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즈버그와 김명수..野, 차기 대법원장 임명권 포기하나
김명수 사퇴 시 차기 대통령은 대법원장 임명권 행사 어려워
[아시아경제 나주석 기자] '노토리어스 RBG'. 흑인 래퍼 노토리어스(Notorious) B.I.G에서 비유되며 '악명'을 떨친 미국의 여성 대법관 루이스 긴즈버그의 애칭이다. 차별에 반대하고 소수자를 대변하며 역사를 바꾸는 수많은 판결을 내린 탓에 그는 유명 래퍼와 같은 '인기'를 누렸다. 특히, 미국의 진보진영은 그녀를 영웅으로 여기며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런 긴즈버그 대법관이 지난해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 사회가 보였던 존경은 전 세계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처럼 진보 진영의 사랑을 받았던 긴즈버그 대법관이었지만, 옥에 티는 있었다. 민주당 등 진보진영에서는 그녀의 생전부터 후임 문제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종신임기제인 미국 대법관의 경우 대통령이 임명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대법관의 생이 다하거나, 중도에 물러나야 한다. 앞서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시절에 긴즈버그 대법관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80대 고령에 췌장암에 걸렸던 긴즈버그 대법관이 자칫 공화당 정부에서 세상을 떠날 경우, 미 연방대법원이 보수화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긴즈버그 대법관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는 오바마 전 대통령이 상원 인준을 고려해, 본인보다 덜 진보적인 인사를 대법관으로 지명할 것을 우려한 탓에 퇴임 압박을 물리쳤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당 정부가 다시 들어서기를 기다리며 생을 이어가려 했지만, 결국 긴즈버그 대법관은 공화당 정부인 도널드 트럼프 전 미 대통령 임기 중 숨졌다.
그 결과 후임은 같은 여성이지만 정치적 성향은 정반대의 보수적 인사인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이 맡게 됐다. 배럿 대법관의 임명으로 미 연방대법원은 보수 6명 대 진보 3명으로 재편됐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당선되고 미 상원과 하원 모두 민주당이 다수당이 됐지만, 사법부만큼은 여전히 보수의 요새로 남게 됐다.
3권분립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 속에서 사법부는 독자적 영역으로 남아 있지만, 대법원장 등 대법관 임명 문제는 정치적 결정 사항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은 항상 중요한 문제가 되어왔지만, 우리는 대법원장의 임기를 6년 보장한 헌법 105조 덕분에 정치적 논란인 피해왔다. 하지만 이 문제가 새롭게 부상할 가능성이 커졌다.
최근 야당을 중심으로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임 요구가 커지면서, 대법원장 사임 문제가 이슈가 됐다. 김 대법원장의 결정에 따라 차기 정부의 대법원장 임명권이 달라질 수 있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게 됐다. 야당은 김 대법원장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현실화할 경우, 현 정부가 임명한 대법원장이 차기 정부 임기 내내 사법부를 맡는 상황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시작은 재판 간여 등으로 헌법을 위반했다고 비판받던 임성근 부산고법 부장판사를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열린우리당 등이 탄핵을 추진하면서다. 하지만 김 대법원장과 임 부장판사 사이에 '탄핵 때문에 사표를 수리할 수 없다'는 발언을 했는지 여부를 두고 공방이 벌어지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임 부장판사가 녹취록 등을 공개하면서, 김 대법원장은 거짓 해명 논란에 휩싸였다. 이로 인해 사상 첫 법관 탄핵은 임 부장판사의 헌법 위반 행위 대신 전혀 별개의 사안인 김 대법원장의 거짓말 논란으로 넘어간 상황이다.
5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거짓말쟁이 대법원장은 사법부 수장으로서 권위와 자격을 완전히 상실했다"며 "스스로 물러나는 것만이 상처 입은 국민께 속죄하는 최소한의 도리"라고 강조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의원을 단장으로 한 ‘탄핵거래 진상조사단’도 이날 대법원을 항의 방문하고 1인 시위에 돌입했다.
임 부장판사의 탄핵 문제와 별도로 그동안 국민의힘은 김 대법원장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김 대법원장 탄핵 필요성을 언급해왔던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인사 문제와 지난 총선 선거 관련 재판이 지지부진한 데 문제를 제기했다. 주 원내대표는 5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해 "정부의 중요한 사건을 대부분 가지고 있으면서 재판을 지연하거나 유리한 판결하는 김 모 부장판사는 3년 지나도록 그 재판을 계속 맡도록 중앙지법에 두고 있으면서 불리한 재판을 하거나 한 재판부는 전부 흩어버렸다"고 주장했다.
이어 "작년 4월 15일 우리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는데, 선거 무효 재판이 무려 130여건이 제기돼 있다"면서 "법에는 6개월 안에 결론을 내게 돼 있는데 예전에 빠를 때는 4월 15일 총선 이후에 6월 8일에도 검표가 됐었다. 이번에는 6개월이 훨씬 지나도록 아직 재판이 언제 끝난다는 보장도 없이 재판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주 원내대표로서는 문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심판 여론이 비등하는 시점에서 보궐선거 등이 진행될 경우 여당과의 의석수를 줄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지만, 선거 관련 재판이 나지 않고 있다는 불만인 셈이다.
하지만 야당의 요구처럼 김 대법원장이 물러나는 게 야당에 좋은 일일까.
임기가 2년 남은 김 대법원장이 국민의힘 주장대로 중도 사퇴하고 물러난다면, 후임 대법원장을 지명할 수 있는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다. 김 대법원장의 사퇴, 문 대통령의 후임 인사, 국회 통과 등이 마쳐질 경우 새 대법원장의 임기는 2027년까지다. 차기 대통령 임기기 2027년 5월까지인 점을 고려하면, 차기 정부 임기 내내 대법원장은 현 정부에서 결정할 수 있게 된다.
물론 김 대법원장이 사퇴를 거부함에 따라 대법원장이 새로 지명되는 상황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퇴를 결정할 경우에는 문 대통령은 임기 중 두 번째로 대법원장을 맡을 사람을 지명할 권한을 갖게 된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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