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에서 2년 일하면 받는 문자.. 선택지는 3가지뿐

김상현 2021. 2. 5.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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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팡 일용직 노동, 2년의 경험 ⑪] 내가 그곳을 떠난 이유

[김상현 기자]

물류창고에 나가는 것은 일상이 됐다. 평일에는 학교에 가고 주말에는 쿠팡에 갔다. 방학 때는 주5일 채워서 물류창고에 나왔다. 일을 시작할 때 금방 다른 일도 찾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다른 아르바이트는 잘 구해지지 않았다. 

그동안 자주 나오는 노동자로 인식돼 출근하기는 편해졌다. 일도 익숙해지고, 안면이 트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물류창고에 정착하게 되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많은 노동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았다. 같이 들어온 일용직 노동자는 계약직 고참이 됐고, 다른 일용직 노동자들은 각자의 사정으로 쿠팡을 떠났다. 어느샌가 나는 내가 일하던 파트에서 두 번째로 오래 일한 일용직 노동자가 됐다. 

한 통의 문자

쿠팡 일용직이 된 지 2년이 다 되어갔다. 그 시기 창고에서는 2년 이상 된 일용직 노동자들이 어떤 문자를 받는다는 소문이 퍼졌다. 2년이 되면 법적으로 정규직이 되니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요지의 소문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정규직 전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류창고 노동자가 누릴 수 있는 호사는 무기계약직이 전부였다.

그 문자를 받은 일용직에는 3가지 선택지가 주어진다. 우선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있다. 다음으로 일용직으로 계속 일한다고 합의하는 것이 있다. 마지막으로 일용직으로서 일한 2년을 정산받고 퇴직하는 선택지가 있다. 주변 일용직들은 계약직으로 전환하거나, 일용직으로 계속 일하는 것을 선택했다.

나에게는 문자가 오지 않았다. 나는 해당하지 않는 건가,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도 일용직으로 일한 지 2년이 다 되어갔고, 곧 선택하라는 내용이 담긴 문자를 받을 수 있었다.

문자를 받았다고 하자 주변 일용직 노동자들은 내가 일용직으로 계속 남을 거라 본다고 말했다. 나도 처음에는 당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복잡해졌다. 

그 시기 나는 바람 빠진 풍선 같았다. 창고에서 몸을 쓰는 일상에 점점 지쳐갔다. 한 달에 8일 이상 나가면 4대 보험을 떼어가니 그걸 피하고자 주말에만 나오는 일용직들 사이에서는 7일만 나오는 것이 일종의 룰이었다. 4대 보험을 일급이 아니라 주휴수당에서 가져가고, 주휴수당을 주는 방식이 변경되어도 이들은 '1개월 7일'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하루라도 쉴 수 있는 날을 만들어야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기력감이 커졌다. 오히려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평일을 더 갈구할 정도였다. 근무 신청을 하다가 취소하는 날들이 늘어났다. 

계약직이 아닌 일용직입니다만

일용직 중에서 고참이 되다 보니 늘어나는 업무에도 힘에 부쳤다. 일용직인 내가 담당할 일은 아니었음에도 내가 일부 맡았다. 일용직과 계약직은 거의 같은 일을 했지만, 사소한 차이가 있었다. 일용직이 아닌 계약직은 쿠팡 물류를 관리하는 인트라넷 접속 권한이 있었다. 똑같이 물건을 나르더라도 계약직의 업무 범위가 더 넓었다.

또 나오는 날이 고정적이지 않은 일용직보다 규칙적으로 출근하는 계약직 사원은 자기 파트의 다른 계약직 혹은 일용직에게 업무를 분장하거나 이들을 통솔하기도 했다.

문제는 계약직이 적다 보니 그나마 자주 나오는 일용직 노동자에게 이 일 일부가 일임됐다는 것이다. 일용직이 하는 업무가 아닌 것들을 조금씩 배정받았다. 나는 오래 나온 고참 일용직 중 한 명이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일용직이 담당하는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를 최대한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창고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계약직처럼 일을 주도해야 하는 상황도 몇 차례 생겼다. 나보고 계약직이 아니냐고 묻는 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분명 일용직이었다.

담당 구역에서 같이 일하게 된 일용직들이 협조를 해주면 좋으려만 그러지 못했다. 사사건건 충돌했고, 불신의 감정도 커졌다. 차라리 혼자 일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나누어서 해도 되는 일을 스스로 처리하려고 애쓰게 되었다.

덕분에 일을 더 잘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상황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노동자와의 갈등을 내가 일을 더 맡는 형식으로 해결하려 했다. 작은 갈등들이 표출되기는 했으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스트레스와 하소연만 늘어났다.

이제 내게 3개의 선택지가 남았다. 계약직이 될 것인가, 계속 일용직으로 일할 것인가, 아니면 퇴직금을 받고 나갈 것인가.

선택

계약직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아직 학생 신분이었고, 학교에 더 다녀야 했다. 일용직이 가장 타당해 보이기는 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면서 아르바이트는 더 구하기 어려워졌다. 자신의 가게를 접고 쿠팡 물류창고 아르바이트를 뛰는 '사장님'이 늘어나면서 그 현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와 친했던 노동자들은 차라리 퇴직금을 받고 쉬라고 조언해줬다. 스트레스를 받기보다는 그것이 최선임을 강조했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아는 정보를 최대한 알려주었다. 퇴직 후 몇 개월 뒤에 다시 창고에 올 수 있는지, 퇴직금은 얼마인지, 실업급여는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

나는 이들의 설득에 넘어갔다. 2년 동안 열심히 일한 나에게 휴가를 주고 싶기도 했다. 그런 생각까지 이르자 나는 결정을 내렸다.

쿠팡을 떠나기로 했다.

똑같이 돌아가던 마지막 날
 
 쿠팡 물류창고를 떠나던 시기 찍은 출근 버스 사진.
ⓒ 김상현
 
나는 선택하라는 문자에 '퇴직하겠습니다'라고 보냈다. 그러자 담당자는 '퇴직하고 싶은 날에 언제든지 와서 말하면 된다'라고 답했다.

퇴직 날짜를 잡고 나는 평소 같이 일했다. 사람들에게는 떠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내가 다른 노동자를 떠나보냈던 것처럼 똑같이 대했다. 앞으로의 행운을 빌어주고 수고했다고 다독여줬다. 그리고 나와 그들은 물건을 나르는 일에 집중했다.

퇴직 당일, 긴장이 풀렸는지 하마터면 출근 버스를 못 탈 뻔했다. 출근 버스가 오지 않아서 다른 수단으로 출근한 적은 있어도, 늦어서 버스에 타지 못할 뻔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숨을 헉헉대며 겨우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는 평소와 같이 달리고 노동자들을 실었다. 창고에 도착하자 노동자들은 일렬로 긴 줄을 섰다. 체온을 측정하기 위함이었다. 

모든 것이 이전과 똑같았다. 출근 수속을 하고, 사물함에 가방을 넣고, 300원짜리 음료수를 마시고 아는 사람들과 인사한다. 잠시 휴게실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현장에 올라가라는 말에 화들짝 놀라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올라간다. 

창고에 올라가자마자 일하던 파트에 가서 이름을 적고 장갑을 받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했던 창고는 다시 사람들로 찬다. 관리자들은 올라와 노동자들에게 안전교육을 한다. 그러면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뛰지 않는다" 같은 구호를 외친다.

그리고 일을 시작한다. 물건을 나르고 정리한다. 거대한 집게처럼 생긴 쟈키를 써서 가득 찬 파레트를 지게차가 가져갈 수 있게 옮긴다.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하다가 누군가 권하는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한숨 돌린다. 

퇴직을 신청하다

점심시간은 달랐다. 나는 사무실로 내려가 "퇴직을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영어 닉네임을 가진 직원이 종이 몇 장을 주며 적으라고 했다. 통장 사본도 보내라고 덧붙였다.

나는 즉각 통장 사본을 그가 알려준 휴대폰 번호로 보낸 다음 사무실 밖에서 그가 건네준 종이를 작성했다. 퇴직 절차와 관련된 문서들이었다. 설문 조사도 있었다. 나는 솔직하게 내가 원하는 개선책들을 적었다. 그것들이 잘 반영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잘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다 적고 나서 나는 담당자에게 퇴직 서류를 주었다. 그는 "수고하셨다"라고 짤막하게 말했다.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다음 오후 작업을 하기 위해 다시 현장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오전과 같이 일했다.

마지막 선물

나는 다시 한번 친했던 노동자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언제 다시 볼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물류창고로 복귀하는 시점을 정해두지 않았고, 이 창고로 돌아올 것이라고 확신하지도 못했다. 

일하면서도 인사할 사람에게 전부 인사했다. 오늘 출근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는 따로 안부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 버스에 올랐다. 곧 떠날 창고를 바라보며 그동안 있었던 많은 일을 떠올렸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나를 급하게 찾는다는 소리를 들었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쿠팡 물류창고에 일용직으로 들어와서 지금은 계약직 고참으로 일하던 노동자였다. 나를 찾은 이 노동자는 "벌써 떠난 줄 알았다"라며 "이걸 전해주게 되어서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쇼핑백 하나를 건네받고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나중에 쇼핑백을 살펴보니 각종 빵과 마카롱이 들어있었다. 이 선물들을 가족들과 나누어 먹었다. 이 기회를 통해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쿠팡 퇴직일에 어느 노동자에게서 마지막으로 건네받은 선물.
ⓒ 김상현
 
마지막 선물을 들고 나는 퇴근 버스 안에서 멀어지는 물류창고를 보았다. 많은 일이 있었고, 그것을 통해 여러 가지를 배웠다. 누군가는 몸만 고생하던 시절이라고 하겠지만, 이 마지막 선물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그렇게만 평가하지 못할 것이다.

퇴직 이후

며칠 후 퇴직금과 마지막 임금이 정산돼 계좌에 들어왔다. 늘어난 잔고를 보고 흐뭇해하는 것도 잠시 나는 다시 바빠졌다.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밀려오는 과제와 시험으로 정신을 차리는 것도 버거웠다.

이제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다. 나는 다시 쿠팡 물류창고에 들어가기 전의 상태에 섰다. 돈을 벌기 위한 직업을 찾아다니며 취업 준비생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다. 

하루하루가 불안정하다. 취직될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생각한다. 새로운 출발선에 선 나는 이번에는 어떤 노동자가 되어서 무슨 노동을 하게 될까? 그 이후에 또 무슨 기록을 하게 될까? 쿠팡 물류창고에서의 노동은 이렇게 끝났지만, 나의 계속될 노동 일대기가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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