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뻔한 사고 후에도.. MBC에서 일어난 이상한 일

윤찬영 2021. 2. 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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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해고 제기한 두 방송작가 ①] 방송국의 거짓말

[윤찬영 기자]

1999년 마산 MBC 방송작가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990년대 들어 SBS가 개국을 하는 등 바야흐로 상업방송 시대가 열리면서 방송사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방송 제작 업무도 세분화·전문화되던 때였다.

PD(프로듀서) 혼자 도맡았던 방송 기획과 구성, 자료 조사와 원고 작성을 함께 해나갈 전문 인력이 필요해졌고, 방송사마다 대규모 공채로 방송작가들을 뽑기 시작했다. 사회 활동에 목말라 있던 20~30대 여성들에겐 더없는 기회로 여겨졌다.

하지만 어렵게 기회를 잡은 이들이 맞닥뜨린 현실은 기대와 달랐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저임금과 고용 불안, 차별과 부당한 대우였다. 참다못한 작가들이 노조를 만들고 마산 MBC를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하고 나섰다. 고용계약서 작성과 채용·퇴직 기준 마련, 고료 현실화 등을 내걸었다.

그러나 회사는 수차례의 교섭 요구를 묵살했고, 노조는 경남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2001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1990년대 방송작가들의 현실을 다룬 기사
ⓒ 한겨레
 
20년 전 대법원 앞에서 돌아섰던 작가들
지노위는 '각하' 판정을 내렸다. 여기서 각하란, 신청인들이 자격이 없어 신청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부당노동행위 구제신청은 '노동자'만 할 수 있는데 방송작가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노동자가 아니므로 신청 자격이 없다고 본 것이다. 노조는 곧바로 중앙노동위원회(중노위)에 재심을 신청했다. 중노위의 판단은 달랐다. 방송작가를 노동자로 보고 회사가 교섭에 응해야 한다고 판정한 것이다.
 
구성작가는 PD를 포함한 제작진들과 팀을 이루면서... 프로그램 제작의 전반적인 과정에 참여하고 있으며, 근무시간 및 근무장소도 실질적으로 담당 PD에 의해 결정되는 점을 고려할 때 신청인 회사와 구성작가 사이에 노조법상 요구되는 종속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 중노위 판정서 중에서

이번엔 마산 MBC가 중노위 판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행정소송을 제기했고, 서울행정법원(1심, 2002년 11월)과 고등법원(2심, 2003년 11월)은 잇따라 사측의 손을 들어줬다. 노조는 억울했지만 더 이상 상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훗날 이를 바탕으로 논문을 쓴 임현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왜냐하면 구성작가 업무의 실질적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법정에서 방송사라는 거대 권력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여성노동과 특수고용직에 대한 이해가 무르익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구성작가, 나아가 특수고용직에 불리한 대법원 판례만 남길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 것이다.

노조에 참여했던 작가들은 모두 잘렸고, 그 뒤로 방송사들은 공개채용을 꺼렸다. 공개채용이 곧 방송사가 작가의 근로감독기관이며 계약 당사자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서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방송작가들의 처지는 나아졌을까.

20년 후

지난해 6월 MBC는 2011년부터 거의 10년간 아침 뉴스인 '뉴스투데이' 제작에 참여했던 방송작가 3명을 해고(계약 해지)했다. 계약 기간을 6개월이나 남겨두고 있었지만 작가들이 맡았던 '이 시각 세계'와 '아침 신문 보기' 코너 등을 개편 또는 폐지하기로 했다는 게 회사가 내세운 이유였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개편한다던 '이 시각 세계'는 진행자만 바뀌었고, 폐지된다던 '아침 신문 보기'는 '뉴스 열어보기'로 이름을 바꿔 그날 조간신문에 더해 SNS나 영상 플랫폼에 올라온 소식까지 소개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들은 여러 차례 회사에 자신들이 그만둬야 하는 이유를 물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결국 세 명 가운데 두 명이 서울지방노동위원회(지노위)에 MBC를 상대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MBC는 이들 작가들은 근로 계약이 아닌 '업무 위임 계약'을 맺은 프리랜서이므로 계약에 따라 적법하게 계약 해지가 이뤄졌다며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작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지노위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한 이지은(가명)·김지영(가명) 두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위임 계약'을 맺긴 했지만 실제로는 지난 10년 가까이 회사의 구체적 지휘와 감독을 받으며 다른 정규 직원들과 별다를 바 없이 일해 왔으므로 정당한 이유 없는 일방적 해고 통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대법원도 줄곧 '계약의 형식'보다는 '임금을 목적으로 종속적인 관계에서 일을 했는지'를 따져 법이 정한 노동자인지 아닌지를 가려왔다. 그러니까 이번 다툼의 쟁점은 두 작가가 회사로부터 구체적인 지휘·감독을 받았는지, 또 이들이 일한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었는지 등이다.

지난해 10월과 11월, 지노위는 두 작가가 낸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잇따라 각하했다. 이번에도 20년 전과 같은 이유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 건은 사측의 부당노동행위(단체교섭 거부)가 아닌 개별 작가들의 부당해고를 다투고 있어 노조법이 아닌 근로기준법에 따라 노동자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는 점이다. 보통 노조법에 따른 노동자성이 근로기준법에 따른 그것보다 더 넓게 인정된다는 점에서 이번 싸움은 방송작가들에게 조금 더 힘든 싸움이면서 동시에 더 본질적인 싸움이다.

두 작가는 2017년 결성된 방송작가유니온(전국언론노동조합 방송작가지부)과 함께 곧바로 중노위에 재심을 신청해 현재 재심 조사가 진행 중이다. MBC를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이는 두 작가의 말을 두 편에 나눠 전하려 한다. 두 작가와의 인터뷰는 최근 모두 화상으로 진행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출근해 데스크 지시로 일했는데...
 
 2011년 합격 통보 뒤에 받은 문자 메시지
ⓒ 방송작가유니온
 
이지은 작가는 지난해 6월 MBC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기까지 매일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서울 상암동 MBC 본사 7층 보도국 사무실로 출근했다. 2011년 입사시험을 거쳐 합격 통보를 받은 날 당시 김아무개 부국장은 다음 날 새벽 4시까지 뉴스투데이를 제작하는 보도국 편집2부 사무실로 나오라고 지시했고, 그 뒤로 10여 년을 그렇게 일해 왔다. 그 사이 달라진 게 있다면 사무실이 여의도에서 상암으로 옮겨진 것 정도다.

이 작가는 평일 새벽 6시부터 방영하는 뉴스투데이에서 '이 시각 세계' 코너를 담당해왔다. 밤사이 전 세계에서 타전된 외신들 가운데 몇 편을 골라 소개하는 코너다. 

이 작가가 설명하는 업무 과정은 이렇다. 먼저 출근하자마자 <시엔엔(CNN)>, <로이터>, <에이피(AP)>에 더해 <연합뉴스>까지 네 개 매체를 보면서 주요 뉴스(영상)들을 골라 문서로 목록을 정리해 차장에게 보고한다. 뉴스거리가 많을 땐 30개에 달할 때도 있고, 적은 날은 10개가 안 될 때도 있다. '필리핀 화산 폭발, 사상자 20명' 식으로 핵심을 추리고 '로이터 OOOO'처럼 영상 번호를 단다. 차장이 그날 내보낼 뉴스를 결정하기 위해 해당 영상을 직접 보려고 할 때가 많아서다.

차장은 PD(프로듀서)라고 불렀지만 10년 정도의 경력을 가진 기자다. 이 작가가 주요 외신을 따로 정리해 보고한 이유는 차장은 외신 말고도 다른 뉴스들도 두루 살펴야 하는 데다 일일이 영상을 확인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작가는 차장이 놓치는 뉴스가 없도록 모든 외신을 꼼꼼하게 살펴서 가급적 많은 뉴스들을 추려내야 했다. 그렇다고 이 작가에게 결정권이 있는 건 아니었다고 한다.

"만약 저한테 결정 권한이 있었다면 방송에 필요한 개수(5~7개)만큼만 뉴스를 뽑았겠지만 그럴 수 없었어요. 개수가 너무 적으면 눈치가 보이거든요. 정말 뉴스거리가 없는 날엔 차장님이 아침에 배달된 신문 국제면을 보고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라고 지시하기도 했어요. 그런데도 '작가가 목록을 뽑아 보고했으니 재량권이 있었다'라는 식으로 (회사가) 주장하는 건 명백한 거짓말이에요.

제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었어요. 회사에서 정한 가이드라인도 따라야 하고 차장님이나 부장님, 국장님이 원하는 방향도 맞춰야 했어요. 저는 어디까지나 이 분들을 보조하는 역할일 뿐이고, 최종 결정은 데스크의 몫이죠."

이 작가에 따르면, 뉴스투데이를 제작하는 보도국 편집2부엔 국장 역할을 하는 안아무개 부국장(국장)과 2명의 부장 그리고 4명의 차장이 있다. 모두 현직 기자다. 4명의 차장은 돌아가면서 밤샘 근무를 하는데 전날 오후에 출근해서 다음날 있을 뉴스를 준비한다. 짧게는 두세 달 일하다 가기도 하고 길게는 2년 정도 맡기도 한다. 부장은 2명이 번갈아가면서 이틀에 한 번씩 맡는다.

지난 9월 지노위 심문에 출석한 편집2부 모 간부는 "(이 작가가) 아이템 선정을 해 오시면 '이거 좋네요, 이거 올리죠', 이 정도 선에서 자율성을 인정하는 게 대부분이고 수정도 드물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작가가 밝힌 과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먼저 차장이 그날 방송에 내보낼 뉴스를 고르면 이 작가는 마스(MARS)라는 사내 시스템에 정해진 뉴스의 목록과 순서를 올려 다른 스태프들이 볼 수 있도록 한다. 그러면 연출을 맡은 스태프(계약직)가 큐시트에 이를 반영한다. 아직 출근하지 않은 부장 책상에도 차장이 선택한 뉴스와 방송 순서를 표시해 한 부 올려둔다. 그런 뒤에야 이 작가는 리포터가 방송에서 읽을 원고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작가는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한다.

"부장님이 출근하셔서 제가 책상 위에 올려둔 목록을 보고 마음에 안 들면 바꾸는 일도 많아요. 그러면 저는 원고를 쓰다 말고 새로 원고를 써야 하죠. 차장님이 정한 목록을 부장님이 다 뒤엎는 일도 꽤 많은데, 차장님으로선 자존심 상해도 어쩔 수 없죠.

국장님은 주로 우리 생방송 뉴스를 보고 지시를 하시는데, 2부에서 처음 방영되는 걸 다른 매체의 비슷한 코너와 비교하면서 두 번째 방영(하루에 두 번 방영된다)되는 3부에선 어떤 기사를 추가하거나 빼라고 지시를 하시죠. 그러니까 차장님과 부장님의 지시는 매일 있다고 보면 되고, 여기에 가끔 국장님 지시가 더해지죠. 이런 상황에서 저한테 결정 권한이 있다고 하는 건 억지예요."

입증 책임은 작가 몫이라며 자료 못 준다는 MBC

그렇다면 모 간부의 주장처럼 원고를 수정하는 일도 드물었을까.

"원고를 작성해서 마스에 올리고 차장님께 봐달라고 해요. 바로 뒷자리인 차장님 자리로 가서 옆에 서서 어떤 부분을 수정하시는지 지켜봐요. 가장 흔한 수정(지시)은 기사의 길이 또는 구성에 관한 거죠. 어떤 사실을 맨 앞에다 놓을지 같은 것들... 너무 무미건조하게 쓴 경우엔 영상 묘사를 추가하라고 하기도 하고...

다시 수정해서 올리면 차장님이 검토하신 뒤 직접 출고 버튼을 눌러서 출고하세요. 저한테는 출고 버튼을 누를 권한이 없어요. 물론 버튼을 누를 순 있지만 차장님의 허락이나 지시 없이 누를 순 없다는 뜻이에요. 차장님이 바쁠 경우에만 지시한 것들 다 수정한 뒤에 직접 출고하라 하시죠. 제가 쓴 원고는 어디까지나 초고일 뿐이에요."

MBC는 지노위에 보낸 답변서에서 회사의 지휘·감독을 입증할 책임은 작가들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작가는 이미 해고를 당한 상태에서 증거를 확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누군가 사무실에서 소리를 지르며 폭언을 하거나 심지어 성폭력 같은 큰 범죄를 저지른 경우라도 회사의 도움 없이는 증거를 확보하기 힘든데, 이처럼 매일같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업무 지시의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 쉬울 리 없다.
 
 방송작가유니온의 시위 모습
ⓒ 방송작가유니온
 
2011년 합격 통보를 받던 날 이 작가를 뽑은 당시 부국장은 전화로 바로 다음 날 4시까지 사무실에 나와서 업무 이월도 받고 방송 제작 과정도 직접 살펴보라고 했다고 한다. 이 작가는 지시대로 사무실에 나와 국제부 기자로부터 업무를 이월 받고 분위기도 익힌 뒤 뉴스가 끝나고서 사무실을 나왔다(이 작가가 맡기 전엔 국제부 기자들이 번역 작가의 도움을 받아 한 달씩 돌아가며 하던 일이다. 3년 뒤인 2014년부터는 제작비를 줄여야 한다며 번역 작가마저 없애는 바람에 이 작가가 모든 번역을 떠맡았다).

"업무를 이월해준 기자도 제가 사무실에 나와 함께 일하는 걸 전제로 설명했고, 한 번도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이 없었어요. 우리 팀의 그 누구도 제가 사무실에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재택근무를 해도 된다고 얘기한 사람도 당연히 없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제작 여건도 아니었어요. 수시로 지시를 받아야 했으니까요."

이 작가는 원고를 넘긴다고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고 한다. 방송이 제대로 나갔는지 확인하는 일도, 방송이 끝나면 모니터링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도 이 작가의 몫이었다는 것. 그 뿐이 아니다. 어떤 이유로든 방송에 차질이 생기면 그 뒷수습도 이 작가가 해야 했다고 한다.

"리포터가 늦게 오면 연락도 차장님이나 연출자가 아니라 저더러 하라고 했어요. 만약 리포터가 좀 버벅대거나 실수를 해도, 편집 영상에 문제가 있어도 일단 저를 불러서 왜 그랬는지 확인해보라고 해요. 하다못해 차장님이 그런 일로 리포터를 부를 때도 직접 부르지 않고 저한테 얘기해요. 그러니까 당연히 (프리랜서처럼) 원고만 넘기고 집에 갈 수 없었고 생방송 내내 대기하고 있어야 했죠.

회사에선 제가 무슨 자율권을 가진 것처럼 주장하지만 권한은 없이 의무만 잔뜩 떠맡겼다고 하는 게 정확하죠. 편집2부에서 '이 시각 세계' 코너 하나만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작가들에게 그 코너에 대한 책임을 지우는 느낌이었어요."

여름휴가 다녀왔더니 회사는 발칵 뒤집히고...

2019년 5월 이 작가는 차를 몰고 출근하다 새벽 빗길에 미끄러져 큰 사고를 당했다. 차를 폐차해야 할 만큼 큰 사고였지만 다행히 에어백이 터져 제 발로 걸을 순 있었다. 이 작가는 곧바로 연출자에게 전화를 해서 늦을 것 같다고 알렸고, 무슨 일이냐고 물어 어쩔 수 없이 '교통사고가 나서 다른 교통편을 알아봐야 한다'라고 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어머니에게 전화해 회사에 가야 하니 차를 가지고 와달라고 부탁했다. 

"어머니가 처음엔 왜 조심하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셨는데, 막상 현장에 오셔서는 '얘가 죽을 수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에 충격을 받으셨어요. 정말 제가 죽었을 거라고 생각한 다른 차량 운전자들이 신고를 해서 구급대가 왔는데, 제가 회사에 가겠다고 했더니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더라구요. 결국 후유증이 생겨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각서에 사인을 했어요. 어머니는 회사로 데려다주시면서 참담해하셨죠."

이 작가에겐 그날 어머니에게도 차마 말 못할 사정이 있었다. 사고가 나기 아홉 달 전인 2018년 여름, 이 작가는 당시 국장이 여름휴가를 다녀오라고 해서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 사이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는 것.

이 작가가 없는 동안 야간 당직을 서는 국제부 기자에게 밤사이 쓴 기사 가운데 '이 시각 세계' 코너에 내보낼 기사 몇 개만 골라달라고 하기로 편집2부 부장과 국제부 부장이 합의를 했는데, 막상 당일에야 그 지시를 받은 기자가 '내가 왜 휴가 간 작가 일까지 떠맡아야 하느냐'며 당시 보도국장에게 달려가 따졌다고 한다. 보도국장은 편집2부 부장과 국장을 불러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라고 지시했고, 휴가에서 돌아온 이 작가는 '앞으로는 휴가를 못갈 것 같다'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사고를 당한 날도 그 때의 악몽이 되살아나면서 몸이 움직이는 한 회사에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그냥 전화 끊고 회사로 갔어요. 죽음의 공포를 느꼈지만 어쨌든 살았으니까, 회사를 안 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책임을 생각하면 너무 아득한 거예요. 어머니는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일이냐,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회사를 가야 하냐'고 하셨지만 제가 겪은 일을 다 설명할 순 없었으니까..."

이 작가는 지난 10년간 딱 4번 휴가를 다녀왔는데, 회사 파업 때나 (국내 뉴스가 넘치던) 대선 때 또는 부장·국장과 상의해서 코너를 며칠 쉬기로 하고 주말을 끼고 다녀온 게 전부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작가의 일을 누군가 대신 해준 적은 없었던 셈이다.

"박성제 사장님, 이렇게까지 하셔야 했나요?"

이 작가는 해고 통보를 받은 뒤 편집2부 책임자인 안아무개 국장에게 해고 사유를 물었다. 그는 부장이 그렇게 하길 바랐다고 했지만 함께 해고를 당한 김지영 작가에겐 사장의 지시라고 했다고 한다. 이 작가는 국장의 말과는 달리 부장은 오히려 해고를 원치 않아 무척 힘들어했다는 얘기를 어느 차장한테서 전해들은 게 전부였다고 한다.

"국장님은 인적 쇄신을 내세우지만 경험도 없는, 자기가 아는 작가를 데리고 왔어요. 정말 인적 쇄신이 필요했다면 더 경험 많은 작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또 개편이라고 하지만 '이 시각 세계' 코너는 진행자만 바뀌었을 뿐 이름도 포맷도 그대로예요."

이 작가는 억울한 마음에 10년 전 보도국 부장으로서 면접심사에도 들어와 자신을 뽑았던 현 박성제 MBC 사장에게 장문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다른 분도 아니고 저를 뽑아서 교육까지 시킨 사장님께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하시냐'고. 그러나 박 사장은 아무 답을 하지 않았다.

지노위에 출석한 회사 측 대리인은 "작가는 시청률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고 고정되어 있으면 프로그램 자체를 제작할 수 없기 때문에 프로그램(개편)에 따라 계속 바뀌어야 하고, 한 프로그램이 유지되더라도 새로운 모습을 띠어야 하기 때문에 (작가를) 지속적으로 쓰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이 작가의 옛 동료가 혹시 모를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써준 진술서
ⓒ 방송작가유니온
 
2014년부터 2년간 이 작가와 같이 일했던 동료(계약직)는 이 작가를 위해 진술서를 작성해 지노위와 중노위에 증거로 제출했다. 진술서에는 "이OO 작가가 근무하는 기간 내내 차장, 부장 등으로부터 원고 작성과 관련해서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받았다"라는 구체적 지휘와 감독 내용 등이 자세히 담겼다. 그리고 진술서는 이렇게 맺고 있다.
 
제가 이렇게 진술을 하는 이유는 이OO 작가가 해온 일에 대해 보고 들은 게 있는데 회사가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로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으로 꾸며 진실을 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약자인 비정규직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MBC가 정작 내로남불의 행태로 약자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노동자에 대한 언론의 책임 있는 자세를 기대하며 제 진술에 어떠한 거짓도 없음을 맹세합니다.

권오성 성신여대 교수(지식산업법학과)는 근로자성 판단에 관한 '입증 책임의 전환'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 교수는 "인적 종속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성을 근거 짓는다는 전통적 인식을 도그마 삼아 비전형노동자를 근로기준법 적용 대상에서 배제하는 방식으로는 노동법이 당초 추구했던 목적과 현실의 괴리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모든 일하는 사람의 규범적 기본값을 '근로자'라고 추정하고, 이러한 추정을 깨뜨리고 싶은 당사자(회사)가 반증의 입증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권 교수는 2006년 ILO(국제노동기구) 고용관계 권고(제198호)를 소개했는데, 권고에는 고용관계를 판단할 구체적 지표로 다음과 같은 것이 담겼다.
 
(a) 상대방의 지시와 통제에 따라 업무 수행, 노동자가 기업조직의 일부로 통합, 전적으로 또는 주로 상대방의 이익을 위해 업무 수행, 해당 노동자에 의해 직접 업무 수행, 업무를 요구하는 당사자가 결정하거나 합의한 특정 노동시간이나 작업장에서 업무 수행, 업무가 특정 지속기간과 연속성을 가짐, 해당노동자의 가용성(availability)이 요구됨, 업무를 요구하는 당사자가 도구ㆍ자재ㆍ기계 제공

(b) 노동자에 대한 정기적 보수 지급, 이러한 보수가 해당 노동자의 유일한 소득원이거나 주요 소득원이라는 사실, 음식ㆍ숙소ㆍ교통 등 현물 지급, 주휴일과 연차휴가 수급자격, 업무를 요구하는 당사자가 업무수행을 위한 출장경비 지급, 해당 노동자에 대한 재정적 리스크 부재.

만일, 이러한 지표 중 하나라도 들어맞을 경우엔 (법원은) 고용관계가 존재한다는 법률상 '추정'을 제공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는 게 권 교수의 설명이다.

이 작가가 지노위에 제소하기로 했을 때 주변에선 다들 말렸다고 한다. '그렇게 큰 회사를 상대로 일개 작가가 어떻게 이기겠냐'며, 상처만 받을 거라고 했다.

"우리가 다시 작가로 일하지 못하더라도 알리자고 했어요. 결과를 장담할 순 없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성실하게 일해 온 나 자신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냥 침묵하고 넘어가면 계속 화가 날 것 같았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왜 그런 대접을 받고도 항의 한 번 못했느냐고, 나중에도 스스로 두고두고 부끄러울 것 같았죠."

이 작가는 얼마 전 중노위 심문을 앞두고 조사관을 만나 7시간 넘게 조사를 받았다. 중노위는 어떤 판정을 내릴까.

(②편 <"MBC를 너무 믿었죠, 내 회사라고 생각했으니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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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임현희, "특수고용직의 여성화 사례연구 – 대구지역 방송사 구성작가직을 중심으로", 2004. 김한별, "맹렬우먼, 밤샘하고도 남편 아침은 꼭 챙기죠", <프레시안>, 2019.08.19. 손가영, "데스크 종속돼 10년 일한 뉴스 작가, '프리랜서'라는 지노위", <미디어오늘>, 2020.12.03. 장슬기, "20년전, 방송사에 맞선 여성들이 있었다", <미디어오늘>, 2019.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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