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이이제이 방략을 시도한 최초의 조선인

김선흥 2021. 2. 8.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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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의인, 조지 포크] 한국 근대사를 다시 쓰게 하는 사토우의 문서

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 <기자말>

[김선흥 기자]

- 이전 기사 미일 협력으로 조선을 희생시킨 최초의 전쟁에서 이어집니다. 

조지 포크예요. 지금 우리는 이동인 스님을 살펴보는 중입니다.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좀 길어지고 있지만 좀 더 파 보겠습니다. 앞으로 이어갈 이야기와 맥락이 닿아 있기도 하니까요. 이를테면 1883년 가을 미국을 최초로 방문한 민영익만 해도 이동인 스님과 관계가 깊지요. 조선에서 이동인에게 자신의 사랑방을 내주었을 뿐 아니라 고종 임금에게 이동인을 천거하였으니까요. 그이 말고도 내가 조선에서 가까이 지냈던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윤치호 등의 초기 개화파들도 직간접적으로 이동인 스님의 영향을 받았죠.

근래까지 알려진 이동인에 대한 일차기록은 그 대부분이 일본인이 남긴 것입니다. 헌데, 여기에는 두 가지 함정이 숨어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이동인이 일본인에게 계략적으로 거짓을 말한 내용이 들어 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인들이 제한된 정보에 기초하여 자기중심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신빙성이 떨어지므로 일본 자료는 거리를 두고 보아야 합니다.
 
ⓒ elements.envato
 
그와는 대조적으로 영국 외교관 사토우 문서(일기와 편지)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동인이 가장 흉금을 터 놓고 많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던 대상이 사토우였기 때문이죠. 또한 사토우는 자신의 일기나 편지에 왜곡하여 기록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사토우 문서야말로 여러 억측과 풍문, 왜곡과는 달리 가장 믿을 수 있는 가늠자인 셈이죠.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1879년 봄 이동인은 일본의 외교관 하나부사에게, "일본의 조선 무역은 근래 크게 융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십중팔구는 서양 상품이다. 서양의 목면이 가장 인기가 높다. 지금 만약에 두 세 명의 서양인이 와서 무역을 한다면 조선의 상인은 모두 그 상품을 구입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인이 하는 장사는 당장 없어질 것이다. 지금 서양인은 타인이지만 일본인은 형제다. 나는 타인인 서양인에게 이익을 얻도록 하는 것보다 형제 사이인 일본인과 이익을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는 하나부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매우 친일적인 언사만 보면, 어, 이동인 친일 원조 맞네! 할 겁니다.

하지만 이동인이 다음해 봄 사토우에게 한 말은 딴판입니다.

"일본인들은 조선에서 인기가 없다. 16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불의한 침략을 저질렀기 때문이다. 많은 원산 주민들이 일인들 꼴이 보기 싫어서 고향을 떠났다고 한다. 일본무역은 완전히 서양 상품으로 되어 있다. 만일 다른 나라들(일본 아닌 서양국가)이 조선과 통상관계를 갖는다면 일본의 무역은 사라질 것이다. 영국은 조선과 통상하기를 원하는지?"- 1880.5.15 사토우 일기.

이처럼 이동인은 동일한 문제에 대하여 하나부사와 사토우에게 상반된 이야기를 합니다. 과연 어느 쪽이 진심일까요?

이동인이 나라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후자가 진심일 것입니다. 왜냐면 당시 일본 상인이 파는 물건은 대부분 영국제였고 그 중에서도 옥양목이 조선의 부자들에게 인기였습니다. 일본 상인은 폭리를 취하고 조선인들은 출혈을 했던 거지요. 일인들이 독점하고 있던 무관세 무역이 조선 경제에 큰 타격을 주고 있는 상황을 이동인은 잘 알고 있었으며 그 해결책을 영국에서 찾고 있었던 것이지요.

만일 이동인이 하나부사에게 말했던 것처럼, 서양을 배제하고 일본과만 통상하기를 원했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영국 외교관을 비밀리에 접촉하여 통상을 권유할 필요가 어디 있었겠어요? 달리 말하면, 이동인은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한다'라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략을 시도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으로 일본을 제압하여 조선을 이롭게 한다는.

이처럼 사토우의 문서에는 개항초의 조선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단서와 증거들이 들어 있어서 그 가치가 더욱 큽니다. 이를테면 조선의 초기 개화파가 일본의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 비로소 문명개화에 눈을 떴고 그의 지도에 따라 행동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토우 문서로 허물어집니다. 조선의 초기 개화파들이 일본인들을 접촉하기 훨씬 전부터 독자적이고 능동적으로, 나름의 구상하에 활동하고 있었음을 사토우 문서가 확인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동인은 아무리 늦어도 1878년에는 영국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음을 사토우 일기가 증언합니다.

이동인의 안목은 당시 개화당 요인들 사이에 어느 정도 공유되고 있었다는 증거도 드물지 않습니다. 좀 후의 일이지만 김옥균은 1882년 10월 일본을 빙문했을 때 거기에서 유학하고 있던 윤치호에게 "일본말만 배우지 말고 영어를 배워야 일본을 경유치 않고 서양문명을 직수입할 수 있다"고 권고했습니다.

윤치호, 유길준 등의 일본 유학도 알고 보면 이동인이 1880년 말 고종임금에게 주청하여 실현된 것입니다. 그 덕분에 윤치호는 최초의 영어구사자가 되었고 초대주한 미국공사의 통역으로 일하게 되지요. 내가 1884년 5월 서울에 부임해 보니 젊은 윤치호가 우리 미국 공사관에서 살고 있더군요.

1880년 즈음 이동인.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들이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범으로 삼아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맹목적인 추종과는 달랐습니다. 일본을 따라 잡고 넘어서기 위해서는 가까운 일본에서 배울 수 밖에 없고 되도록 속히 배우는 길 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고 확신했던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누구의 조정을 받아 움직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고뇌하며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 길잡이자 기수가 이동인 스님이었구요. 이동인 탐구는 오늘날 한국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역사를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이끌 것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880년 8월 조선 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함으로써 이동인 스님의 운명이 급변하게 됩니다. 이제 그 시공간을 여행해 볼 참입니다.

-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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