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영서의 얼굴은 어떻게 뒤바뀌었는가
[이경숙 기자]
▲ "병고와 가난에 시달리는 '우국평생', '대구만세사건' 주동 김영서옹"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한 1975년 11월 26일자 <동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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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옹의 오늘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쳤던 그의 과거에 대한 보답으로서는 너무나 서글프고 비참한 지경이다."(<동아일보> 1975.11.26.)
삼일운동 당시 대구 계성학교 교사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가 투옥됐던 김영서(金永瑞)님. 그는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1975년 12월 12일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직전 그를 만났던 <동아일보> 이용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김영서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여기 두 장의 사진이 있다. 하나는 얼굴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무릎 위 상반신 사진이다. 두 사진은 누가 봐도 동일한 사진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진의 원본은 <동아일보> 1975년 11월 26일자 사진(상반신 사진)이고, 1995년에 작성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얼굴 사진은 <동아일보> 사진 중 얼굴 부분만 캡처한 것이다.
▲ 대구만세운동의 주역 김영서님의 사진 왼쪽 얼굴사진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검색한 독립운동가 '김영서'(金永西)의 사진이라고 한다. 오른쪽 사진은 동아일보 1975년 11월 26일 돌아가시기 얼마 전 99세 나이의 김영서(金永瑞) 옹의 사진이다. 두 사람은 다르지만 얼굴은 동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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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공공기관에서 독립운동가나 지역 인물을 소개하는 사이트를 만들어 인터넷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사람들이 뭔가 정보를 찾을 때 가장 먼저 인터넷 검색부터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인터넷에 독립운동가의 이력을 소개하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그런데 이런 사이트들에서 잘못된 정보를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의 특성상 한번 제공된 정보는 계속 재생산되고 오류가 있으면 오류까지도 계속 재생산된다. 대부분 공공기관이 직접 작성하거나 공공기관이 수주하여 작성하는 이런 정보에 오류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공공기관들은 추후 수정할 의지가 있을까.
공공기관 정보제공자들은 신중해야
현재 대구 계성학교 교사들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는 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제공하는 김영서님의 사진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구할 수 있는 대로 김영서님의 사진을 구해서 다시 봤다. 김영서님이 계성학교 재직시절 찍은 사진에서부터 공훈전자사료관에서 제공하는 사진까지 비교한 결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이 오류임을 확인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작성처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화를 했다. 사진이 잘못되었다고 알리니 알았다고 했다. 내 이름이나 연락처를 남겨야 하지 않냐고 물으니 전화번호가 남아있어 상관없다고 했고, 필요하면 전화를 하겠다는 게 끝이었다. 오류의 근거를 손에 들고 전화했던 나는 자료들을 그냥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제보한다고 무조건 고칠 수야 없는 노릇이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사진이 오류인지 아닌지를 객관적으로 검토해야 할 터이니 내게 다시 전화가 오리라 생각했다. 하루인가 지나고 받지 못한 전화 중 낯선 번호가 있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다시 전화해서 이런저런 일로 전화를 했다고 말했다.
해당 부서로 전화를 연결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그로부터도 다시 열흘도 넘게 지났지만 사진은 그대로고 전화 연락도 없다. 내가 또다시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전화해 볼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란 오류가 있기 마련이고, 다만 오류를 수정할 의지가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정보의 사실 여부를 주기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은 고사하고 제보가 있어도 들은 체 만 체라면 앞으로 어떻게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오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만이 아니었다. 지역 인물을 소개하는 인터넷 자료 중에는 고향이 엉터리인 것도 있었고, 심지어는 김영서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경력이 마구 뒤섞인 경우도 있었다.
자료를 만드는 사람들, 특히 공공기관의 정보제공자들은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은 공공기관에서 만든 자료는 공신력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고작 몇 번 클릭해서 이리저리 자료를 떼 붙여 역사적 인물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짜깁기 해서는 안 된다.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것은 가장 먼저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류 발견했을 때 즉각 수정하지 않는다면
김영서님은 평양 숭실중학과 숭실대학을 졸업했다(숭실교우회 회원명부 참조). 숭실학교를 다니던 1905년, 그는 을사늑약 체결에 분개해 평양에서 서울 대한문까지 걸어가 시위를 했다(숭실백년사, 숭실야사). 이 일로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다.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대구로 와서 계성학교 교사를 했고 삼일운동 당시 주도적 역할을 했다.
2년형을 선고받고 1920년 7월 출옥한 다음 홍주일, 정운기와 함께 교남학교(현 대륜중고등학교)를 세웠다. 교남학교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대구경북지역을 돌며 학교를 살리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의 행적은 당시 신문들이 전하고 있다.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던 김영서님이 다시 언론에 등장한 때는 1969년 삼일운동. 그때 "대구천 둑 옆 초라한 단칸 셋방에서 손자의 행상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백성의 한 사람으로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뭐 그리 대단한 일을 했다고 내가 나섭니까"라고 했다(<동아일보> 1969.3.1.).
그리고 1975년 돌아가시던 해 11월 서울 도봉구 "무허가판자집이 다닥다닥 붙은 개천가 두 평 남짓 셋방에서 병고와 가난에 시달리고 있었다."(<동아일보> 1975.11.26.) 99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국가와 민족을 얘기하며 옛 기개는 잃지 않았다고 한다.
노 투사에게 뒤늦은 온정의 손길이 쏟아졌지만, 한 달도 채 안 된 1975년 12월 12일 독립투사 김영서님은 "서울 도봉구 월계동 16의 10 삭월셋방에서 99세를 일기로 별세"하셨다(<동아일보> 1975.12.13.).
독립운동과 교육운동에 한평생을 바친 이가 가난과 병고에 시달리다 돌아가신 것으로도 부족해 돌아가신 후 얼굴까지도 잃게 할 수는 없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독립운동가의 삶과 행적에 대한 정보를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새로운 정보를 찾을 때까지는 실수나 누락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오류를 발견했을 때 즉각 수정하지 않는다면 식민지 시절 독립투사의 고단했던 삶을 우리 손으로 또다시 훼손하는 죄를 짓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박물관이나 정부 기관에 여러 번 이와 유사한 사건들로 오류를 수정해달라고 요구했었다. 그런데 대처하는 기관의 담당자에 따라 처리방식은 매우 달랐다. 즉각 확인하고 수정하는 곳, 향후 어떤 절차를 거쳐 수정할지 알려주는 곳, 돈 핑계를 대며 그냥 내버려 두는 곳,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곳.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다.
삼일운동 백주년이 지난 이제,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발굴만큼이나 왜곡된 정보의 수정도 중요하다. 지금부터라도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는 독립투사들에 대한 정보들을 대대적으로 재검토해서 오류를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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