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강제징용 판결의 데자뷔
“주권면제는 국제법의 기본 상식이죠. 위안부 판결은 기각될 겁니다.”
지난달 초, 외교부의 한 고위 간부는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위안부 피해자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요구한 재판의 결과를 며칠 앞둔 날이었다.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도 했다. 긴장감이라고는 1도 없었다.
반신반의했다. 지난 3년 반 도쿄에서 지켜본 한·일관계는 예상을 뒤집는 일의 연속이지 않았던가. 아니나 다를까, 위안부는 반인도적 범죄이며 일본의 주권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는 판단을 서울 중앙지방법원은 내렸다. 판결 당일 외교부가 내놓은 입장문에선 당황스러움이 엿보였다. 정반대의 결과에 내놓은 입장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내용도 모호했다.
일본 정부는 예상대로 반발했다. 자민당 외교부회 등은 판결 일주일 뒤인 15일 ‘비난 결의’를 내놓았다. “한국과 관계 자체를 재고하는 것도 포함해, 일본 국내의 한국 자산 동결과 금융제재를 포함한 강력한 조치를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나가타초 정가에선 이 대목을 두고서 “미국의 대북 제재에서나 볼 법한 강한 수위”라는 말이 나왔다. 정부가 못 하는 말을 집권 여당이 대변해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냥 넘길 수 없는 대목이다.
시계를 되돌려 본다. 2018년 10월 30일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의 파급력을 한국 정부는 너무 가볍게 봤다. 외교부가 “한·일 양국 기업이 자발적 출연금으로 재원을 마련해 위자료를 지급하자”는 ‘1+1’ 제안을 처음 내놓은 것은 무려 반년 뒤인 2019년 6월이었다. 협의는 원활히 흘러가지 않았고 그다음 스텝은 익히 아는 대로 일본의 경제 보복이었다.
당시와 비교하면 위안부 판결에 이후 정부의 대응은 속도감은 있는 편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솔직히 당혹스럽다”며 원만히 문제를 풀어가자고 제안했다. 다만 일본 측은 아직 경계심을 풀지 못하고 있다. 특히 “한·일 위안부 합의를 토대로 하자”는데 대해선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반응이다. “한국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엔 반일(反日)이 된다”는 공식에서 이탈하자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바이든 정권 출범 계기로 한·일, 남북, 북·미 동시다발 관계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는 문 정부의 속내를 일본이 모르지 않는다. 코로나19 대응으로 스가 정권이 여력이 없다는 점은 다행일 수도 있지만 악재일 수도 있다. 문 대통령은 “피해자가 동의하는 해법을 찾겠다”고 했다. 이제는 구체적인 액션으로 방향성을 보여줘야 한다. 3년 전 강제징용 판결 이후 겪었던 그 사단이 되풀이돼선 안된다.
윤설영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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