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 동무' 부르던 책 주인은 누구였을까?

이준희 2021. 2. 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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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필사본 '신유행 창가집'에 담긴 이야기

[이준희 기자]

똑같은 형태와 내용으로 많은 양이 한꺼번에 만들어진 인쇄본과 달리, 하나하나가 사실상 유일본일 수밖에 없는 필사본은 왠지 더 특별한 이야기들을 품고 있을 것만 같다. 필사본이라 하면 마치 중세에나 존재했을 법한 느낌도 있지만, 아직 백 년이 안 된 20세기 필사본에서도 종종 흥미로운 내용이 발견되곤 한다. 오랜만에 들춰 본 <신유행 창가집>이 바로 그렇다.

손으로 또박또박 적은 가사집
 
 <신유행 창가집> 표지
ⓒ 이준희
일제 공책에 40여 곡 가사를 또박또박 적어 놓은 <신유행 창가집>. 표지에서는 1934년 연도가 우선 위에 보이고, '밀양군 삼랑진면 삼랑리'라는 예스러운 주소도 눈에 들어온다. 아래에는 분명치 않은 한자로 적힌 이름이 또 보이는데, 이 모든 정보가 필사본을 만든 주인과 관련이 있는 것인지 여부는 아쉽게도 확인할 길이 없다.
수록된 40여 곡 가운데에는 널리 알려진 익숙한 노래들도 여럿 보인다. 1932년에 발표된 <황성 옛터>가 <황성의 적>이라는 원래 제목으로 수록되었고, 표지에 적힌 연도 이후에 발표된 <홍도야 울지 마라>(1939년), <눈물 젖은 두만강>(1938년)도 뒷부분에 등장한다. 1934년에 책을 일단 완성하고 나서 5년쯤 뒤에 몇 곡 더 보충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유행 창가집>에 수록된 <황성의 적> 가사
ⓒ 이준희
다들 잘 알고 있는 그런 유명한 노래 가사만 수록되었다면 흥미로운 필사본이라 하기 어려울 테지만, <신유행 창가집>에는 귀중한 참고가 되는 자료도 적지 않다. 예컨대 아직 가사지가 공개된 바 없어 정확한 내용 파악이 쉽지 않았던 노래 <기생 세레나데>(1932년)는 이 필사본 수록 가사가 큰 도움이 된다. 물론 필사 과정에서 오류가 생겼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기는 해야 한다.

필사자가 노래를 직접 들으면서 채록한 것인지, 아니면 가사지를 보고 베껴 적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가 처했던 경제 상황이 그렇게 풍요롭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음반이나 그에 딸린 가사지를 직접 구입해서 소장하고 있었다면, 굳이 이런 필사본을 애써 만들 이유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축음기나 SP음반은 상당히 비싼 편이었고, 큰 도시도 아닌 면 지역에서 그 정도 경제력을 갖춘 집은 드물었을 것이 분명하다. 

<신유행 창가집>에는 그런 필사자의 환경을 좀 더 짐작할 수 있는, 그리고 다른 어디에서도 발견된 바 없었던(아직 공개가 안 된 것일 수도 있지만) 흥미로운 자료가 또 여럿 수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레닌 동무>, <야학 동무>, <노동가> 같은 곡들이다. 앞서 본 대중가요들은 이 필사본 아니라도 관련 자료가 이미 충분히 공개되어 있거나 차후 공개될 가능성이 있지만, 세 곡은 대중가요와는 성격이 전혀 다른 노래이므로, 필사본 내용이 현재 유일한 자료이다.
 
 <신유행 창가집>에 수록된 <레닌 동무> 가사
ⓒ 이준희
연도에 오류가 있기는 하나(레닌은 1924년에 사망), 날짜까지 거론하며 혁명가 레닌의 죽음을 애도한 <레닌 동무>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필사본에 수록된 다른 가사들과 달리 단 한 절만 적혀 있고, 어떤 곡조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다.

일천구백이십삼년 정월 스무하룻날/ 모수코부 저(?) 땅에서 레닌 동무 죽었다/ 동무들아 동무들아 레닌 축원(?)하기로/ 배우고 또 배워서 전 세계를 깨우라
<레닌 동무> 전문

가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레닌 이야기를 하면서도 '혁명'이나 '해방' 등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배움'을 유독 강조했다는 것이다. 필사자가 직접 지은 가사일 가능성은 아무래도 낮고 어디선가 듣고 배운 노래일 텐데, 그 어디가 어디인지는 또 다른 작품 <야학 동무>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들은 쉴 새 없이 일만 하는 몸/ 밤으로 공부하기 고단하지만/ 그러나 동무들아 글을 배우자/ 눈뜬장님 아니 되기 위하여서
<야학 동무> 1절

레닌, 야학, 노동가... 이 필사본이 특별한 이유 
 
 <신유행 창가집>에 수록된 <노동가> 가사
ⓒ 이준희
3절까지 이어지는 가사 내용을 보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치열하게 배우고자 했던 '동무'들의 모습이 절로 떠오른다. 단정할 수는 없으나, <야학 동무>나 <레닌 동무> 같은 작품은 필사자가 다니던 야학에서 직접 배운 노래를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주경야독으로 늦은 배움을 실천하고 있었을 필사자의 환경을 짐작할 수 있는 또 다른 곡 <노동가> 가사는 다음과 같다.

부모처자는 기한(飢寒)에 울고/ 동지들은 철창 속에 있으니/ 골수에 맺힌 우리 원한을/ 복수하지 아니할 수 있으랴/ 노동자들아 단결하자/ 우리 농촌의 깃발 아래로/ 우리의 흘린 피땀 흘린 값으로/ 자유의 새 사회는 보인다
<노동가> 2절

전반적으로 보아 <레닌 동무>보다 오히려 더 과격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노동가>라고 할 수 있다. 자칫 삼랑진면 순사에게 적발이라도 되었다간 만만치 않은 곤욕을 치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중가요는 결코 할 수 없는 이런 발언을 담은 <노동가> 같은 노래는, 일반적인 인쇄본에서는 역시 결코 소화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필사본 <신유행 창가집>의 의미와 가치는 바로 이런 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레닌 동무>와 마찬가지로 <야학 동무>나 <노동가> 또한 가사만 적혀 있을 뿐 곡조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기 때문에, 아쉽게도 오늘 그 노래들을 되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록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황금의 부자유>란 노래는 가사와 함께 악보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만 악보에도 잘못 옮겨 적은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보이니, 필사자의 서양음악 관련 지식이 그렇게 깊지는 못했던 듯하다.
 
 <신유행 창가집>에 수록된 <황금의 부자유> 가사와 악보
ⓒ 이준희
필사본 <신유행 창가집>에 수록된 내용은 이처럼 아쉬운 중에도 풍성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표지 기록이 필사자와 관련 있음이 분명하다면, 아직 드러나지 않은 지역 자료를 추가 조사해 그가 누구였는지에 관해서도 한 걸음 나아간 확인이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욕심을 내 본다면, <레닌 동무>나 <야학 동무> 그리고 <노동가>를 다시 부를 수 있는 근거 자료도 꼭 찾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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