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인과 조선사절단 김홍집의 극적인 만남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자말>
[김선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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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우가 7월 1일 동료이자 절친 아스턴(Aston:당시 고베 주재 미국 총영사관 근무)에게 보낸 편지에 조선 사절단이 처음 언급됩니다.
편지를 살펴보기 전에 잠깐 이동인이 당시에 처해 있던 상황을 짚어 봅시다. 그는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밀출국범입니다. 더구나 천민에 속한 일개 승려가 외국인과 밀통하여 국사를 논하고 있으니 그 죄가 더욱 엄중합니다.
상식에 비추어 보면 본국의 고관이 온다면 피신을 해야 할 것입니다. 발각되면 압송될 거니까요. 헌데, 공교롭게도 조선의 사절 김홍집은 이동인이 묵고 있던 숙소 아사쿠사에 체류하게 됩니다. 정부 고관과 국사범이 한 지붕 아래 있게 된 셈이죠.
과연 이동인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숙소를 벗어나 피신하였을까요? 아니면? 이제 사토우 문서를 살펴보겠습니다. 행간까지 보기로 합시다.
7월 1일자 편지에서 사토우는 이동인이 "한두 달 정도 잠깐 조선에 다녀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 다음 달에 조선에서 사절단이 오게 되면 귀국이 늦어질 것 같다( ..he talks of paying a flying visit to his own country. Perhaps the arrival of the Korean envoy next month may delay him)"고 이동인의 동향을 언급합니다.
그로부터 18일 후인 7월 19일자 편지에서는 "이동인이 귀국을 하려고 하므로 이 달 말에 그를 놓칠 것 같다( I shall lose him at the end of this month, as he is going back to his country,)"고 하면서 "그는 틀림없이 이 해가 가기 전에 여기로 돌아 올 것(He will no doubt return here before the end of the year)"이라고 전합니다.
이 두 편지로 보아 이동인은 원래 한국을 잠시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사절단이 온다는 소식에 귀국을 늦추고 사절을 만날까 고민하다가 다시 원래대로 귀국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으로 보입니다. 번민을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헌데, 7월 28일자 편지에는 "그 조선인은 금주에 (출국을 위해) 고베로 가려고 했으나 생각을 바꾸어 사절단이 도착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The Korean was going this week to Kōbe, but has changed his mind and will wait until the arrival of the envoy" 고 전합니다. 고민 끝에 사절을 만나기로 결심을 굳힌 것입니다.
나아가 8월 4일자 편지에는 "이동인의 움직임은 거의 전적으로 조선 사절단의 동선에 달려 있다(His movements depend very much on those of the Korean envoy)"고 평합니다. 이는 이동인이 사절단의 뒤를 밟으면서 접촉 기회를 탐색하는 정황을 암시합니다. 사절단은 이 날 8월 4일 오전 10시경에 고베에 입항했습니다.
"조선의 대사(ambassdor)가 도착했다. 아사노(이동인)는 하루 이틀 전까지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내게 왔다. 우리는 조선어 소설 한 권을 뗐고 다른 한 권을 시작했다. 한글이 이제 나에게 매우 친숙하다. 동사 변화가 복잡한 건 사실이지만 매일 쉬워지고 있다. 관용구는 일본어와 매우 흡사하다. 이건 별로 이상할 게 없다. 두 언어가 한문에서 관용구를 빌려 왔기 때문이다(The Korean ambassador arrived. Asano has been with me daily for the last month up to a day or two ago. We have read the whole of one Korean novel & begun another. The character is now quite familiar to me and the grammar of the verb, complicated as it is, becomes daily easier. The resemblance in idiom to Japanese is very close, but hardly to be wondered at, since both languages have borrowed their idioms chiefly from the Chinese.)"
같은 날 서한에서는 "아사노(이동인)는 오늘 아침 동경에 도착한 조선 사절과 면담할 수 있을지 여부를 확인하기 전에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Asano will not leave until he has ascertained whether he can have an interview or not with the Korean envoy who arrived this morning)"라고 전합니다.
이처럼 사토우 문서는 처음에 망설였던 이동인이 7월 28일 경에는 사절을 만나기로 결심하고, 사절이 도착한 후부터는 그 이동경로를 예민하게 살피면서 만날 기회를 탐색하고 있던 정황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동인의 번민과 고뇌가 담대한 결단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엿보게 됩니다. 한국인 독자 여러분, 어떤 느낌이 드세요? 나 조지 포크는 미국의 군인이었지만 이동인의 이러한 용기와 사명감에 감동을 느낍니다.
사토우가 일기에서 '대사(ambassador)'라고 지칭한 조선 사절은 38살의 김홍집이었습니다. 한국 역사에서는 수신사라 불리는 것 같군요. 여기서는 그냥 사절이라 부릅니다.
김홍집의 수행원은 이조연. 강위.운융렬 등 58명이었습니다. 강위와 윤웅렬은 이동인이 속해 있던 개화당입니다. 강위라는 인물은 당시 개화파들이 유대치와 함께 스승으로 모시는 인물이라고 이동인이 언급한 바 있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윤웅렬(윤치호의 부친)은 이동인이 사토우에게 소개하여 같이 점심을 하게 됩니다.
사절단은 8월 11일에 도쿄에 도착해서 9월 8일까지 약 한달 간 머물렀지요. 현안은 한일 관세 협정, 미곡수출금지, 인천개항건을 일본과 협의하는 거였구요. 이들 쟁점에 대해 일본 측과 강하여 맞서고 있어서 당시 김홍집으로서는 매우 어려운 처지였습니다.
한편 이동인 입장에서는 현지 사정이나 외교경험이 일천한 김홍집을 만나 자신의 식견과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호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매우 위험한 도박이었지요. 잘 되면 천재일우의 기회가 될 수도 있지만, 잘 못 되면 압송되어 극형에 처해질 수도 있을테니까요.
이동인과 김홍집의 극적인 만남을 우리는 재현해 볼 수 있습니다. 이동인이 1880년 9월 28일 직접 일본 승려 오쿠무라 엔신에게 설명한 내용이 전해오기 때문입니다.
결심이 선 이동인은 먼저 하나부사와 스즈키를 만났습니다. 하나부사는 강화도조약 후 조선주재 초대공사로 임명된 고위 외교관입니다. 서울에 아직 일본 공사관이 없을 때인지라 하나부사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일을 보고 있었지요.
▲ 일본 전통 가옥. |
ⓒ elements.envato |
한편 스즈키는 다름 아니라 이동인과 김홍집이 묵고 있는 아사쿠사의 주인이자 고위 승려입니다. 스즈키는 김홍집을 극진히 환대하고 입 속의 혀처럼 서비스를 제공해서 김홍집이 내심 감동하고 있었지요. 이 두 사람을 이동인이 같이 만난 자리에서 김홍집과의 면담을 주선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동인(이동인 스님)이 말하기를, 내가 일본에 들어온 것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부처님의 은혜에 부응코자 한 것임에, 나라를 위해서라면 어떠한 일도 우려하지 않으니 바라건대 수신사를 만나 뵙도록하여 달라고 하다. 이에 하나부사. 스즈키 모두 탄복하여 수신사와 면회토록 하였다."
이동인과 김홍집의 역사적인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그 현장을 들여다 봅니다.
이동인은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일본의 승복을 입고 김홍집 앞에 나타났습니다. 장소는 아사쿠사의 어떤 방입니다. 이동인은 일본 승려 아무개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첫 대화를 시와 문장으로 열어갑니다. 중국 고전과 시문에 박식한 이동인이 그걸 무기로 접근한 것이지요. 김홍집 또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에 속했으므로 이동인과의 대화가 즐거웠을 것입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자 이동인은 화제를 슬슬 시사 문제로 옮겨 갑니다.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일본 정세를 설명한데 이어 조선의 실상과 장래 나아갈 방향에 이르자 열변을 토합니다. 김홍집은 감탄을 하면서 듣다가 불현듯 의심이 듭니다. 어, 이 중이 조선 정세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고 있지?
이동인은 그 순간을 놓칠세라 실수를 가장하여 조선말을 흘립니다. 유창한 조선말이 흘러나오자김홍집이 더욱 놀랍니다. 이 자의 정체가 뭐야? 조선말을 어떻게 이렇게 잘 하지? 그 순간 이동인이 "무릎을 가까이 하여....." 자신의 밀항을 이실직고하고 뜨거운 눈물로 진심을 토로합니다.
이에 김홍집은 "한편으로는 놀랍고, 한편으로는 기뻐서,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의 뜻을 칭찬하고,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이 훌륭한 남아가 있었던가 하고 부르짖었다"고 합니다(출처: 일본의 <朝鮮開敎五十年誌조선개교오신년지> p.141).
보다시피 이 장면은 어떤 영화나 드라마보다도 더욱 극적입니다. 이동인의 유창한 일본어, 높은 식견, 일본과 세계의 대세에 대한 깊은 통찰력 그리고 조선의 장래에 대한 달견에 김홍집이 탄복했다는 기록은 의심할 나위가 없어 보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이동인을 모셔가(?) 임금에게 소개했을 리가 없었겠지요.
이동인을 조선에 데려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을 보면 김홍집도 보통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동인이 범죄자라는 점이 무척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귀국시에는 서로 노선을 달리하게 됩니다. 코베까지는 같은 배로 이동하지만 거기에서부터 서로 다른 배를 탑니다. 김홍집은 부산으로, 이동인은 원산으로.
"당시의 국제관계로 보아 이동인의 주장(영국 우선론)은 김홍집(미국 우선론)보다 훨씬 현명한 것이었다. 영국이 그때 조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는 제쳐놓고라도 러시아의 남하를 악착같이 막으려는 나라는 영국이었다. 1885년 영국이 남해의 요충지 거문도를 점령한 것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려던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따라서 미국의 소극적인 불간섭주의보다는 러시아의 남하를 방관하지 않을 영국과 친교를 맺자고 주장한 것은 현명한 것이었고 또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국제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동인은 국왕에게까지 수차 주장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김홍집 등은 그러한 실정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상의 몇 가지 사실이 작용하여 김홍집 등은 이동인을 모살 한 것 같다." (<이광린, <개화당 연구>)
이동인과 김홍집, 이 두 사람의 극적인 만남이 이루어 진 뒤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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