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씻은 배달용기의 배신..재활용 '가제트 손'이 무너진다

정희윤 2021. 2. 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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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역습, '코로나 트래시' <중>
지난달 20일 오후 4시 45분 경기도에 위치한 한 플라스틱 민간선별장. 직원들의 퇴근까지 15분 남았지만 이날 경기도 한 지자체 공동주택에서 수거해 온 플라스틱 쓰레기는 여전히 산더미였다. 정희윤 기자

그곳엔 ‘플라스틱의 산’이 있었다. 지난달 20일 찾은 경기도의 한 혼합플라스틱 재활용 선별장. 재활용 여부의 '판결'을 기다리는 형형색색의 플라스틱은 6m 높이의 선별장 천장에 닿을 듯 적재돼 있었다.

선별장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벨트와 연결된다. 1초에 2~3m 정도의 속도로 플라스틱이 냇물처럼 흘렀다. 컨베이어벨트의 굉음으로 현장 근무자들의 말을 듣기가 쉽지 않았다. 약 25m 벨트 주변에는 11명의 직원이 서서 연신 플라스틱을 골라냈다.


재활용 최후의 보루, ‘가제트 손’
최근엔 직원들의 퇴근이 늦어졌다고 한다. 일한 지 1년이 조금 넘었다는 나상호(69)씨는“원래는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는데 요즘같이 바쁠 때는 2시간 더 일한다”고 말했다. 옆에서 일하던 이정순(72)씨는 "여긴 시끄럽고 바빠서 마주 보고 있는 사람들하고도 얘기를 못 한다"고 고함치듯 얘기했다. 이씨는 "쓰레기가 많아져 벨트 속도를 늦췄는데도 옆에서 아무리 뭐라 해도 모른다. 정신없이 지나간다"고 했다.

지난달 20일 화성시에 위치한 한 플라스틱 민간선별장 직원들이 플라스틱을 선별하고 있는 모습. 해당 컨베이어 벨트 속도는 평소보다 조금 느린 편이라고 한다. 정희윤 기자

안소연 재활용 선별장 대표는 이들을 ‘가제트 손’이라 불렀다. 가제트(gadget)는 도구를 뜻하는 단어이자 1980, 90년대 한국에서도 인기를 끈 미국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이름이다. 어떤 어려운 일도 척척 해내던 ‘형사 가제트'의 ‘만능 팔’처럼 직원들의 손이 재활용 플라스틱을 귀신같이 잡아낸다는 얘기였다.

실제로 한 사람이 눈앞에 나가는 4~5가지의 플라스틱을 순식간에 선별해 내고 있었다. 폴리에틸렌(PE), 폴리프로필렌(PP), 폴리에틸렌테레프탈레이트(PET), 폴리스티렌(PS)을 선별해 냈다. 나상호씨는 5초 동안 플라스틱 6개를 선별했다. 오른손으로 지나가던 플라스틱을 집어 그의 오른쪽에 놓인 PP 수거통에 던졌다. 왼손으로 잡은 플라스틱은 왼쪽 PET 수거통에 넣었다.


“쓰레기 너무 많아 선별력 떨어져”
역시 가제트 팔이었다. 나씨의 작업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촬영한 동영상을 다섯 차례 돌려봐야 했다. 안소연 대표는 “우리는 코로나 이후 비상시국이다. 하루도 못 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멈추면 쓰레기 대란이 나기 때문에 목숨 걸고 일하고 있다”는 그에게서 자부심이 느껴졌다.

하지만, 선별장의 가제트들은 ‘코로나 트래시’로 최근 체면을 구기고 있었다. '배달 용기'가 급증한 탓이다. 안 대표는 "코로나 이후 쓰레기양이 너무 많아졌다. 인력은 줄었는데 선별해야 하는 양은 훨씬 많아져서 전보다 선별력이 떨어진다”고 토로했다. “재활용할 수 있는 것도 쓰레기로 나가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플라스틱 재활용의 최후의 보루인 ‘가제트 손’에도 과부하가 걸린 셈이다.

환경부에 따르면 지난해 음식배달은 2019년 동기대비 76.8% 늘었고 지난해 상반기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량은 하루 평균 848t으로 전년 동기(733.7t) 대비 15.6% 증가했다.

취재진이 찾아간 선별장은 경기도의 한 지자체 관할의 공동주택 플라스틱만 수거하는 곳이었다. 이곳에 1.5t 트럭이 하루에 적게는 10대, 많게는 15대가 들어온다고 했다. 하루에 15~22t의 플라스틱 쓰레기를 직원 15명이 처리하고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 마포구의 한 공동주택 분리수거장 모습. 투명 페트병 별도 배출함에 일반 플라스틱 용기들이 뒤섞여 있다. 위문희 기자



배달 용기는 ‘귀찮은 플라스틱’

플라스틱 재활용 어떻게 하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재활용 선진국이다. 2018년 OECD가 발표한 재활용률 통계에 따르면 독일 다음의 재활용률을 자랑한다. 2019년 환경부 통계에 따르면 재활용률 62.8%다. 이는 재활용 시설로 반입된 쓰레기양을 기준으로 산출된 수치로, 실질적인 재활용률은 이보다 낮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최근 소비량이 급증한 ‘코로나 트래시’ 배달 용기는 소비자들이 열심히 씻고 닦아서 분리 배출해도 재활용이 쉽지 않다. 잘 지워지지 않는 음식물 찌꺼기가 남아있거나 혼합 플라스틱 재질(other)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이동학 쓰레기센터장은 “일회용 배달 용기는 재활용하는 공정이 없어 그대로 소각장으로 간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플라스틱이랑 다 섞여 있어서 한마디로 ‘귀찮은 플라스틱’”이라고 했다. 이 센터장은 “그래도 일단은 씻을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씻고 분리 배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환경 생각한 텀블러도 소각장 행
안소연 대표는 빨대와 텀블러를 예로 들며 한숨을 쉬었다. “빨대는 재질을 통합해 페트로만 만들든가 PP로만 만들든가 해야 하는데 다 다르게 만드니 우리는 선별 못 하고 다 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안 대표는 “생산자가 재질을 하나로 통합시켜줘야 한다”고 말했다.

안 대표는 “환경 생각해서 텀블러 많이들 쓰라고 권했는데 지금 선별장으로 텀블러가 너무 많이 들어온다”며 “그건 재질이 단일화돼 있지 않아서 결국 다 소각장으로 간다”고 했다.


“재활용 잘 되는 제품이 잘 팔리게 해야”
분리 배출과 재활용은 불가분의 함수 관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분리 지침과 제품 생산이 제각각으로 돌아간다. 지난해 9월 환경부는 '분리배출 대상'으로 오해하기 쉬운 품목들을 정리해 안내문을 배포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분리 배출에 적극적이었던 상당수 시민들은 분노했다.

분리 방법을 설명한 유투브 영상 등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이제는 지친다” “하라는 방식도 다르고 여기저기 말 다르다” “나라에서 정확한 기준을 안 준다” “세계 어느 나라가 우리 국민처럼 열심히 분리수거에 참여하느냐” “기업 등 생산하는 곳에서 먼저 재활용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등의 불만이 쏟아졌다.

홍수열 자원순환사회경제연구소 소장은 "소비자들은 재활용이 안 되는 것은 분리 배출하지 말고 쓰레기로 버려야 하고, 기업은 생산단계에서부터 재활용이 잘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재활용 잘 되는 제품이 시장에서 잘 팔리는 구조로 가는 게 가장 좋다"고 제언했다. 유럽에서 시행하고 있는 공병 보증금제 등 보증금도 대책 중 하나다. 홍 소장은 "보증금을 부과해 소비자들이 판매점으로 해당 용기를 돌려주고 판매점은 이를 수거해 그 제품 특성에 맞게 또 재활용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분리배출 기준이 제각각인 데 대해 홍 소장은 "필요에 따라 내용이 바뀌기도 하고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채로 정보가 돌아다니다 보니 혼란이 발생하는 것"이라며 "분리배출 기준을 총괄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하나의 온라인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위문희ㆍ최연수ㆍ정희윤ㆍ함민정 기자 chung.hee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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