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현의 '인물로 보는 차 이야기'] (6) 茶 수입에 수만금이라니..국산 茶 장려한 금나라 장종 스토리
요나라, 금나라는 넓은 초원 위에 세워졌다. 그 초원에 우수한 품종의 말이 가득했다. 송나라와 전쟁을 할 때면 요나라, 금나라 군대는 번개처럼 빠른 말을 타고 나왔다. 이들과 싸우려면 송나라 군대에도 말이 있어야 했다. 송나라는 요나라와 금나라 말을 사려고 시도했다. 요나라와 금나라는 송나라의 종이, 책, 그릇 등 여러 가지 최신식 물품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차를 필요로 했다. 유목민으로 떠돌며 사는 그들은 농사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채소를 전혀 섭취하지 못했다. 식사로 양고기, 소고기와 버터를 먹고 양젖, 소젖을 마셨다. 기름지고 느끼하고 소화가 안되는 육식 위주 식사를 장기간 하다 심혈관질환을 비롯한 각종 질병에 걸렸고 결국은 고통스럽게 앓다 죽어갔다. 우연히 송나라 차를 접하고 차가 이런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 후로는 (차에는 심혈관질환을 완화하는 폴리페놀 등의 화학성분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금나라와 요나라 백성 사이에 차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다 금나라는 1127년 마침내 송나라에 쳐들어간다. 이런 순간에 황제는 백성에게 힘이 되지 못했다. 평소 뛰어난 예술가이자 지독한 골동품 수집가였던 휘종 황제는 국고를 탕진해가며 옛 그림과 글씨, 청동기, 그릇들을 수집해 황실 창고에 차곡차곡 저장해뒀다. 그의 수집품 중에는 ‘화석강’이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돌도 포함돼 있었다. 휘종 황제는 전국 각지의 빼어난 화석강을 찾아 수도까지 배로 실어 날랐다. 화석강이 너무 커서 성문을 지나가지 못하면 가차 없이 성벽을 부쉈다. 아무리 평화로운 시기라도 성벽을 부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휘종 황제에게는 국가와 백성의 안위보다 예술이 더 중요했다. 부숴진 성벽으로 인해 결국 사달이 났다. 금나라 군대가 부서진 벽을 통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오자 송나라 군대는 변변하게 대항 한 번 못해보고 맥없이 무릎을 꿇었다.
휘종 황제의 9번째 아들이 간신히 남쪽으로 도망가서 나라를 다시 세우고 명맥을 유지했다. 이 나라가 남송이다. 전쟁 후 남송은 금나라를 형님의 나라로 모셨다. 해마다 많은 공물을 바쳤는데 차도 포함돼 있었다. 남송은 국경에 무역대표부를 세웠다. 이 무역대표부를 거쳐 차를 금나라에 보냈다. 차는 송나라가 집중 관리하는 상품이었다. 남송은 금나라에 차를 공급하다가 말다가 했다. 공급 금지령이 내렸을 때 이를 어기고 몰래 공급하는 자가 있으면 가산을 몰수하는 등 엄하게 처벌했다. 금나라보다 약한 입장이면서도 여전히 차로 금나라를 통제하려 한 것이었다.
금나라 장종 황제는 아이디어를 냈다.
“백성들이 차를 많이 소비하는데 하필 차가 적국인 송나라에서만 나니 어려움이 많구나. 우리도 차를 만들 수는 없을까?”
장종은 지금의 산둥성, 랴오닝성, 장쑤성, 허난성 등지에 차나무를 심었다. 본래 차나무는 기후에 민감한 작물이다. 따뜻하고 습한 곳에서 잘 자란다. 중국의 주요 차 산지가 남쪽에 있는 것이 그런 이유 때문이다. 기후가 맞지 않으면 차나무가 죽거나 설령 살아남는다 해도 생산량이 적고 차로 만들었을 때 맛이 없다. 장종이 심은 차나무는 다행히 죽지는 않았다. 잎도 수확했고 가공장을 열어서 차도 만들었다. 어쨌거나 성공은 했기에 황제는 기분이 몹시 좋았다. 국산 차를 열심히 권장하고 자기도 직접 마셨다. 그러나 입맛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짐이 새 차를 마셔 보니 맛이 좋지는 않으나 마시지 못할 것도 아니다.”
차를 생산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들었고 따라서 가격이 높게 책정되는데 맛도 없으니 수입 차에 비해 경쟁력이 너무 떨어졌다. 국산 차를 취급하겠다고 나서는 상인이 없었다. 결국 장종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차 가공장을 폐쇄하고도 장종은 못내 아쉬워했다. 그래서 “차를 만들지 않더라도 차나무는 베지 말라”고 했다. 몇 년 후 허난성에 심었던 차나무가 말라 죽었을 때는 나무를 새로 심으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눈물겨운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후에도 백성의 차 소비는 여전히 지나치게 많았다. ‘금사(金史)’에 장종에게 올라온 상소가 실려 있다.
“차는 반드시 필요한 물품이 아닙니다. 그런데 해마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다퉈 마시고 있습니다. 특히 농민들이 심합니다. 시정에 차 가게가 줄지어 들어서고 상인들이 비단으로 차를 바꿉니다. 매해 쓰는 돈이 엄청납니다. 이는 쓸모 있는 물건으로 쓸모없는 물건을 바꾸는 격입니다.”
그래서 장종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백성들이 차를 마시지 못하게 금지한 것이다. 다만 7품 이상 관리는 집에서 차를 마시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이 1206년의 일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223년에 두 번째 금차령이 내려진 것을 보면 이 금지령은 큰 효과를 보지 못한 듯하다. 차가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사람들에게 금지령이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훗날 영국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이는 역사의 소용돌이로 이어졌다.)
휘종과 장종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자. 한 명은 송나라 황제고 한 명은 금나라 황제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은 공통점이 많았다. 휘종은 거문고를 무척 좋아해서 전국의 거문고를 수집했다. 자신이 거문고를 연주하는 그림도 그렸다. 그가 수집한 거문고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당나라 때 만든 ‘춘뢰’라는 것이다. 송나라가 망한 후 ‘춘뢰’는 장종의 것이 됐다. 장종은 이 거문고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죽은 후에 무덤까지 가져갔다. 장종도 휘종처럼 예술을 사랑하고 글과 그림을 좋아했다. 특히 휘종의 수금체를 얼마나 열심히 따라 썼는지 휘종이 쓴 수금체로 알려진 작품들이 여러 해가 지난 후에 사실은 장종의 작품이었다고 밝혀진 경우가 종종 있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5호 (2021.02.03~2021.02.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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