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산책] 고래, 길고양이, 마애불에 말을 걸다

최동현 2021. 2. 4. 11:28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세대 여성 설치미술가 홍이현숙 개인전 '휭, 추-푸'
'휭, 추-푸'의 '여덟 마리 등대'라는 공간에 설치된 뗏목의 모습.

[아시아경제 최동현 기자] "끼이우우욱… 끄르륵."

어둡고 텅 빈 곳에서 귀신이 우는 듯한 소리가 귀를 찔렀다. 고래 울음소리란다. 한 마리가 울면 이를 받아 대화하듯 또 다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대화가 13분 동안 이어지더니 고래들은 곧 심해로 사라졌다.

서울 종로구 아르코미술관에서 1세대 설치미술가 홍이현숙 작가(63)의 개인전 ‘휭, 추-푸’가 열리고 있다. 첫 번째 전시장 ‘여덟 마리 등대’로 들어서자 청각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이곳에서는 스피커 8대에서 고래 8종의 울음소리가 15분 간격으로 울려 퍼진다. 고래 울음소리는 미국과 영국의 해양연구소에서 제공받아 각종 잡음을 제거해 사람이 들을 수 있는 형태로 변형한 것이다.

작가는 고래 울음소리를 가져온 것에 대해 "인간과 비인간의 소통을 위해서"라고 말했다. 언어는 인간만의 소통 도구로, 바깥 존재들과 오히려 멀어지게 하는 장애물이다. 고래는 고주파와 저주파 음역을 오가는 소리로 자기들끼리 소통하고 외부 세계에 대해 인지하며 넓은 바다를 유랑한다. 작가는 관객이 고래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봄으로써 그들과 비언어적으로 소통하게끔 유도한다.

인간이 비인간과 원활히 소통하려면 문자부터 집어던져야 한다. 이번 전시 제목이 ‘휭, 추-푸’인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휭’은 뭔가 날아가는 소리, ‘추-푸’는 어딘가에 부딪히는 소리다. ‘추푸’는 남아프리카 토착민 언어인 케추아어로 동물의 신체가 바람에 날리거나 수면에 부딪히는 소리를 뜻하기도 한다. 의성어나 의태어를 제목에 사용한 것과 관련해 작가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열린 소리와 몸을 통해 인간 대 비인간이라는 근대적 이분법 논리에서 벗어나 동물과 동등하게 소통하자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공간 한편에는 작은 조명 아래 안테나 달린 뗏목 하나가 떠 있다. 뗏목은 이내 작은 방으로 변한다. 바닥은 찐득찐득 달라붙는 장판으로 돼 있고 구석에 아담한 작업용 테이블이 놓여 있다. 테이블 위에 고양이를 만들다 만 것 같은 찰흙덩이가 올려져 있다. 작가가 실제 살고 있는 방을 뗏목 형태로 형상화한 것이다.

작가의 권유로 뗏목에 앉으니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기울어지다 이내 솟구쳤다. 출렁이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방은 작가의 내면, 고래 소리가 들리는 텅 빈 공간은 자연, 뗏목은 그에 다가가려는 작가의 의지와 욕망을 표현한 듯하다.

'휭, 추-푸'의 '석광사 근방'이라는 전시장에서 홍이현숙 작가가 고양이와 소통하는 모습이 상영중이다.

2층 ‘석광사 근방’이라는 전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니 길고양이들에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작가의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다. 석광사는 재개발 예정지인 은평구 갈현1동에 자리 잡은 사당으로 산신이 타고 다니는 호랑이상을 모신 곳이다. 호랑이는 영성과 신성을 상징하는 영물로 추앙된다. 하지만 길고양이들은 같은 고양잇과임에도 인간에게 종종 혐오의 대상이 된다. 작가는 "이곳이 재개발되면 그야말로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지붕 위에 올라가 고양이들과 같은 시선으로 동네를 바라보거나 좁은 담벼락 위를 위태롭게 기어가기도 한다. 고양이들의 삶의 터전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 역시 비인간인 동물과 소통하며 자연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다.

"이 같은 시도는 동물들을 뛰어넘겠다거나 의인화하겠다는 게 아니다. 그들과 나 사이의 차이들을 몸에 더 각인하고 결국은 인간의 입장에서 공존 기술을 배우고 살아가려는 것이다. 예술은 이것이 가능하도록 길을 터줄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전시장에는 북한산 승가사 소재 마애불을 작가의 시선을 따라 눈으로 어루만질 수 있는 ‘지금 당신이 만지는 것’이라는 공간이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대면과 접촉의 기회가 갈수록 줄어드는 시대에 촉감 아닌 시각과 청각 그리고 상상력으로 대상을 만져보려는 시도다. 방구석에서 모니터 속의 모든 비인간과 마주해야 하는 날 이런 ‘제3의 감각’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이번 전시는 다음 달 28일까지 이어진다.

최동현 기자 nell@asiae.co.kr

Copyright © 아시아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