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규홍의 나무와 사람] 冬柏은 알고있다 500년 일편丹心

최동현 2021. 2. 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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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혁명의 뜻 움켜쥔 나무 동백나무

"소나무 대나무 부러질 듯 눈 쌓여도(雪壓松筠也欲최)/새빨간 꽃 몇 송이 새로 피어난다(繁紅數朶斬新開)/아무도 찾지 않는 적막한 산골에(山扉寂寂無人到)/이따금 새들만 찾아와 꽃잎 두드린다(時有幽禽暗啄來)."

신흠(申欽)·이식(李植)·이정구(李廷龜)와 함께 ‘조선의 문학 사대가(四大家)’로 일컬어지는 장유(張維·1587~1638)가 노래한 ‘눈 속의 동백꽃(雪裏山茶)’이라는 한시다. 시에서 ‘이따금 새들이 찾아오는’ 꽃의 한자어 ‘산다(山茶)’는 동백나무의 옛 이름이다.

지조와 절개의 상징으로 흔히 대나무와 소나무를 많이 쓴다. 하지만 동백나무를 절개의 상징으로 활용한 경우도 그에 못지 않게 많다. 사철 푸른 잎을 가지기로는 소나무나 동백나무나 마찬가지다. 물론 사철 푸른 잎을 간직하는 상록수는 동백나무 외에도 많다. 그러나 동백나무처럼 한겨울에 꽃 피우는 나무는 흔치 않다. 그러니 초록의 넓은 잎과 새빨간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는 변치 않는 절개의 상징으로 활용하기에 더 알맞춤했으리라.

동백나무를 예찬한 옛 사람들의 노래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조선 전기의 문신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잎은 단단하여 서리 맞아도 푸르고(葉硬經霜綠)/화려한 꽃은 눈 속에서 더 붉다(花映雪紅)"라고 노래했다. 다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동백나무 잎은 얼어서도 무성하고(山茶接葉童童)/눈 속에서 피어난 꽃은 붉기가 학의 이마 같다(雪裏花開鶴頂紅)"며 "세상에 이 꽃만큼 아름다운 건 드물다(世間能似此花稀)"고까지 칭송했다.

바람 거세고 눈 깊이 쌓이면 소나무·대나무 가지가 부러질 수 있지만 동백나무는 겨울 추위를 모두 이겨내고 더 화려한 꽃까지 피운다. 동백나무 꽃은 실제로 겨울이 추울수록 더 아름답다.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세상의 모든 꽃은 번식 본능으로 꽃 피워 수술에서 잘 키운 꽃가루를 암술머리에 옮겨줘야 한다. 이른바 수분(受粉)이다. 그러나 옮겨다닐 수 없는 나무는 스스로 수분을 완성할 수 없다. 다른 힘을 이용해야 한다. 벌·나비 같은 매개 곤충이나 바람을, 혹은 개미를 이용하며 때로 흐르는 물도 이용한다.

벌·나비가 없는 한겨울에 피어나는 동백꽃은 동백나무 숲에서 자생하는 텃새인 동박새를 유인해 수분한다. 그래서 동백나무는 동박새가 좋아하는 꽃가루와 꿀이 잔뜩 들어 있는 꽃을 피워 유인한다. 그런데 날씨가 추우면 모든 생물이 그렇듯 동백꽃을 찾아와야 할 동박새의 활동도 준다. 어떻게 해서든 동박새의 눈에 들어야 하는 동백나무는 꽃을 더 크게 피운다. 뿐만 아니라 초록 잎 사이에서도 도드라질 수 있도록 붉은 기운을 최대한 끌어올린다. 생존을 위한 본능이다.

결국 추울수록 동백꽃은 더 크고 더 빨갛게 피어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사철 푸른 잎을 간직한다는 특징으로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주변 환경이 아무리 험악해도 끝내 뜻을 이루겠다는 의지가 강한 선비들에게 추워야 더 화려하게 피어나는 동백꽃의 특징은 유난히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추위가 깊을수록 더 크고 더 빨갛게 피어나는 동백 꽃

조선 중종 14년 기묘사화 당시
조정의 피바람 피해 고향 나주로 피신
11명의 선비들 금강십일인계 조직
함께 세상 이치 살피며 훗날 기약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백나무도 당시 혁명가들의 핏빛 절개를 상징하기 위해 심어 키운 나무다. 500년 전인 조선 중종 14년(1519년)에 벌어진 기묘사화가 계기였다. 중종은 강력한 개혁 추진에 나선 풍운아 조광조(趙光祖·1482~1519) 중심의 사림파 선비들을 숙청했다.

조정의 피바람으로부터 벗어나 고향에 잦아든 뒤 미래를 준비한 선비도 적지 않았다. 당시 전남 나주 지역으로 피신한 선비들이 있었다. 승지를 지낸 임붕(林鵬)과 직장 나일손(羅逸孫), 생원 정문손(鄭文孫) 등 11명의 선비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암담한 정치 현실에 좌절했지만 개혁의 이상까지 포기할 수 없어 금강십일인계를 조직했다. 그리고 함께 세상 이치에 대해 짚어보며 훗날을 기약했다.

그렇게 10년쯤 세월이 지나자 금강십일인계의 선비들은 토론 장소로 이용할 정자를 한 채 지어 올렸다. 정자에는 금강결사라는 뜻으로 ‘금사정(錦社亭)’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단출한 정자가 완성되자 그들은 마음을 모아 정자 바로 앞에 한 그루의 나무도 심었다. 동백나무였다.

까닭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아 선비들의 깊은 속내까지 짚어보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들의 뜻을 짐작할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글머리에 끄집어낸 장유의 시에서처럼 ‘소나무 대나무 부러질 듯’한 엄동설한에도 혁명 의지는 잃지 않고 끝내 ‘새빨간 꽃’을 더 화려하게 피워내자는 통한의 다짐이라고 짐작하는 건 결코 무리가 아니다.

금강십일인계의 선비들은 동백나무에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읽었던 것이다. 댕강댕강 모가지 잘리듯 싱그러운 채로 떨어진 동백꽃에서 자신들의 처참한 처지를 떠올렸다. 하지만 사철 푸른 동백나무의 강인한 잎처럼 언제까지라도 뜻은 굽히지 말고 살아남자는 다짐을 나무에 담고 싶었다. 덧붙여 소나무·대나무가 부러질 정도로 엄혹한 정치 현실 속에서도 자신들의 뜻을 언젠가는 더 아름답게 피워내자는 핏빛 기대가 담긴 애절한 선택이었다.

추울수록 더 빨갛게 피어나는 꽃을 바라보며 앞날도 채비했지만 선비들이 꿈꾸던 기회는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금사정으로 수굿이 찾아들던 열한 명의 선비는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그렇게 모두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한뜻으로 심어 키운 한 그루의 동백나무는 금사정 앞에 뜸직하게 서서 옛 선비들의 이루지 못한 뜻을 지키며 오백 년 세월도 견뎌왔다.

조상의 뜻을 이어 나주 송죽리 마을에서는 여전히 금강계가 이어지고 있다. 물론 옛 선비들과 달리 개혁 정치를 이루기 위한 비밀 결사 조직은 아니다. 후손들의 화합을 위한 계의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동백나무는 금강계에서 관리인을 따로 정해 정성껏 관리했다. 그러다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 제515호에 지정된 2009년 12월 이후 국가에서 관리를 맡았다.

나주시 왕곡면 송죽리 마을 한켠에 자리한 금사정과 그 앞의 동백나무.

선비들이 꿈꾸던 기회오지 않았지만
500년 세월동안 금사정 앞 우뚝
송죽리 마을엔 여전히 금강계 이어져
'회합이 계' 형태로 조상뜻 지켜

동백나무는 오랫동안 우리 민족의 사랑을 받아왔다. 하지만 독립 노거수(老巨樹) 동백나무 한 그루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한 건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가 유일하다. 동백나무는 금강계를 조직하고 10년쯤 뒤인 1530년 무렵에 심었다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바탕으로 하면 490살을 넘긴 오래된 나무다. 규모도 우리나라 동백나무 가운데 최고라 할 수 있다. 높이가 6m나 되고 뿌리 부근 둘레는 2.4m쯤 된다. 이만큼 큰 동백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뿌리 부분에서부터 사방으로 고르게 줄기가 나눠지면서 이룬 둥근 수형(樹形)이 마치 솜씨 좋은 정원사가 잘 다듬어낸 것처럼 매끄럽다. 꽃 피지 않아도 화려하고 멋진 나무다.

겨울 추위가 깊을수록 빛깔 화려한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 이런 특징 때문인지 나무에 담긴 핏빛 한은 우리나라의 여느 동백나무도 견주기 어려울 만큼 나무를 화려하게 키워냈다. ‘나주 송죽리 금사정 동백나무’는 옛 선비들의 핏빛 다짐을 잊지 않고 긴 세월 동안 제자리에 서 있다. 앞으로도 피처럼 붉은 꽃을 끊임없이 피워낼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이 땅을 아름답게 지켜줄 한 그루의 동백나무가 더 소중한 것은 이런 까닭이다.

나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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