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희생자 추모 약속 온데간데없고..

이종길 2021. 2. 5.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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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강제노역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 땐 조선인 강제노역 인정
지난해 12월 SOC엔 사실 부정하고 왜곡..정부 권고사항 이행 촉구
7월 세계유산위원회 앞서 공론화 준비..국제 세미나서 심각성 알리고 대응책 모색
영화 '군함도' 스틸 컷

일본의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은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등록된 23개소 가운데 7개소에는 조선인 강제노역의 한이 서리어 있다. 하시마(군함도) 탄광과 미이케 탄광, 다카시마 탄광, 야하타 제철소, 미쓰비시 조선소 제3드라이독·대형크레인·목형장이다.

‘대일 항쟁기 강제동원 피해 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의 2016년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들은 하시마에 격리돼 해저 채탄 작업을 했다. 하루 12시간 노동과 영양실조, 사고, 질병 등으로 다수가 죽거나 다쳤다. 가혹한 환경을 견디지 못하고 탈출하다 익사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다카시마 탄광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은 1941년 이곳에서만 전쟁용으로 석탄 47만t을 생산했다. 조선인들은 하루 12시간 채탄 작업에 동원됐다. 잦은 매몰 사고와 열악한 생활 환경으로 생존을 위협받았다.

일본은 애초 세계유산 등재 추진 과정에서 치부를 감추려 들었다. 신청서에 강제노역을 언급하지 않았고 시기도 메이지(1867~1912)로 한정했다. 산업혁명 유산이 군수산업으로 번성한 시기는 태평양전쟁기. 우리 정부는 꼼수를 지적하며 반발했다. 일본의 등재 시도가 세계인을 위한다는 세계유산협약은 물론 국가간 협력과 평화 유지를 강조하는 유네스코헌장에 위배된다고 주장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일본은 결국 조선인 강제노역을 대표단 발언록과 주석(註釋)에 반영했다. 대표단은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 아래 노역을 당했다"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의 징용정책 시행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정보센터 설립 등 피해자 추모 조치를 해석전략에 포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덧붙였다.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희생자 추모 조치는커녕 지난해 6월 개방한 산업유산정보센터를 강제노역 사실을 부정하는 증언과 자료로 꾸몄다. 일본 내각관방과 각 지역 정부, 개별 유산요소 소유자 등이 지난해 12월 세계유산센터에 제출한 이행계획 보고서(SOC)에서도 강제노역 관련 내용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문화체육관광부와 문화재청은 일본의 권고사항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지난달 29일 ‘근대산업시설 세계유산 등재 후속조치 이행경과 보고서’의 주요 내용을 공개했다. 일본이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사항과 등재 이후 보존관리 권고를 얼마나 이행했는지 조사한 기초자료다.

군함도 강제노역 피해자 모습(사진= MBC '무한도전')

이에 따르면 일본은 제39차 권고에서 인정된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강제적으로 동원된 한국인’을 2018년 SOC에서 ‘일본의 산업을 지원했던 다수의 한반도 출신자’로 왜곡했고, 2019년 SOC에서는 아예 누락했다. 일본인 노동자들과 한반도 및 다른 지역 출신 노동자들이 ‘똑같이 가혹한 환경’ 아래 있었다는 식으로 본질을 흐리기까지 했다.

등재 당시의 약속과 다른 해석에 이정현 문체부 국제문화과장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사항과 일본 스스로의 약속을 회피하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여성희 문화재청 세계유산팀장은 "세계유산인 에센 졸버레인 탄광 산업단지와 포클링겐 제철소의 해설·전시에 강제노동 사실을 반영한 독일과 크게 대조된다"고 지적하며 이렇게 덧붙였다.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문은 전체 역사에 대한 해석 작업에서 국제적 모범 사례를 고려하라고 권장한다. 일본은 해석의 모범 사례를 단순히 유산의 정보 전달을 위한 홍보물이나 어플리케이션 등에 한정해 소홀하게 다루고 있다."

정부는 올해 7월 예정된 제44차 세계유산위원회에 앞서 이 문제를 공론화할 계획이다. 이 과장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사항과 일본의 미이행 사항을 비교하는 홍보 영상을 제작하고 널리 알릴 방침"이라면서 "약속이 이행될 수 있도록 외교부·문화재청 등과 끊임없이 협업하겠다"고 말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문화재청은 국제 전문가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하나의 유산, 서로 다른 기억’을 주제로 여섯 차례 국제 세미나를 마련한다. 여 팀장은 "세계유산 해석 분야 전문가들에게 이번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 알리고 새로운 대응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일본이 약속을 계속 무시해도 세계유산 지정이 해제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이 문제가 세계유산의 가치와 보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사안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 팀장은 "시기를 메이지로 한정하고 등록해 취소까지 이어지기는 어렵다"며 "약속 이행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적 관심과 국제사회의 지지를 기반으로 끊임없이 의제화한다면 일본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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