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시시각각] 탈원전 후과가 이리 무겁다
미래 고민 없이 정치 공방 함몰 땐
실낱같은 희망마저 놓치게 된다
대북 원전 지원 논란의 핵심은 두 가지다. 나머지는 곁가지다. 첫째는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이 알아서 ‘원전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런 뒤 알아서 폐기했다. 그러므로 청와대 하명·지시는 없었다.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둘째는 문재인 정부가 설령 북한에 원전 지원을 계획했다 한들 그게 왜 문제냐. 과거 김영삼 정부 때부터 했던 일 아니냐. 이 논란 두 개를 끝까지 파헤쳐 진실을 밝히면 될 일이다. 굳이 사생 결단, 이 어려운 때 민생은 나 몰라라 정치 공방에 청와대와 정부, 여야가 함몰될 일이 아니란 얘기다.
첫 번째 논란이 말이 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우국충정으로 무장한 공무원이 많아야 한다. 또 그 공무원끼리 서로 굳게 믿어야 한다. 혹 누군가 배신하면 곤란하다. 게다가 일이 잘못돼도 문책은 없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현실은 딴판이다.
원전 문건이 작성된 2018년 5월, 산업부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넉 달 전인 2018년 1월 ‘청와대 하명 인사’를 챙긴 혐의로 산업부 K모 국장이 구속됐다. 실무를 담당했던 S서기관도 두 달 전 구속된 터라 산업부는 물론 세종 관가가 큰 충격에 빠졌다. 이런 일로 담당자는 물론 국장까지 구속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전직 고위 관료 A는 “당시 산업부 내엔 ‘절대 책임질 일은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장관이나 실장이 ‘내가 책임진다’고 해도 밑에선 ‘어떻게 믿나’며 냉소하기 일쑤였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K모 서기관과 그의 부서만 자발적으로 청와대 관심 사항을 문건으로 작성했다는 건데, 도무지 상식적이지 않다.
최근 산업부 분위기는 더 나쁘다. 장관이 부하 직원을 감싸기는커녕 “문서 삭제는 잘못”이라고 혼내는 판국이다. 누가 누구를 믿겠나. 월성 1호기 폐쇄와 관련된 직원들은 변호사도 다 따로 쓴다고 한다. 정부 관계자는 “장관 따로, 실장 따로, 국장·과장·서기관까지 변호사를 따로 쓴다. 같은 사안엔 변호사도 공동 선임하는 게 상식인데, 그렇게 못한다. 누군가는 지시했고, 누군가는 따랐기 때문 아니겠나”라고 했다. 대북 원전 문건도 본질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오죽하면 세종 관가에 “대통령이 책임을 안 지게 하려다 보니 공무원만 죽어난다”는 말이 나오겠나.
두 번째 논란, 대북 원전 지원은 할 수 있다. 다만 두 가지 전제가 꼭 필요하다. 북한의 비핵화와 한국 원전 산업의 발전이다. 이 둘이 충족돼야만 명분과 실리가 생긴다. 보수 정부 시절엔 이런 전제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결이 다르다. 대통령은 언제부터인가 북한 비핵화를 입에 올리지 않는다. ‘대화’만 말한다. 남북 연락사무소가 폭파당하고, 서해에서 공무원이 사살돼도 ‘대화’만 말한다. 그러니 북한 비핵화 의지에 대해 국민의 의구심만 커진다.
두 번째 전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문 대통령은 2017년 6월 “원전은 안전하지도 않고, 저렴하지도 않으며, 친환경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그래 놓고 이듬해 체코 총리와 만나 “한국은 지난 40년간 원전을 운영하면서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다”며 세일즈를 했다. 원전에 대한 대통령의 말이 이 때 다르고, 저 때 바뀌니 국민이 믿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원전은 남북을 잇는 평화의 교두보로 안성맞춤이다. 한반도 미래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정치적 진실 공방으로만 흐르면 이 정부는 물론 다음 정부도 원전 카드를 잃게 된다. 결국 한반도는 원전도 평화도 잃고 말 것이다. 이 모든 일의 출발점에 탈원전이 있다. 탈원전은 탄소 중립과 미세먼지 해결을 어렵게 하고 일자리와 미래 먹거리를 파괴한 주범이다. 급기야 이젠 대북 원전 지원마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리더의 잘못된 비전이 부른 후과(後果)가 이리도 무겁다. 이쯤 되면 대통령이 결단할 때다. 차라리 이참에 북한 비핵화+대북 원전 지원+탈원전 폐기의 3종 세트를 공개 선언하고 국민적 동의를 구하면 어떤가.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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