서 동쪽으로 산기슭 200M 위에 있는 경주이씨 세록비(慶州李氏 世錄碑)를 찾아간다. 마을이 잘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평지에 자연석의 거북바위가 있다. 이 마을의 들과 산기슭에 많이 보이는 마이산 퇴적암 계통의 역암이다. 기질인 모래를 바탕으로 마모되지 않은 각진 작은 자갈 클러스터가 듬성듬성 보인다.

구한말은 일제에 국권이 침탈되는 뼈아픈 역사의 시대였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정미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나 수많은 애국 혼을 불태웠다. 불어 닥칠 국난을 예견하고 기유년(1909년) 봄에 경주이씨 한 가문에서 족보를 거북바위에 새겼다. 고조할아버지까지 5세대(世代) 44명의 족보 비석이다.

거북바위는 자연석으로 가로 2.5m, 세로 1.6m로 제법 크다. 거북바위의 남쪽 면을 가로 1.6m, 세로 1.4m의 직사각형으로 수직 평면을 다듬어 그 안에 600여 글자로 족보를 새겼다. 비석은 화강암 대리석 응회암을 재료로 하기 마련인데, 이렇게 퇴적암인 역암을 재료로 한 비석은 처음 보았다.
 
▲ 족보 바위 (정면) 족보 바위 앞에 기둥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었다.
ⓒ 이완우
 
족보 바위 앞 양쪽에 사암을 사각 기둥으로 깎아 다듬어 세우고 그 사암 돌기둥 위에 역시 사암으로 대들보를 올렸다. 그리고 거북바위와 이 사암 대들보 위에 팔작지붕 모양의 지붕돌을 올렸다. 족보 비석의 풍화 침식을 예방하는 지혜다. 이 족보 비석을 세운 분들의 정성과 순발력 창의성이 놀랍다.
예로부터 난리가 나면 가장 먼저 가문의 족보부터 소중하게 보관했다. 산기슭 외딴곳의 바위에 감실을 만들어 족보함을 넣어 봉해두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마을처럼 자연석 바위에 직접 족보를 새긴 세록비(世錄碑)는 정말 특별하다. 나라가 위기에 빠진 시기에 집안 내력의 뿌리를 자자손손 남겨서 다시 나라를 되찾고 가문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생명력과 희망으로 생생하게 느껴진다.
 
▲ 족보 바위 (측면) 족보 바위는 자연석 역암이고, 앞의 기둥은 사암을 사각 기둥으로 다듬어 세웠다.
ⓒ 이완우
 
땅속줄기 연근 속에는 푸른 하늘이 있다

물 빠진 연못 바닥에서 연꽃의 씨앗은 오랫동안 생명력을 유지한다. 진흙에 묻힌 연꽃 종자가 천년 넘게 휴면하다가 새싹을 틔우기도 했다. 우리가 식용하는 연근은 뿌리가 아니고 땅속줄기다. 연꽃의 생명력은 연근에서 활발하다. 연근은 수면 아래 땅속에서 계속 마디를 늘려가며 뿌리줄기를 키워간다.

연근을 가로로 자르면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관이 보인다. 연잎이 공기를 흡수하면 잎자루를 통해 연근의 관으로 공기가 전달된다. 겨울철 진흙 속에서도 연근은 공기가 저장되어 있어 부패하지 않고 휴면 상태를 지속할 수 있다. 땅속줄기 연근은 마디마다 항상 푸른 하늘을 품고 있다.

조선 시대에 족보가 가문의 세력을 과시하거나 출세의 방편이 되는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족보는 선조와 후손을 이어가는 정체성의 확립과 자긍심의 전승이다. '蓮花萬世樂園' 연화실 마을의 연꽃과 경주이씨 세록비(慶州李氏 世錄碑) 족보 바위는 앞선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생명력과 희망이다.

여름에 연꽃이 활짝 핀 계절에 쉰재를 넘어 연화만세낙원(蓮花萬世樂園) 연화실로 다시 가보고 싶다. 고개 마루에 올라서면 마음은 나비가 되어 푸른 하늘로 날아오른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어화 좋다 어화 좋아 고갯길 넘어 어느 마을을 찾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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