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춘화가 노래한 그곳, 달그림자마저 황홀하네

이돈삼 2021. 2. 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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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영암아리랑'의 본고장, 암각 매향비 반기는 영암 엄길마을

[이돈삼 기자]

 바위에 새겨진 엄길리 암각 매향비.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철암산 암벽의 좁은 통로 한쪽에 새겨져 있다.
ⓒ 이돈삼
 
매향비(埋香碑)는 대개 바닷가에서 나타난다. 다음 세상에서 미륵불의 세계에 태어날 것을 바라면서 향나무를 바닷가 갯벌에 묻고 세웠다. 어지러운 세상을 구원할 미륵의 탄생을 바라던 민중의식이었다.

하지만 이 마을은 달랐다. 바위에 새겼다. 기록으로 봤을 때 1344년(충목왕 원년)에 세웠다. 조성연대와 목적, 장소, 매향을 한 집단과 발원자 등이 적혀 있다. 글씨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새겨진 점도 별나다. 서호보건지소에서 연결되는 철암산(120m) 중턱의 바위 한쪽에 새겨져 있다.

마을사람들은 글자가 새겨져 있다고 '글자바위'라 불렀다. 전해지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옛날에 보물을 묻어두고, 그 장소를 바위에 적어뒀다. 하지만 나중에 해독할 수가 없었다.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물을 캐면, 액이 끼어 화를 당한다고 했다. 보물을 찾으려고 바위의 밑을 파던 사람이 천둥과 벼락에 놀라 도망갔다는 일화도 전한다.

엄길마을을 지켜준 매향비와 느티나무 
  
 엄길리 암각 매향비. 조성연대와 목적, 장소, 매향을 한 집단과 발원자 등이 적혀 있다.
ⓒ 이돈삼
 엄길리 암각 매향비와 안내판. 영암 철암산 암벽의 좁은 통로 한쪽에 음각돼 있다.
ⓒ 이돈삼
 
매향비가 세상에 알려진 건 20여 년 전이다. 주민들이 인근 영암군 서호면 청용리·장천리 일대에서 지석묘 발굴조사를 하던 전문가들에게 알렸다. 전문가들이 확인한 결과 바위에 석태가 많이 끼어 있을 뿐, 비문이 잘 보전돼 있었다. 자연암벽의 좁은 통로 한쪽 벽에 새겨져서 비바람도 피할 수 있었다.
전남도내의 매향비 가운데 시기도 가장 앞선 것이었다. 보물 제1309호로 지정됐다. 그동안 매향비가 마을을 지켜줬다고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엄길마을의 암각 매향비 이야기다. 행정구역은 전라남도 영암군 서호면 엄길리에 속한다.
  
 엄길마을 주민들이 당산제를 지내는 느티나무 고목. 마을 앞 들녘을 지키고 서 있다.
ⓒ 이돈삼
 영암 엄길마을의 당산나무와 정자. 마을 입구에 세워져 눈길을 끌고 있다. 그 뒤로 보이는 야산이 철암산이다.
ⓒ 이돈삼
 
마을에 암각 매향비만 있는 게 아니다. 마을 입구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큰 느티나무도 있다. 키가 20m를 넘고, 나무의 둘레가 8m를 웃돈다. 어른 대여섯 명이 두 팔을 벌려야 겨우 안을 수 있다. 수령 800여 년 됐다고 전해진다. 한눈에 봐도 위엄이 묻어난다. 당산나무의 정석을 보여준다.
오래전부터 마을사람들이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나무에 전해지는 이야기도 재밌다. 마을에 살던 한 아낙네가 날마다 이 나무 아래에서 아들의 과거 급제를 빌었다. 아들이 과거시험에 떨어지자, 나무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듬해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자, 활기를 되찾았다는 얘기다.
  
 넓은 들녘을 앞마당 삼아서 자리하고 있는 엄길마을. 엄길마을은 농사를 지으며 사는 전형적인 농촌이다.
ⓒ 이돈삼
 마을 입구에서 만난 마을주민들. 오른쪽이 '토박이' 길동댁 어르신이다.
ⓒ 이돈삼
 
"방구석에 있자니, 하도 깝깝해서 나왔소. 코로나 땜시 경로당에도 못 나오게 하고. 텔레비를 보는 것도 하루이틀이제, 날마다 어찌케 보겄소? 점심 묵고 나와서, 쩌리 한 바쿠 돌고 와서 이라고 앉아있소."

느티나무 아래에서 만난 길동댁(80)의 이야기다. 어르신은 엄길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라고 했다.

"쩌기 앞이 갯바닥이었어. 이쪽은 배들래라고 허고. 옛날에는 여그 앞에까지 바닷물이 출렁출렁했어. 지금은 다 농사짓는 땅인디…."

어르신이 말한 갯바닥은 갯벌을 가리켰다. 지금은 간척이 돼 농지로 바뀌었다. 갯골이 변해서 이룬 하천이 들녘을 가로질러 길고, 넓게 흐르고 있다. 배들래는 배가 드나든 포구라는 얘기였다. 지금은 지형으로 짐작할 뿐, 바다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철암산에서 본 월출산과 들녘. 하춘화가 부른 '영암아리랑'의 노랫말에 나오는 월출산 풍경이다.
ⓒ 이돈삼
 
엄길마을 앞바다의 대규모 간척은 일제강점 때 시작됐다. 당시 최고 갑부였고, 일제와 밀착돼 있던 현준호(1889~1950)가 주도했다. 친일의 대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영산강 간척사업권을 따낸 것이다. 자금도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로부터 지원받았다. 1949년 제방이 완공되고, 아버지 현기봉의 호를 따서 학파농장으로 이름 붙여졌다.
간척은 1961년 마무리됐다. 학파농장의 면적은 892만㎡로 드넓었다. 주민들은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간척하고 20년 뒤에 주민들에게 양도하겠다는 현준호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80년대 후반에 소작료 거부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지역의 농민운동이 치열했던 이유다.
  
 엄길마을의 수래정과 주변의 고목. 엄길마을회관 앞에 있다. 오래 전에 마을사람들이 모여 공부하고, 대소사를 논의하던 곳이다.
ⓒ 이돈삼
   
 수래정 앞에 있는 장동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전몽성과 몽진·몽태 3형제를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 이돈삼
 
마을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 또 있다. 마을회관 앞에 있는 정자 수래정은 전광정, 전광택, 전영택, 전종행 등이 강학을 했던 곳이다. 사람들이 모여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논의하기도 했다. 마을은 천안전씨 집성촌이다. 영암에서 동쪽은 문씨, 서쪽은 전씨라고 '동문서전(東文西全)'이란 말이 회자되는 것도 여기를 두고 한 말이다.

수래정 앞에 있는 장동사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전몽성(1561∼1597)과 몽진·몽태 3형제를 배향하고 있는 사당이다.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 참가한 전몽성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몽진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전몽태는 김완과 함께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지석묘군도 마을에 있다. 지름 5∼6m의 고인돌 2기를 중심으로 18기가 모여 있다. 오래전, 마을 어린이들의 놀이터였다. 농사일을 하며 땀을 흘린 어른들의 쉼터이기도 했다.

월출산 천황봉에 달이 떠오르면 
  
 영암기찬랜드에 세워져 있는 하춘화의 '영암아리랑' 노래비. 엄길마을에서 나고 자란 이환의가 노랫말을 썼다.
ⓒ 이돈삼
 
엄길마을을 얘기하면서 이환의(1931~2021) 전 문화방송 사장도 빼놓을 수 없다. 전북도지사, (주)문화방송·경향신문 사장, 국회의원을 지냈다. 대학가요제, 명랑운동회, 수사반장 등을 통해 지금의 MBC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춘화가 부른 '영암아리랑'의 노랫말을 직접 쓰고, 하춘화의 든든한 뒷배도 돼 줬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둥근 달이 뜬다/ 월출산 천황봉에 보름달이 뜬다/ 아리랑 동동 쓰리랑 동동/ 에헤야 데헤야 어사와 데야/ 달을 보는 아리랑 님 보는 아리랑// 풍년이 온다 풍년이 온다 지화자자 좋구나/ 서호강 몽햇들에 풍년이 온다….'

노랫말에 나오는 풍경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엄길마을이다. 마을에서 월출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 뒤 철암산에서 월출산 천황봉에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고스란히 만날 수 있다. 학파저수지에 반영돼 비치는 달그림자도 황홀경이다. 마을 주변의 들녘과 학산천, 마을 풍경도 다 발아래로 펼쳐진다.
  
 철암산에서 내려다 본 엄길마을 전경. 간척이 되기 전엔 마을 앞에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 이돈삼
 수래정 부근을 돌며 운동을 하는 마을주민. 코로나19로 답답한 일상을 달래고 있다.
ⓒ 이돈삼
 
엄길리의 마을 이름은 입향조와 엮인다. 마을의 입향조인 전승무·승문 형제의 후손들이 문과와 무과에 대거 급제했다. 후손들이 입향조에 대한 마음을 담아 존경할 엄(嚴), 입향조의 아호인 길촌(吉村)·길림(吉林)에서 길(吉)을 따서 '엄길(嚴吉)'이라 불렀다. 이후 가릴 엄(奄)자로 바뀌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 뒤에 산이 있고, 앞으로 큰 배가 드나드는 서호강이 있어 살기 좋았다고 입을 모은다. 지금껏 이어지는 마을의 공동체 정신도 빛이 난다.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정월대보름에 당산제를 함께 지냈다. 복날 등 특별한 날엔 주민들이 모여 복달임도 같이했다. 인근 지역 사람들이 많이 부러워하는 마을이다.
  
 엄길마을 입구에서 본 철암산 전경. 엄길리 암각 매향비를 품고 있는 산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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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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