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한녀'로 산다는 것

2021. 2. 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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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여성의 목소리로 엘르가 전하는 세상의 단면들
사진 unsplash

너와 나의 안전한 공동체

첫 직장에서 친구 세 명을 얻었다. 10년 전에 입사했던 그곳을 다닌 시간은 일 년밖에 되지 않지만, 입사 동기로 사회생활을 함께 시작했고 나이와 학번까지 같았던 우리 넷은 그 뒤로도 서로의 생일과 연말연시, 주꾸미 철, 전어 철 같은 제철 음식 따위를 핑계로 자주 모였다. 그걸로는 부족했는지 언제부턴가 계절마다 국내 여행을 다녔고, 나중에는 휴가를 맞춰가며 해외여행까지 함께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다 커서 만난 성인 네 사람이, 심지어 지금은 모두 다른 일을 하고 뿔뿔이 흩어져 지내는데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정답은 알고 있다. 그건 다른 무엇보다 우리가 비슷한 수준으로 ‘한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여성에게 ‘한녀’는 무엇인가. 친척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 밥그릇만 깨끗이 비워도 덕담을 듣는 처지의 누군가와 달리 부지런히 주방을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면 왜 너는 가만히 앉아 있느냐는 시선을 받고 자라온 한국 딸의 특성을 체화한 인간이라는 의미다. 일단 나로 말하자면 나는 누구와 어디를 가도 상전 ‘짓’ 하는 인간을 빠르게 분별하는 편이다. 끝끝내 접시 하나 치우지 않고 받아먹기만 하고도 호감 얻는 사람을 보면 ‘저것도 재주다’ 싶으면서도 나는 절대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느 집단에서든 ‘상전’보다 ‘쇤네’가 되는 것이 맘 편한 이들이었고, ‘한녀’는 우리가 서로를 편의상 혹은 자조적으로 부르는 호칭이 됐다. 나는 내가 가진 여러 성향이 종종 못 견디게 싫었다. 나를 이유도 없이 얕잡아보는 사람에게 인정도 받고 싶었고, 도움은 주되 받기는 어려워했으며, 괜히 꼬투리를 잡는 인간의 삐딱함을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행여 싫은 말을 들을까 봐 상대의 눈치를 살피곤 했다. 그 결과 조금 더 인정받고 조금 더 독립적이고 조금 더 분위기를 잘 살피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일 수도 있는 이런 특성을 굳이 ‘한녀 같다’고 굳이 표현하는 이유는 이것이 한국 남자들에게 상대적으로 극명하게 부재한 면모이기 때문이다.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정에서부터 사회생활까지 상대적으로 덜 눈치 보고 더 쉽게 인정받으며 살아가는 군상이 있다는 것. 그 사실을 몇 번이고 체감하며 받아들이는 것은 스스로도 괴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 동갑내기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면 지긋지긋하게 느껴졌던 내 속성들이 마냥 부정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눈치 빠르고 예민하게 자란 네 여자가 며칠 동안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네 사람 모두 기꺼이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그야말로 ‘쇤네들’이랄까. 그러나 모두 비슷한 수준으로 ‘쇤네’일 때 발현되는 이 배려는 우리가 지난 시간 동안 서로에게 쌓아온 엄청난 신뢰의 핵심이다. 단순히 접시를 누가 먼저 치우냐의 문제가 아니다. 약속 자체에 모두가 성실하게 임하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숙소에서 누군가 요리를 시작하면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할 일을 찾고, 한참 취한 와중에도 번갈아 자연스레 무언가를 치운다. 설령 저녁으로 차린 매운탕이 망하더라도 수고한 누군가를 비난하지 않으며, 행여 누군가 예약한 숙소가 엉망일지언정 그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낄낄댈 따름이다. 4박 5일 내내 운전자를 향해 고생했다는 인사를 잊지 않고, 몰래 돈을 더 내서 원성을 듣는 경우는 있어도 조금 덜 내고 아끼려는 사람은 없다. ‘상전’이 되는 법을 체득한 사람이 없기 때문에 같이 있는 시간이 늘어나도 계급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다양한 사람을 접하며 구성원 전부가 이 균형을 이루는 데 동참하는 것의 어려움을 깨달은 이후 내가 이 안에서 느끼는 안전하다는 감각이 얼마나 소중하고 드문 것인지 한층 절감했다.

비슷한 한녀들은 함께 어디든 갈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여행뿐 아니라 많은 변화를 함께 거치며 처음 만난 장소에서 멀리 이동해 왔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절에는 서로 소개팅을 주선해 주기도 하고,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 남자들과 합석해 놀기도 하고, 서로의 연애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2016년에는 강남역 살인 사건 이야기를 했고, 그 이후에는 이성애 연애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에 따라 노브라 경험을 나누거나 환경 이슈를 공유하고, 비건 메뉴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이전과 비교하면 모두 훨씬 짧아진 머리에, 편한 옷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만나게 된 현재에 이르러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이동시킨 사람과 이동당한 사람의 구분 없이 자연히 함께 지금 여기로 흘러왔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물론 중간중간 입씨름도 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서로의 편이다. 우리 중 유일하게 결혼한 한 명이 연애하던 기간 동안에는 “그 사람과 결혼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던 나지만 결혼을 결정한 친구를 위해 기꺼이 결혼식 사회를 보고, 친구 또한 나를 믿고 맡길 정도로 우리는 ‘같은 편’이다.

세 번의 이사를 했던 지난 10년간 내가 거쳐온 모든 집에서 우리 넷은 집들이를 핑계로 모였다. 그리고 그때마다 하나씩 받았던 냄비와 팬, 에어프라이어가 내 주방을 채우고 있다. 최근 아파트 분양에 당첨돼 독립한 친구 집에 꽃을 사들고 찾아갔을 때 그가 우리를 위해 차려준 어마어마하게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을, 이제는 결혼해 먼 지역에 살게 된 친구가 오직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여벌 침구를 사고 좋은 향기가 나도록 준비해 둔 사실을 누구도 무심히 넘기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다정하기 위해 기꺼이 무릅쓰고 있는 번거로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 일상을 드문드문 나누다가 고작 몇 달에 한 번 모이는 사이, 시간 흐름에 따라 언제든 사소한 계기로 비틀어져 버리는 여자들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어릴 때부터 질릴 만큼 들었다. 그러나 ‘그럴 수도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만큼 서로에게 아무 법적 권리도, 의무도 없는 이들과 보내는 시간이 내가 아는 가장 편안한 시간이다.

writer_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의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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