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류 바꾸면 된다' 식 김명수 개혁이 법원 내분 키웠다

권석천 2021. 2. 6.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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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열 파괴, 비대법관 출신 발탁
'사법농단' 해결사 카드로 기용
"재판만 한 사람 수준 보여줄 것"
'사법 관료'와 다른 리더십 전환
법원 조직 문화 시스템 개선 없이
인적 청산 치우쳐 내부 반발 불러


‘대법원장 거짓말’ 사태의 뿌리

판사 탄핵 와중에 ‘거짓 해명’ 논란을 빚고 있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5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에서 승용차에 오르고 있다. [연합뉴스]

현직 판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 와중에 대법원장의 ‘거짓 해명’이 폭로됐다. 야당에선 “거짓말쟁이 대법원장”(국민의힘 김종인 위원장)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고 나섰다. 법원 내부 균열도 심해지고 있다. 이 초유의 사태 뿌리에는 무엇이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은 왜 김명수 대법원장을 임명했고, 김명수 대법원장은 무엇을 하려고 했던 것일까.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후 대법원장 인선 과정에서 유력 후보는 둘이었다. 박시환·전수안 전 대법관(이하 경칭 생략).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 ‘독수리 5남매’로 불리던 진보성향 대법관들이었다.

그 무렵, 박시환은 김지형 전 대법관 등과 저녁 모임을 가졌다. 참석자들이 “대법원장을 맡아 책임을 다하시라”고 주문했다. 박시환은 계속 손사래를 치다 눈물을 쏟았다. “내게도 행복추구권이 있지 않습니까.” 양승태 대법원장 뒤를 이을 다음 대법원장은 그만큼 고통이 예고된 자리였다. ‘사법농단’, 즉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를 정리하려면 손에 피를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때, 예상을 깨고 깜짝 등장한 인물이 있었다. 김명수 춘천지방법원장. 양 대법원장과 비교하면 사법연수원 기수를 13기나 건너뛰었다. 비(非) 대법관 출신 중에 대법원장 후보자가 지명된 것도 처음이었다. 법원 안팎에선 “김명수라는 비주류 카드를 통해 사법부의 면모를 일신하겠다는 게 대통령의 뜻”이란 분석이 나왔다.

김명수 선명성에 청와대 주목

김명수는 우리법연구회 회장과 국제인권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지냈다. 그러나 그가 본격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무대는 2017년 3월 열린 전국법원장간담회였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이 막 불거져 나온 상황에서 김명수는 그 누구보다 강도 높게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그의 선명한 자세는 대법원장감을 찾던 청와대의 주목을 받을 만했다.

김명수는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다음날(8월 22일) 대법원을 방문해 일성을 내놓았다. “31년 5개월 동안 사실심 법정에서 당사자들과 재판만 해온 사람이 어떤 수준인지 보여드리겠다.” 자신이 행정처 주변을 맴돌던 기존의 ‘사법 관료’들과는 다른 사람임을 부각시킨 것이었다. 그는 같은 해 9월 취임식에서 ‘리더십의 전환’을 선언했다.

“오늘 그리고 내일의 사법부는 수직적이고 경직된 관료적 리더십이 아니라 경청과 소통, 합의에 기반을 둔 민주적 리더십으로의 전환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김명수의 원인 진단은 틀리지 않았다. ‘사법농단’ 사태는 법원 내에 뿌리를 내리고 가지를 뻗어 나간 관료사법이 빚은 참사였다. ‘약한 법원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 아래 목적성과 효율성이 중요시됐다. 재판만 하는 일선 법원 판사들보다 조직논리에 충실한 행정처 엘리트들이 대법관 자리를 차지했다. 그 결과 ‘재판의 독립’이란 중요한 가치는 뒷전으로 밀려야 했다.

문제는 ‘주류(main stream)를 바꾸면 된다’는 식의 해법에 있었다. 대법관 제청을 통해 우리법연구회와 민변,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 잇따라 대법원에 입성했다. 양승태 코트(법원) 시절 보수 일변도의 대법원 구성을 다양화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진보 성향의 특정 단체 출신들만 대법관이 되느냐”는 역풍은 커졌다.

이런 가운데 ‘사법농단’에 대한 진상 규명이 이어지면서 법원 한쪽의 반발 정서는 심화됐다. 기존의 주류 법관들은 세 차례에 걸친 대법원 차원의 조사에 이어 검찰 수사까지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김명수는 책임지고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의견 수렴과 조사 절차를 거쳐서 윤곽이 잡히면 그때 최종 사인을 하려고 했다.

마지막 3차 조사 때도 “모든 권한을 특별조사단에 위임하겠다”며 진행 상황을 보고받지 않았다. 대법원장이 조사보고서 공개 직전에야 결과를 보고 받으면서 판사들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두 갈래로 나갔다. “수사할 사안이 아니다.”(안철상 특별조사단장) “수사 가능성을 검토하겠다.”(김 대법원장) 후유증은 깊어져만 갔다. 서울고법 부장판사 회의와 법원장 회의가 고발과 수사 의뢰에 반대 입장을 밝힌 반면 전국법관대표회의는 ‘형사절차를 포함한 성역 없는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수사로 밝혀야 할 사안과 엄중 징계로 대응할 사안을 구분하지 못한 채 대법원장 담화문이 나왔다. “수사가 진행될 경우 협조하겠다.” 이에 따라 모든 논의가 검찰 수사 하나에 함몰되고 말았다. 사법농단 사태의 정리가 인적 청산으로만 좁혀지면서 내부 갈등의 볼륨은 더욱 높아졌다.

‘주류 바꾸기’에만 치우친 개혁의 한계였다. 시스템이 변화되려면 사람을 바꾸는 데 그쳐선 안 된다. 정책 추진의 타이밍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기존의 주류도 승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조직 문화와 인식이 바뀔 때 개혁은 성공한다. 전체 청사진과 정교한 프로그램 없이 성공하는 개혁은 없다.

김명수는 과거 법원의 주류를 교체하고 그들의 근거지를 없애면 ‘좋은 사법부’가 되리라,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었던 건 아닐까. ‘좋은 판사’와 ‘좋은 대법원장’은 다른 것 아닐까. 분명한 건 김명수의 뒤에는 그를 ‘준비된 대법원장’으로 여겼던 문 대통령이 있다는 사실이다.

“대법원 구성 편향” 역풍

김명수가 임성근 부장판사와 면담했던 지난해 5월 22일은 어떤 시점이었나. 4.15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하면서 ‘여대야소’ 국회 개막을 앞뒀을 때였다. “위헌적인 행위이지만 무죄다.” 1심 판결이 나오고 사표가 수리되지 않은 상황에 임성근은 불안했을 것이다. 그가 면담 내용을 녹음한 것도 대법원장에 대한 불신 때문이었을 터. 임성근의 녹음도 온당치 못했지만, 김명수의 화법도 다르지 않았다.

“지금 뭐 탄핵하자고 (여당에서) 저렇게 설치고 있는데, 내가 사표 수리했다 하면 국회에서 무슨 얘기를 듣겠냐 말이야.”

유체이탈에 가까운 발언 내용을 숨소리까지 듣노라면 발언자가 대법원장이 맞는지 의심하게 된다. 차라리 “탄핵심판을 거쳐야 할 사안”이라고 원칙론을 펴는 게 맞지 않았을까. 녹음 파일은 이 사태를 빚은 책임이 김명수에게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태는 이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현직 판사 탄핵소추에 이은 대법원장의 거짓말 파문으로 “법원 내분이 사생결단의 국면까지 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중요한 건 판사들이 아니다. 국민이다. 법원이 망가지고 판사들 마음이 심란해지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갈 수밖에 없다. 판사들은 대법원장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 “속아 넘어가질 않네” 이런 말한 대법원장, 무슨 생각 할까

「 “일선 법원에서 형사재판을 할 때였다. 유죄인지, 무죄인지 고민하다가 유죄를 선고했다. 그런데 피고인이 법정을 나가며 독백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판사가) 속아 넘어가질 않네?’ 그때야 내가 판단을 잘했구나, 하고 안심했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지난해 법원 행사 자리에서 한 얘기다. 대법원장은 판결하는 일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지금 다시 그 기억을 떠올려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대법원장 거짓말’ 사태의 심각성은 적극적인 거짓말이었다는 데 있다. ‘지난해 5월 임성근 부장판사가 사표를 내자 김 대법원장이 국회 탄핵을 이유로 반려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것은 지난 3일. 이날 정오쯤 김 대법원장은 보도 내용을 부인하는 취지의 대법원 명의 답변서를 국회에 보냈다. ‘진실게임’은 다음날 오전 임 부장판사 측이 대법원장과의 면담 녹음 파일을 공개하면서 끝이 났다. 오후 1시 김 대법원장은 기자들에게 입장문을 배포했다. “9개월 전 불분명한 기억에 의존해 다르게 답변한 데 대해 송구하다.”

의문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3일 언론 보도에 김 대법원장이 왜 가만히 있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가 보도 내용을 부인하는 답변서를 국회에까지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라거나 아예 대응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나. 두 번째는 4일의 사과 입장문에 관한 것이다. 그는 왜 불과 9개월 전 일을 두고 자신의 기억력을 탓한 것일까.

대법원장의 거짓말은 절대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판사란 무엇인가. 사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일 아닌가. 판사들은 피고인이 거짓말을 한다는 판단이 서면 “반성하지 않는다”며 중형을 선고하기도 한다. 대법원장이 국민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한다면 판사들의 사실/거짓 판단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판사들은 직업적으로 거짓말에 민감하다. 그들은 아마 대법원장 논란에 대해 이미 판단을 내리고 있는지 모른다. 법정에서 거짓말을 하고 “기억이 틀렸다”고 변명하는 피고인들을 매일 봐왔을 테니까.

권석천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sck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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