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미스터리..민심 얻고도 군부 앞에선 작아지는 수지 왜
독립운동가들 일본군 훈련받고
영국 대항하다 건국 과정 주도
아웅산, 초대총리, 군부독재자까지
모두 버마독립군 결성 '30인 동지'
독립과 정부수립, 쿠데타에 연루
군, 소수민족 무장투쟁 속 세력 키워
135개 다민족 갈등과 분쟁 끝없어
민주화 탄압 8888사건, 로힝야 압박
모두 군부가 앞장선 반인륜 범죄
수지 집권 뒤 척결 대신 공생해와
국민 민주화 의지, 현실 모두 봐야
외세, 이익만 따져 사태 도움 한계
의아한 건 시점이다. 군부는 2015년 11월 총선에서 승리한 아웅산 수지의국민민주연맹(NLD·민족민주연맹으로 번역하기도 함)이 2016년 3월 민간·민주 정부를 수립한 지 5년이 경과한 지금 쿠데타를 일으켰다. 국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 민간 정부는 이를 막을 수 없었을까. 미얀마 군부는 민주정치가 시작된 지 5년이나 지난 지금 어떻게 쿠데타를 벌일 정치적 자신감과 힘을 갖출 수 있었을까. 이를 알아보는 것은 미얀마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되고 해법 마련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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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이어 2020년 총선서도 NLD 압승
NLD가 집권한 지난 5년 동안 민심은 수지 국가고문 겸 외교부 장관과 NLD를 떠나지 않았다. 지난해 11월 실시한 총선에서 NLD는 하원(국민대표원) 의석 440석의 58.6%인 258석을, 상원(민족대표원) 의원 224석의 61.6%인 138석을 각각 차지했다. 상·하원에서 각각 3석을 늘렸다. 미얀마 군부의 후원조직으로 시작해 2010년 정당이 된 연방단결발전당(USDA)은 하원에서 26석, 상원에서 7석으로 각각 4석을 잃고 더욱 위축됐다. 미얀마 유권자의 뜻은 이처럼 확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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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 앞에만 서면 약해지는 수지
하지만 수지 고문과 NLD는 지난 5년간 국민 지지를 등에 업고도 군부에 손대지 못했다. 오히려 수지 고문은 2019년 12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증인으로 출석해 군부가 벌인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학살과 박해를 변명해 1991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서의 명예에 스스로 흠집을 냈다. 미얀마 정부와 군은 로힝야인을 소수민족으로도 인정하지 않고 라카인 이탈자로 부른다.
왜 이렇게 수지 고문마저도 군부 앞에만 서면 꼼짝을 못하는 것일까. 거기에는 미얀마와 미얀마군 사이의 뿌리 깊은 역사가 자리 잡고 있다. 미얀마에서 군은 행정부의 산하 조직이 아니라 국가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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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군, 항영 독립 투쟁과 건국 주역으로
미얀마군의 전신으로 1943년 아웅산이 창설한 버마 독립군(BIA)는 1940년대 항영 독립운동은 물론 1948년의 정부수립을 주도했다. 1962년 군부 쿠데타 이후 2015년 민주정부 수립까지 53년 동안의 군사 독재 기간에는 정치의 등뼈로 군림해왔다. 아울러 독립 이후 지금까지 70년 넘게 계속된 내전 종족 분쟁에서 국가 통합과 질서를 확립한 주체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미얀마와 미얀마군을 민주주의와 독재, 민정과 군정, 친서방과 친중 등의 단순한 잣대로 재단하기는 힘들다. 복잡하고 해결하기 쉽지 않은 미안마의 내부 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미얀마는 1824년 제1차 미얀마-영국 전쟁 패배로 국토 일부를 영국에 빼앗긴 뒤로 전쟁에 두 차례 더 패했다. 결국 1885년 콘바웅 왕조(1752~1885년)가 무너지고 전국이 영국 식민지가 돼 1948년 독립까지 123년간 지배를 받았다.
충성 대상이던 왕조가 사라지고 식민지 시대가 시작되면서 미얀마는 종족·지역·종교별로 조각이 났다. 현재까지도 계속되는 분열과 갈등의 시작이었다. 북부의 일부 종족은 식민 지배를 거부하며 저항했으며 영국이 마을과 농토를 철저히 파괴하면서 보급을 끊으면서 게릴라 항전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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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미얀마를 ‘식민지의 식민지’로 경영
영국은 미얀마를 지배하면서 1826~1862년은 영국령 벵갈 식민지의 한 주로, 1862~1937년은 영국령 인도 식민지의 한 주로, 1937년부터 1948년 독립까지 영국 직할 식민지로 운영했다. 대부분의 영국 지배 동안 미얀마는 ‘식민지의 식민지’의 지위였던 셈이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2~1945년 미얀마는 일본의 지배를 받았다. 전쟁 뒤 돌아온 영국 세력은 결국 협상 끝에 1948년 유니언 잭을 내리고 떠났다.
영국은 미얀마를 식민지 신분사회로 만들었다. 우선, 영국인을 비롯한 유럽인이 최고 지배계급을 형성했다. 혼혈인과 다른 식민지에서 데려온 인도·중국인,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미얀마인에게 행정사무·하급군인·경제를 맡겨 중간 계층을 형성하도록 했다. 불교도 미얀마 농민은 최하위층이 됐다.
농민들은 영국 기업과 영국인 지배계층을 위해 상업작물 재배에 내몰렸다. 영국은 1869년 11월 수에즈 운하가 개통돼 남아시아와 유럽과의 거리가 단축되자 미얀마를 유럽에 수출할 환금작물인 쌀의 생산기지로 삼았다. 미얀마가 한때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으로 기록된 이유다. 쌀이 먹고 남아 수출한 게 아니라 수출을 위해 광범위한 지역에서 단일 작물로 재배해야 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초기 저항은 불교 승려가 주도했다. 시위를 주도했으며 감옥에서 단식 투쟁을 하다 숨진 경우도 있었다. 당시 영국에 혹독하게 당한 경험 때문에 미얀마는 독립 이후 영연방에 가입하지 않은 것은 물론 적극적으로 영국 지우기 운동에 나섰다. 이는 반외세 운동으로 발전했으며 냉전 시절 미국도 소련도 따르지 않고 중립을 지킨 이유로 작용했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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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 청년 ‘30인의 동지’ 일본군이 군사훈련
미얀마의 독립운동은 1930년대 이후 학생과 지식인들이 중심이 됐다. 청년들이 식민지 현실을 자각하고 독립운동에 나섰다. 당시 결성된 무장독립군 ‘30인의 동지’가 독립운동뿐 아니라 새 공화국 수립도 주도했다. 독립영웅으로 아웅산 수지 고문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1915~1947년), 미얀마 초대 총리를 지낸 우 누(1907~1995년), 1962년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1981년까지 통치한 네 윈(1910~2002년)까지 ‘30인의 동지’ 소속의 청년 독립운동가였다. 미얀마는 독립운동가가 건국한 나라다.
이들은 1930년에 결성된 미얀마 반영조직 ‘우리 버마 협회(도바마 아시아요네· 주인이라는 의미의 타킨스라고도 부름)’에서 활동했다. 타킨스에서 활동하던 청년 회원 중 30명은 접근한 일본인을 통해 1941년 중국 남부 하이난(海南)섬으로 갔다. 이들은 당시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이곳에서 일본군으로부터 군사 훈련을 받으면서 ‘버마 독립군(BIA)’의 토대를 만들었다.
이들을 선발해 훈련을 시킨 주체는 일본군이 미얀마의 영국 세력을 약화하기 위해 운영한 특무기관(공작기관)인 미나미키칸(南機關)의 책임자인 스즈키 케이지(鈴木敬司·1897~1967년) 장군이었다. 일본군이 공작 차원에서 훈련시킨 이 청년들은 ’30인의 동지‘로 불리며 미얀마 독립 전후 핵심 세력이 됐다. 이들의 지도자가 바로 아웅산이었다. 이들은 1942년 일본군이 미얀마를 침공하면서 함께 귀국했지만, 일본군이 점령군으로서 호되게 굴자 일본군과도 교전을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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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인의 동지’, 버마독립군 결성하고 건국도 주도
아웅산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뒤인 1946년 1월 ‘30인의 동지’가 주축이 된 ‘파시스트 인민자유 연맹(AFPFL)’을 창당하고 대표를 맡았다. 독립 직전인 영국령 미얀마(당시는 버마)의 총리를 맡아 영국과 독립 협상을 벌였다. 하지만 독립 직전인 1947년 7월 의문의 폭탄 테러로 숨졌다. 범인이 누구였는지는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1948년 1월 4일 ‘버마 연방’으로 독립한 미얀마는 아웅산의 동료인 우 누가 총리를 맡아 이끌었으며 AFPFL은 집권당이 됐다. 실권 없이 상징적 자리였던 대통령은 소수민족인 샨족의 세습지도자인 사오 슈웨 타익(1895~1962년, 대통령 1948~1962년, 상원의장 1952~1960년)가 맡았다.
물이 고이면 썩게 마련이다. 그 뒤 우 누가 장기 집권하면서 집권당인 AFPFL 내에서 분열과 권력투쟁이 벌어졌다. AFPFL은 독립 직전인 1947년과 독립 뒤인 1951~1952년, 1956년 선거에서 승리해 안정적으로 정권을 운영했다. 하지만 1958년 1월 내부 분란으로 AFPFL은 우 누의 ‘청렴AFPFL’과 반대파의 ‘안정AFPFL’로 분열했다. 하원에서 숫자는 반대파가 더 많았지만 우 누는 야당의 지원으로 간신히 버틸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군이 개입했다. 군부는 1958년 ‘선거관리 내각’을 구성해 1960년 선거까지 18개월간 국정을 맡기로 했으며 네 윈이 총리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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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30인의 동지’ 출신 우 누 정권을 네 윈이 쿠데타로 전복
1960년 총선에서 우 누의 청렴AFPFL이 57%를 득표해 하원 250석 중 158석, 상원 125석 중 53석을 차지했다. 우 누의 정치적 승리였다. 다시 총리가 된 우 누는 당의 이름을 연방당으로 바꿨다. 우 누는 총선에서 불교를 국교로 삼겠다고 공약해 승려들의 지지를 확보했으며 몬 족과 라카인 지역 소수민족의 자치를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이 선거에선 아웅산의 형인 아웅탄이 만든 야당인 국민통합전선(NUF)이 37% 득표를 하면서 우 누에 맞섰다.
민간 정부가 다시 강력한 힘을 회복하자 네 윈이 이끄는 군부는 1962년 쿠데타로 집권했다. 네 윈도 ‘30인의 동지’의 한 명으로 독립운동가이자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었다. 독립운동가들끼리 권력을 둘러싸고 싸운 셈이다.
군부는 쿠데타 당시 정부의 부패와 무능을 명분으로 내걸었으며 범죄율이 오르는 상황에서 버마 사회의 법과 질서 회복을 위해 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군사 정권은 1964년 일당 독재를 시작하면서 집권당이던 연방당과 야당인 국민통합전선도 모두 사라졌다.
군부는 국호인 ‘버마 연방’을 ‘버마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바꿔 1988년까지 유지했다. 연방이란 용어가 소수민족에 지나치게 양보한 용어로 인식해 싫어했다는 설명이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 진압은 미얀마군의 존재 이유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 군은 과거 식민지와 독립 운동 시절은 물론 건국 뒤에도 계속 상당한 힘과 국민 지지를 얻어왔다. 가장 큰 이유가 독립 직후부터 벌어진 소수민족의 무장 분리운동과 내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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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분쟁으로 군부 입김 강해져
미얀마에 소수 민족·종족 분쟁이 장기간 벌어진 이유는 첫째, 미얀마가 내부적으로 복잡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둘째, 1885년 콘바웅 왕조가 무너지고 이들을 하나로 이어주던 끈이 사라지면서 같은 나라 국민임을 자각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재 5300만 인구의 미얀마는 버마인(68%)·샨인(9%)·카렌인(7%)·라카인인(4%)·몬인(2%)을 포함해 공식적으로 135개 민족·종족으로 이뤄진 다민족국가다. 버마인과 카렌인은 중국티베트계 언어를 사용하고, 샨인은 타이계 언어를 몬인은 몬-크메르 계열의 언어를 사용한다. 소수 민족·종족 가운데 특히 국경지대에 사는 집단은 별도 독립을 주장해 독립 직후부터 내부에서 갈등과 분규, 그리고 무장 투쟁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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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종족 분쟁으로 독립 이후 줄곧 내전상태
중국과 접경한 북부 카친 주에서는 기독교도인 카친인들이 불교도가 대부분인 버마인과 종교 분쟁을 벌여왔다. 카치인들은 카친 독립군을 결성해 무장 투쟁을 계속 벌이고 있다. 카친 주 남쪽의 샨 주에서는 샨족이, 샨 주 남쪽으로 태국과 접경한 카에 주에서는 카레니인들이, 그 남쪽인 카인 주에서는 카렌인(카레니인과 다름)들이 각각 독립을 주장한다.
방글라데시·인도와 접경한 서부 라카인 주의 북부와 친 주에서는 친인들이 역시 중앙 정부에 대항한다. 1948년 독립 이후 미얀마에서 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조사 주체에 따라 13만~25만으로 추정한다. 주민 60만~100만 명이 집을 잃고 떠도는 것으로 추산된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학살과 인권유린, 소년병, 인신매매 등 많은 문제가 발생해왔다.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양산한 미얀마군과 정부의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박해와 추방은 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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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진압하고 치안 유지하느라 군부 비대화
소수민족의 저항에 대응하기 위해 미얀마는 내란 평정과 치안 유지를 위해 독립 직후부터 많은 군사비를 지출하며 군을 키워왔다. 군에는 예산과 인재가 몰렸다. 이는 1962년 쿠데타의 한 원인을 제공했으며, 2015년까지 계속된 군부 통치의 물적 토대가 됐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따르면 미얀마는 현재도 세계 11위인 40만6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선 베트남(48만2000명) 다음으로 규모가 큰 군대다. 가난한 나라에서 비대한 군대가 자리 잡으면서 정치와 군대의 불안한 동거가 계속돼온 셈이다.
이런 군을 등에 업고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네 윈은 1962~1974년 혁명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1974~1981년 대통령을 맡았으며 1962~1988년 일당독재 정당인 버마 사회주의계획당 대표를 지내며 미얀마를 철권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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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공산주의 융합한 네 윈의 불교 사회주의
네 윈은 버마족과 불교를 우선하는 ‘버마식 사회주의’ ‘불교 사회주의’를 국정철학으로 내세웠다. 버마식 사회주의는 배타적이고 쇄국을 추구하는 민족주의, 불교 철학을 멋대로 해석한 현세의 욕망에 대한 자제,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편의에 따라 혼합한 네 윈의 국정철학이다. 그의 정책에는 일당독재, 외국인 추방, 해외관광객 사절, 대외교역 단절, 엄격한 고립과 쇄국주의, 산업 국유화, 소수민족 억압 등이 포함됐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고립주의, 주류민족 우선주의를 결합한 기묘한 형태다.
이러한 정책은 민주주의·인권 억압과 경제 파탄을 불렀다. 개인 소유 토지를 몰수하고 농촌을 집단 종장으로 재편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모든 기업과 부동산은 국가 소유가 됐다. 도시의 작은 가게까지 모두 국가 국영으로 운영하고 가게 이름에는 번호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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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가 무슬림 로힝야인 탄압 원조
불교사회주의를 내세운 네 윈은 무슬림 로힝야인에 대한 탄압의 원조이기도 하다. 대다수 미앤마인과 달리 인도유럽계 무슬림(이슬람 신자)으로 서부 라카인 주에 거주하는 로힝야인은 미얀마의 135개 공식 소수민족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1982년 군부 통치 시절 군부가 만든 국적법에서 국민 기준을 ‘영국 통치 이전부터 거주한 민족’으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군부는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겼다. 19세기 인도 동부 벵갈 지역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들을 국민에서 제외되고 추방해야 할 ‘식민 잔재’로 분류됐다. 하지만 로힝야족은 자신들이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의 토착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군사정권 이전엔 선거에도 참여했음을 강조한다. 국경 넘어 방글라데시의 동남부 치타공과 콕스바자르 지역 주민과 언어가 70~80% 통한다. 방글라데시의 표준어인 벵갈어로는 의사소통이 어렵다.
군사정권은 1978년 ‘외국인’이라며 로힝야인 20만 명을 강제로 국경 너머 방글라데시로 밀어냈다. 1991~92년엔 25만 이상을 다시 쫓아냈다. 아웅산 수치가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2015년 다시 탄압과 추방을 재개해 인도주의 재앙이 벌어졌다.
로힝야 탄압은 근본을 살펴보면 군부독재의 잔재 성격이 강하지만 민주화 이후에도 개선은커녕 더욱 심해졌다. 그 이유에 대해 일본 NHK 방송은 “민주화 과정에서 불교와 연결된 미얀마 민족주의가 힘을 얻어 다수파의 소수파 탄압으로 이어진 것이 더 큰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이제는 군부 대신 민주화 주도 세력이 배타적인 민족주의 세력으로 변해 로힝야인 탄압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이다. 아사히신문은 “일부 과격 불교 민족주의 단체가 민주화 이후 배타적인 이슬람 차별 운동을 벌이면서 로힝야인을 테러리스트로 오도하고 있다”로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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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88운동으로 미얀마 민주화 운동 점화
불교 사회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던 미얀마 민중은 1988년 8월 8일 당시 수도 랑군(양곤) 등지에서 대학생·승려·시민이 100만 명 이상 참가해 군부 독재와 버마식 사회주의 실패, 부패, 경찰 폭력 등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군부가 이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8888 사건이 벌어졌다. 사망자는 300명에서 1만 명까지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어머니의 위독으로 미얀마에 돌아와 있던 국부 아웅산의 딸 아웅산 수지는 자연스럽게 민주화 운동의 구심점으로 자지 잡았다. 수지는 부친 암살 뒤 어머니와 함께 해외에서 거주하며 영국 옥스퍼드대를 마치고 미얀마인 우 탄트(1909~74년, 재임 1961~1971년)가 사무총장으로 근무하던 유엔에서 일했다. 1972년 영국인 역사 교수와 결혼해 남편이 근무하는 옥스퍼드에 거주하며 두 아들을 키웠다.
수치는 1989년부터 군사 정권에 가택 연금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군정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이끌어 1991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됐다. 노벨상을 받으러 출국할 경우 군사 정권이 귀국을 막을까 봐 국내에 머물렀으며, 남편과 두 아들이 대리 수상을 했다. 1995년 가택 연금은 해제됐지만, 군사정권에 의해 구금과 석방을 반복하며 민주화 운동을 계속 펼쳤다. 2010년 말 미얀마에서 20년 만에 총선이 실시되면서 비로소 석방됐으며 2012년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선해 정치에 진출했다. 같은 해 노르웨이로 가서 노벨평화상 수상 21년 만에 비로소 수락 연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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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 민주화 이후에도 군부와 공생 관계
수지는 2015년 총선에서 자신이 이끄는 국민민주동맹(NDL)이 승리하면서 외교부 장관을 맡았으며 국가 고문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사실상 최고 지도자 역할을 해왔다. 가족이 외국인이면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헌법 규정(민족주의를 앞세운 군부가 만들었다) 때문에 만든 편법 권력이다. 이를 통해 1962년 네 윈의 군사쿠데타 이후 53년간 이어졌던 군부 지배는 끝났지만, 군은 여전히 세력을 유지했다. 군사 정권 당시 제정한 헌법에 따라 군부는 선거와 무관하게 상·하원 의석의 25%를 할당받는 것은 물론 내무·국방·국경경비 등 3개 안보·치안 부처의 수장도 맡는다.
주목할 점은 쿠데타 직전 수지의 권력이 절정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NDL은 지난해 11월 8일 치른 총선에서 83%를 득표해 하원 의석 440석 가운데 315석, 상원에선 224석 중 161석을 차지하는 압승을 거뒀다.
군부와의 권력 균형을 깨고 민간 정부가 이를 누를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자 군은 선거 직후부터 유권자 수 3700만 명을 기재한 유권자 명부가 실제와 860만 명이 차이가 난다며 부정선거 의혹을 제기하다 급기야 쿠데타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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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군 민주화 이후에도 기득권 누려
미얀마에서 군부는 필요악인 셈이다. 군부는 복잡한 내정을 이용해 계속 기득권을 누려왔다. 수지 고문도 민주화 이후 군부와 결탁해 로힝야 탄압을 변호하며 자신의 권력을 누려온 셈이다. 서로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로 공생해왔다고 볼 수 있다.
미얀마는 민주화를 전후해 굵직한 인물들이 찾았다. 미국은 2012년 11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론 처음으로 미얀마를 방문해 정치 개혁 중이던 군부에 민주 선거를 통해 민간 정부에 권력을 이양하도록 설득했다. 2017년 11월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얀마를 방문해 미사를 집전하고 지도자들을 만났다. 국경지대에는 카친인 가톨릭 신자가 많이 거주한다.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지난해 첫 방문국으로 미얀마를 선택해 1월 17~18일 방문했다. 중국은 인도양 항구에서 시작해 미얀마를 관통해 자국 서남부 윈난(雲南)성 쿤밍(昆明)으로 이어지는 석유·가스관을 건설 중이다. 모두 동상이몽으로 미얀마를 찾은 셈이다.
종교인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제외하고는 자국 이익에 맞춰 미얀마를 바꾸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미국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미얀마 확산으로 세계의 민주주의 보루라는 국제적 이미지를 확산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수지 고문처럼 오바마 대통령도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 중국은 미얀마의 지정학적 이점에 관심이 많아 보인다.
미얀마 국민의 NDL과 수지 고문에 대한 지지와 군부의 역사적 성격을 동시에 이해해 합의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미얀마에 대한 내재적 접근이다. 한국에선 김영삼 대통령 시절 군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해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을 뿌리 뽑았다. 하지만 미얀마군은 독립군에서 시작한 조직이다. 척결 대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이다. 여기에 사태 해결의 어려움이 있다. 미국이 압박한다고 쉽게 물러날 군부가 아니다. 미국에는 그런 군부에 다른 방식으로 타격을 줄 수단도 없다. 오랫동안 고립국가였던 미얀마로선 미국의 제재도 군부를 압박하기가 쉽지 않다. 중국은 그 틈을 파고들려고 하고 있다. 사태는 갈수록 수렁으로 빠지고 있다.
미얀마에는 미얀마식 해법이 필요하다. 쿠데타가 역사를 되돌리는 상황을 막으려면 이제부터 협상과 대화, 그리고 외교가 필요하다. 미얀마는 2021년 글로벌 과제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쉽지 않은 상대가 미얀마다.
한국은 미얀마인 3만여 명이 일하고 공부하는 나라다. 호르무즈 해협의 이란 항구인 반다르아바스 항에 억압된 한국 선박의 선원 20명 중 11명이 미얀마인이다. 미얀마도 한국과 멀지 않다. 코로나 이전 미얀마는 한국 불교 신자들의 인기 순례지였고, 한국은 미얀마의 최대 관광객 송출 국가였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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