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피해자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

2021. 2. 5.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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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장혜영 정의당 의원의 입장문이 알려진 이후 물음은 계속됐다. 가해자가 오랜 시간 지켜보며 깊은 신뢰가 있던 사람이라면, 게다가 공당의 대표라면 쉽게 결정 내리지 못했을 일이다. 나의 폭로로 인해 그가 직위를 잃게 되는 건 물론 우리 조직의 해체까지 이를 수 있는 큰 사안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가해자의 진정 어린 사과와 재발 방지 약속이지 형사처분까지는 아니라면 더 고민이 깊어진다. 어쩌면 폭로는 찻잔의 미풍도 되지 못한 채 묻히고, 도리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평생 성희롱 피해자라는 꼬리표가 붙을 수도 있다. 장 의원도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으리라. 그에게는 정의당이란 조직 안에서 공동체적 해결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가해자가 대표이기에 더더욱 엄정하게 처벌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공인이 이름을 걸고 피해자임을 밝히는 일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아직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장 의원은 결국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 그는 “이렇게 공개적인 책임을 묻기로 마음먹은 것은 이것이 저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그가 털어내고 싶은 일을 털어내고 차분히 일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면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문제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지는 것이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우리는 그 뜻을 존중하면 된다.

그런데 상황은 그의 바람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한 시민단체가 가해자인 김종철 정의당 전 대표를 형사고발한 것이다. 성범죄 사건은 피해자가 직접 신고해야 하는 친고죄가 아니기 때문에 제삼자의 고발이 가능하다. 이는 장 의원이 원치 않은 일이었다.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피해를 소명하고 설명하면서 고통을 겪고 싶지 않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반론과 비판이 나왔다.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서 왜 폭로를 했느냐, 결국 제 식구 감싸기인가, 공인인 피해자가 여성운동을 위해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등. 모든 조직이 정의당처럼 비교적 빠르고 비밀리에 엄중한 결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한 시민단체의 분석 결과, 위력에 의한 직장 성희롱 사건 중 정작 신고로 이어진 사례는 10건 중 4건이 안 됐다. 신고 후 오히려 불이익을 받은 사례가 90%가 넘었다. 이런 냉혹한 현실에서 그가 여성운동의 대표성을 갖고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줬으면 하는 바람도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정의당은 과거 성범죄에 대한 친고죄 폐지를 대선 공약으로 내세우며 앞장서지 않았던가.

하지만 당신이 공인이니까 공익실현을 위해 희생해 달라고 감히 누가 요구할 수 있을까.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피해자의 마음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성범죄 친고죄가 폐지된 건 가해자가 이를 악용해 피해자를 압박하거나 회유하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취지는 피해자 배려에 방점이 찍혀있다.

이번에도 성폭력 피해자에게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는 ‘피해자다움’이란 말이 나왔다. 장 의원은 사건 후 아무 일도 없는 사람처럼 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밝혔다. 사람에 따라 피해 사실이 주변에 알려지지 않기를 원할 수도 있다. 사법제도를 통한 해결은 피해자의 일상 회복을 위한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저마다 처한 상황에서 여러 선택지 중 피해자가 가장 원하는 방법을 선택하면 된다.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피해자의 고통이 크다면 진정한 해결이 되지 못한다. 가해자들이 공격의 빌미로 삼는 피해자다움이란 무엇일까. 피해자는 아무것도 못 하고 실의에 빠져 울고만 있어야 하는 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영위하면 피해자 답지 않은 것인가. 장 의원은 피해자다움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성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가 있는 한 누구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 현직 국회의원이라는 것이 피해자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다시 입장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토록 그럴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남성들조차 왜 번번이 눈앞의 여성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토록 처참히 실패하는가.” 그가 우리 사회에 던진 묵직한 질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가 진지하게 답할 차례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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