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안 미로의 독창적 초현실주의 "꿈을 꾸듯 그렸다"
스페인의 거장 예술가 하면 당신은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회화 역사상 최초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바로크 대가 벨라스케스, 또는 인지도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역대 가장 높은 경매가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모던 천재 피카소, 혹은 특징적인 콧수염으로 널리 알려진 초현실주의 거장 달리를 꼽는 이들이 많을 테다. 하지만 풍부한 상상력이나 다양한 재료, 기법에 대한 정통에 있어서는 이 예술가를 따라올 수 없으리라. 회화, 벽화, 판화, 의상 디자인, 시, 조각, 세라믹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시도한 모든 것에 통달한 정말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한 명인 호안 미로(Joan Miro, 1893~1983년)다.
당대 많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미술학교에 진학, 곧 세계 미술의 메카였던 파리로 떠난다. 초창기에는 야수파와 입체파의 영향이 크게 엿보이는 작품을 선보였다. 하지만 아이티의 부두교 미술 등 원시미술로 관심이 옮겨 가면서 이내 자신만의 회화적 기호 개발을 통해서 독창적인 초현실주의풍 그림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그 좋은 예가 추상적인 여백의 배경과 서정적이면서 자유로운 이미지 그리고 손 글씨가 멋진 조화를 이루는 ‘회화-시(Painting-poem)’ 연작이다.
무의식과 상상력을 중시하기 위해 사실주의를 버리고 미로가 선보인 첫 번째 연작은 서정적이면서도 자유로운 형태가 돋보이는 ‘회화-시’ 연작이다. 그리고 이 연작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검은 머리 여인의 몸’이다. 이 그림에서 그녀의 흔적은 유령 같은 하얀 붓 자국과 두 개의 작은 파란 동그라미로 표현된 가슴에서 엿볼 수 있다.
파리 생활 초창기 시절, 미로는 극심한 허기에 시달리다가 환상을 보고는 했다. 천장과 벽에 생긴 갈라진 틈에서 흥미로운 형태들을 봤고 이를 공책에 기록했다. 이것이 미로 회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즉흥적으로 그려진 다양한 형태의 출발점이었다. 1925년에 그린 ‘검은 머리 여인의 몸’은 회화의 전통적인 경계를 뛰어넘어 무의식의 표출을 통해 새로운 정신적 공간 창조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한 상징주의자들의 시에 등장하는 다의적 단어와 은유를 회화적으로 창조한 작품으로 높이 평가된다.
미로는 파리와 스페인을 오가며 작업하던 중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자 다시 파리로 터전을 옮겼다. 그러나 1939년 독일의 파리 점령으로 급히 프랑스 교외 지역으로 탈출해야 했다. 미로는 이 과정에서 전쟁의 흔적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얻게 된다. 그리고 이를 ‘별자리(Constellations, 1940~1941년)’ 연작으로 구현해낸다. 이 연작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그에게 또다시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되는데, 미국으로의 여행과 벽화 작업이다. 이 벽화 주문으로 그는 각각 9m와 6m에 달하는 대형 벽화를 만들게 된다. 여기서 ‘별자리’ 연작을 비롯, 과거 자신의 작품에서 실험했던 다양한 요소들이 집대성되는 결과를 얻는다.
전술한 바와 같이, 미로는 다양한 재료와 기법에 정통한 몇 안 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일례로 그의 기념비적인 대형 청동 조각 ‘여성(Femme, 1969년)’을 보라. 원초적인 본능, 대지의 비옥함과 풍부한 상상력에 대한 축복을 표현한 작품이다. 몸 전체가 얼굴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조각은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로 자유롭게 변형하는 미로의 출중한 감각을 보여준다. 50대에 들어 조각 기법을 혼자 터득하고 개발한 이의 조각이라고 믿기 어려운 완성도가 아닌가. 처음에 그의 조각은 회화의 부수적인 성과물 정도로 평가됐다. 하지만 미로가 2차원 회화와는 또 다른 창작의 즐거움을 발견했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대형 청동 조각은 그의 또 다른 예술적 성취이자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인정받는다.
오랫동안 잊힌 고대의 신화들과 무의식적인 태초의 형태들을 떠올리는, 마치 한 편의 새롭고 독창적인 시와 같은 그의 매혹적인 작품들이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하지 않는가.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095호 (2021.02.03~2021.02.16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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