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인왕후'에선 볼 수 없는 그 시대 가장 중요한 '사건'
[김종성 기자]
▲ 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
ⓒ tvN |
tvN 드라마 <철인왕후>의 임금 부부는 밤마다 은밀히 만난다. 21세기 청와대 셰프 장봉환(최진혁 분)의 영혼이 결합된 철인왕후(신혜선 분)는 철종(김정현 분)을 돕고자 밤마다 개인지도를 해준다.
철인왕후의 입과 손을 빌려 장봉환의 영혼이 철종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21세기 대한민국에 관한 지식이다. 장봉환은 철종이 안동 김씨의 위세에 눌리지 않고 좀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돕고자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실제의 철종시대 민중들 사이에서도 활발했다. 그들은 드라마 속의 철인왕후나 철종 그 이상으로 치열하게 노력했다. 그 같은 치열함은 '민란'이라는 다소 부정적인 표현으로 후세에 기억되고 있다.
철종시대 그 어떤 사건보다도 중대했던 '임술민란'
'철종' 하면 '강화도령'이나 '세도정치'가 얼른 떠오르지만, 실제로 가장 먼저 연상돼야 할 것은 임술민란이다. 철종시대에 임술민란보다 더 큰 사건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민란은 토지세·병역세·복지 분야에서 발생한 '삼정(전정·군정·환곡)의 문란'에 대한 저항으로 일어났다. 음력으로 임술년(양력 1862.1.30~1863.2.17)에 발생한 이 사건은 경상도 진주목 바로 위쪽인 단성현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농민들이 지식인·명망가나 몰락 양반들과 함께 일으킨 임술민란은 단성현 서쪽인 전라도에서 더 크게 번져갔다. 경상도의 경우에는 19개 지역에서 발생한 데 비해, 전라도의 경우에는 그 두 배인 38곳에서 발생했다. 충청도에서는 11곳, 기타 지역에서는 3곳이 민란에 호응했다.
삼남으로 통칭되는 충청·전라·경상은 조선왕조 산업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지대였다. 그런 삼남 지방의 68곳에서 민란이 터졌으니, 오늘날의 '전국 총파업'보다 파급력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임술민란은 철종시대 그 어떤 사건보다도 중대했다.
표면상으로는 지식인이나 양반들이 앞장섰지만, 이들이 주력 부대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들의 스타일대로 상황이 전개되지는 않았다. 익산의 경우에는 시위대가 지방 수령을 포박해 익산 밖에 내다버리는 일까지 있었다. 버려진 사또의 입장에서는 차라리 감옥에 갇히는 편이 더 나았을 수도 있다.
조선왕조가 이 사태를 막지 못한 것은 민중의 도전을 안정적으로 흡수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삼정의 문란으로 민간 경제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국정을 장악한 외척(왕실 사돈)들은 가문과 당파의 이익에 매몰돼 상황을 거시적으로 정확히 진단하지 못했다. 그래서 사태 방지에 필요한 적절한 대처법이 국가로부터 나오지 못했다. 1967년에 <사학연구> 제19호에 실린 김진봉 충북대 교수의 논문 '임술민란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이런 대목이 있다.
▲ tvN 드라마 <철인왕후> 한 장면. |
ⓒ tvN |
이 같은 국가 권력의 약화와 대비되는 또 다른 현상이 민란 발생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에 특히 두드러진 민중의 조직력 강화가 그것이다. SNS나 인터넷은 없었지만, 이 시대 민중들은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성공적으로 발전시켰다. 그것이 임술민란 발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송강 정철이 유배 중에 지은 '재 너머 성 권농 집에 술 익었던 말 어제 듣고/ 누운 소 발로 박차 언치 놓아 지즐 타고/ 아희야 네 권농 계시냐/ 정 좌수 왔다 하여라'라는 시조가 있다. 시조 속의 정철은 자신을 '정 좌수'로 지칭했지만, 유배 죄인이 현지에서 좌수가 됐을 리는 만무하다.
지방 양반들의 결집체인 향회의 실무 기구가 향청이었다. 좌수는 향청의 임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시·군·구 의회 간부 같은 것이었다. 중앙에서 활동했던 정철이 유배지 사람들과 술친구가 된 뒤 정 좌수로 불렸던 듯하다.
정철의 시조에 간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향회다. 이 향회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지역 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는다는 의미였다. 무반과 문반을 합쳐 양반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향회에 가입한 특권층을 양반으로 부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양반은 후자의 의미다.
19세기 세도정치시대에는 향회가 갖는 그 같은 의미에 변화가 생겼다. 전통적 의미의 양반이 아닌 신흥 부자들이 향회에 진입하는 양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넉넉할 요'가 들어간 요호부민(饒戶富民)으로 불리는 이들 신흥 세력의 향회 진출로 인해 기존 사족(士族, 선비층)들이 직면하게 된 상황을, 1997년 5월 <역사비평>에 실린 송찬섭 방송대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의 여론과 정치: 농민항쟁과 민회'는 이렇게 설명한다.
"사족층을 더욱 어렵게 하는 것은 부를 기반으로 아래로부터 성장하는 층이었다. 요호부민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차츰 향회에도 참여하여 지방 사회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이들을 향회의 성원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족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향회와는 성격이 달라지게 되었다."
향회는 전통적인 양반들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이 기구가 요호부민의 성에 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경우에는 요호부민들이 향회를 무시하고 별도의 조직을 만드는 일도 있었다. 삼정의 문란이 요호부민들에게도 피해를 입힐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 중 일부는 새로운 조직을 통해 권익을 지키려 했다.
2014년에 <글로벌 정치연구> 제7권 제2호에 실린 윤대식 한국외대 교수의 논문 '근대 한국 농민운동에서 자치의 맨 얼굴: 임술민란과 동학농민운동을 중심으로'는 "양반과 수령에 의한 관 주도의 향회가 조세 수탈의 불만을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면서 요호부민은 자신들의 의사를 대변할 수 있는 스스로의 모임을 만들기 시작하는데, 민회(民會), 이회(里會), 도회(都會)라고 불리는 민 주도 향회의 출현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요호부민들의 힘만으로는 민회를 결성할 수 없었다. 기존 체제에 불만을 가진 지식인이나 몰락 양반들이 함께했기에 이것이 가능했다. 그에 더해 민중의 참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민중의 지지 없이는 요호부민과 불평 지식인과 몰락 양반들이 특권층 중심의 기존 향회에 맞서기 힘들었다. 위 논문은 "대소민(大小民, 상층·하층 백성)도 이회의 구성원이 되었기에 요호부민뿐 아니라 일반 농민들까지 자신의 이해관계를 피력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 tvN 사극 <철인왕후> 한 장면. |
ⓒ tvN |
이런 민회가 임술민란의 발생 및 전개 과정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 민란으로 인해 공권력이 마비된 곳에서는 민회가 자치정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런 조직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역량이 충분히 축적돼 있었기 때문에 전국적인 민중봉기가 손쉽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임술민란의 발생 원인은 이 외에도 많다. 가뭄이나 수재로 인한 경제 여건의 악화도 있고, 서양의 압력으로 인한 동아시아 정치권력의 전반적인 약화 등도 있다. 하지만 민란을 일으키는 쪽과 이를 막는 쪽의 역학구도로 관점을 국한시키면, 민회 결성 등으로 대표되는 '민중의 조직력 강화'와 세도가문의 국정농단으로 인한 '국가권력의 약화'가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후의 한국인들은 민주주의의 기원을 주로 서양에서 찾았다. 이런 경향은 1945년 9월 미군 진주 이후 더 강해졌다. 하지만, 민중이 스스로를 지키는 힘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나 다 존재했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국가권력이 한층 약해진 철종시대에 그런 에너지가 더 강해졌다. 그것이 임술민란으로 집약됐다.
머리를 맞대고 세상을 바꿀 궁리를 하는 <철인왕후> 속의 임금 부부처럼, 철종시대 민중들도 더 나은 세상을 치열하게 모색했다. 사극에서는 주막에 앉아 술을 마시는 일반 백성들이 단순한 두뇌의 소유자들로 묘사될 때가 많지만, 지금의 우리처럼 그 시대 민중들도 자신들의 정치적 역량을 위해 치열하게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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