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 "마음의 빚이 있어요"

안건모 2021. 2. 3. 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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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건모 기자]

 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
ⓒ 안건모
 
한진중공업 35년째 해고자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지역본부 지도위원(이하 '김진숙 지도')이 새해부터 서울을 향해 걷고 있다. '희망뚜벅이'. 4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이다. 날마다 15킬로미터 정도 걸어서 청와대사랑채까지 간단다. 암이 재발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서울까지 걷겠다고 나선 것이다. '한진중공업 고용안정 없는 매각 반대!'라는 글귀가 적힌 부채를 들었다. 그리고 트위터에 "연말까지 기다렸지만 답이 없어 청와대까지 가 보려고요. 복직 없이 정년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복직이 될 때까지 투쟁하겠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사 탄생?

내가 김진숙 지도를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3월 <작은책> 강좌 때였다. <작은책>에서는 2007년 11월부터 2013년 11월까지 6년 동안 "일하는 사람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자"라는 제목으로 강좌를 열었다. 김진숙 지도는 2008년 3월 20일, 2013년 1월 24일, 두 번 강연을 했다. 2008년, 3월에 강연한 제목은 '자본 천국 한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기'였다.
      
 2008년 3월 20일, <작은책> 사무실에서 강연을 하고 있는 김진숙 지도
ⓒ 안건모
  
김진숙 지도는 그날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청중을 울리고 웃겼다.

"저는 부산에 있는 한진중공업이라고 배 만드는 조선소에 용접공 출신입니다. 땜쟁이였어요. 그래서 그때 신문에도 나오고 그랬습니다. 대한민국 최초의 처녀 용접사 탄생, 그게 접니다. 그 신문이 <조선일보>라는 게 하여튼 지금도 쪽팔립니다."

김진숙 지도가 살아온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는데 눈물이 났다. 그날 한 수강생이 쓴 소감이다.

"슬픈 이야기에 속에서 눈물이 울컥하는데 겉으로는 자꾸 웃음이 난다. … 강의 내내 우스운 이야기가 나오면 모두가 깔깔대며 자지러지다가도 어느새 나온 슬픈 이야기의 무게에 눌리고, 그렇게 여러 번 요동치니 두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 있다."

김진숙 지도 역시 어릴 때 다른 사람들처럼 노동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제가 고향이 경기도 강화인데요. 중학교 2학년 때 친구들하고 토요일 날 시내를 놀러 갔는데 들어가는 입구에다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웬 아줌마들 네 명이 뭐, 상치, 쑥갓, 다 합쳐 봐야 천 원어치도 안 되는 것들을, 그것도 다 시들어 빠진 걸 더 시들어 빠진 아지매들이 팔겠다고 오고 가는 사람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전 속으로 그 아줌마들을 막 경멸했어요. 야, 오죽 못났으면 저 나이에 길바닥에서 저러고들 사나?

그러다가 그중에 한 아줌마하고 눈이 딱 마주친 거예요. 그 순간 막 도망을 가는데, 친구들이 자꾸 부르는겨. 그래서 그 아줌마가 저를 못 봤기를 빌고 또 빌면서 뛰는데, 재수 없게 꼭 본 것 같애. 짐작하셨겠지만 그 아줌마는 저희 엄마였드랬습니다. 저는 울엄마가 길바닥에서 그 천 원어치도 안 되는 것들을 팔겠다고 오가는 사람들을 간절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김진숙 지도는 그때 일이 내내 가슴에 남는다고 했다.

"저는 그 일이 30년이 넘도록 상처입니다. 나는 왜 엄마를 그토록 부끄러워했을까?"
 
 1981년에 한진중공업에 입사한 김진숙 지도의 사증.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 희망버스 기획단이 단식투쟁하는 자리에 전시해 놓았다.
ⓒ 안건모
 
김진숙 지도는 현장에서 배 만들면서 산재로 끔찍하게 죽어 갔던 노동자들 이야기를 '맛깔스럽게' 풀어놓았다. 그리고 심각한 비정규직 문제를 이야기했다.

김진숙 지도는 2007년에 <소금꽃나무>(후마니타스)라는 책을 냈다. 어떤 이들은 지하철에서 그 책을 보며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했다. 나도 그 책을 보고, 또 언론에 숱하게 오르내리는 김진숙 지도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됐다.

김진숙 지도는 1981년 7월 1일 스물한 살 나이로 한진중공업(당시 대한조선공사주식회사)에 용접공으로 입사했다. 최초의 처녀 용접사였다. 어릴 때 그는 옷 만드는 공장, 가방 만드는 공장도 다녔고, 아이스크림 장사도 했고, 신문 배달도 했고, 시내버스 안내양도 했다.

그러다가 월급이 조금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물한 살에 한진중공업 용접공이 됐다. 하지만 용접 일은 쉽지 않았다. 천장 용접도 해야 하고, "수그리고 처박고 용접해야 되"는 일이었다. 불똥이 옷 속으로 튀어 타 들어가도 참아야 했다. 월급이 많지도 않았다. 거의 12시간씩 일하고 연달아 철야를 할 때도 많았다.

삶이 너무 힘들어 자살을 생각하고 추운 겨울에 지리산을 올라갔지만 천왕봉에서 일출을 보면서 1년만 더 살아 보자, 생각했다. 그럴 때 노동조합이 뭔지 알게 됐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진중공업 집행부는 어용노조였다. 조합 간부들은 회사보다 더 앞장서서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김진숙 지도는 '공장 아저씨'들이 권유해 노동조합 대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1986년 2월 '23차 대의원대회'를 다녀온 뒤 당시 노조 집행부의 어용성을 폭로하는 홍보물 150여 장을 배포했다. 얼마 뒤, 5월 20일, 김진숙은 얼굴에 보자기에 씐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부산시 경찰국 대공분실이었다. 수사관들은 김진숙 지도 '옷을 홀딱 벗기고 군복으로 갈아입히고'는 칠성판에 눕혀 놓고 매질을 했고 고문하며 빨갱이로 몰았다.

"한 조직만 불면, 한 사람만 불어 주면, 이 죽을 고생이 끝난다는데, 살려 준다는데! 아무리 머릿속 구석구석을 후후 불어 봐도 조직도 선도 없는 거다."(<소금꽃나무>, 24쪽)

대공분실은 간첩을 잡는 부서가 아니라 간첩을 만드는 부서였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으니 벌건 밧줄을 발목에 매달고 거꾸로 매달아 놓기까지 했다.

"풀려나고 보니까 제가 묶여 있던 자리 바닥에 피가 고여 있었어요. 피가 어디로 흘렀는 줄 아세요. 눈으로 흐른 거예요."(2013년 1월 <작은책> 강연 '309일의 싸움'에서.)

김진숙 지도는 7월 2일까지 세 차례 조사를 받았고 한진중공업은 7월 14일 김진숙 지도를 해고했다. 그때부터 해고자가 된 김진숙 지도는 노동운동에 앞장섰다.

한진중공업에는 1989년과 1991년까지 총 18명의 해고자가 있었다. 2003년 11월 김주익·곽재규 사망 사건 이후 노사 합의로 1986년 같은 해 해고됐던 박영제, 이정식 씨도 복직하는 등 노조 활동으로 해고된 사람들이 모두 복직됐다. 하지만 유독 김진숙 지도만 복직을 하지 못했다. 그 이유가 한국경영자총협회에서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진숙 지도가 올라가 농성했던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 2011년 2월 8일.
ⓒ 안건모
      
2010년 12월 15일, 한진중공업은 생산직 노동자 400명을 정리해고한다고 발표했다. 노조는 12월 20일 전면 파업에 돌입했고, 김진숙 지도는 2011년 1월 6일에 한진중공업 안에 있는 35미터 높이 85호 크레인에 올라 고공농성을 시작했다. 그 크레인은 2003년 김주익 전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이 129일째 고공농성을 하다가 목숨을 끊었던 곳이다.

김진숙 지도가 크레인에서 농성을 시작한 지 여섯 달이 지났을 때 노동단체, 시민단체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만들어 부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두 번밖에 내려가지 않았는데 현재 <작은책> 편집장 유이분씨는 그때 <작은책> 일꾼이 아니었는데 희망버스 때마다 내려갔다. 우리 <작은책> 독자, 글쓰기 모임 회장과 회원들도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갔다.

글쓰기 모임 회장이었던 강정민씨는 경찰에 사진이 찍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200만 원 벌금으로 약식기소를 당했다. 정식 재판을 청구해서 2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는데 검사가 또 항고를 해서 대법원까지 갔다. 결국 무죄로 확정됐지만 빼앗긴 시간과 정신적인 고통은 보상받지 못했다. 무고한 시민을 그렇게 기소하고 항고하면서 괴롭히는 그런 경찰, 검찰은 나중에 징계 먹고, 해임당하는 법은 없나? 정말 속이 터진다.

2011년 7월 30일 3차 희망버스 때는 정부가 공권력을 투입하고 골목골목을 다 막았지만 시민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많은 시민들이 자신의 시간과 돈을 들여 희망버스에 참가했고, 김진숙이 요구하는 문제가 개별 노사 문제를 넘어 일자리, 고용, 해고 등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절박한 문제라는 것을 체험하고 공감했다.

김진숙 지도는 그해 11월 11일 오후 조합원 총회 찬반 투표가 가결된 후 85호 크레인에서 내려왔다. 고공농성 309일 만이었고 유례가 없는 승리였다. 하지만 복직은 이뤄지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의 복직을 요구하지 않았고 400명의 정리해고를 철회하라는 요구였다.

2018년 10월 김진숙 지도에게 유방암이 발병했다. "나도 이제 복직 투쟁을 시작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노조에 알린 뒤였다. 복직 투쟁을 미루고 그해 항암 치료를 받았다. 후유증으로 관절염, 골다공증, 우울증을 겪으며 집 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그이가 갑자기 2019년 12월 23일, 부산에서 대구까지 110킬로미터 도보 행진에 나섰다. 대구 영남대의료원에서 해고를 당해 13년째 복직 투쟁하며 영남대의료원 70미터 높이 병원 옥상에서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 박문진 전 보건의료노조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서였다.

김진숙 지도는 "그 친구의 절박함에 비해서 세상이 무관심한 것 같다"며 "알려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여론에 굴복했는지 결국 영남대의료원은 그해 2월, 박문진 전 지도위원의 복직에 합의했다. 해고된 지 13년, 고공농성 170일이 넘은 뒤였다.

그리고 그 뒤 2020년 6월 23일 김진숙 지도는 다시, 이제야말로 자신의 복직 투쟁을 시작한다며 한진중공업 앞에서 1인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12월 22일에는 서울 청와대 앞에서 희망버스 기획단 7명이 노숙 단식투쟁을 들어갔다.

"한진중공업 법정관리사인 산업은행은 국책은행으로 대통령과 정부가 '사측'이나 다름없다"며 "김진숙 지도위원의 정년 내 복직 약속을 투명하게 이행하기 바란다"고 밝혔다. 정홍형 희망버스 집행위원장을 비롯해 서영섭 신부, 송경동 시인,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김우씨 등 노동·시민·사회·종교단체 관계자 7명과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와 쌍용차지부에서도 연대 단식에 나섰다.
  
 청도역 앞에서 출발하기 전에 기념사진을 찍었다.
ⓒ 안건모
하지만 2020년 12월 30일까지 한진중공업은 답이 없었다. 12월 31일, 김진숙 지도는 "앓는 것도 사치"라며 항암 치료도 미루고, 서울까지 걷기 시작했다. 하루 이틀 지나면서 같이 걷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을까. 어떤 분들이 함께 걸을까. 나도 몇 구간은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6일차 1월 5일, 청도역에서 출발하는 날부터 이틀 동안 걷기로 했다.

청도역에 도착해 출구로 나가니 KBS 기자들이 김진숙 지도를 찍고 있다. 김진숙 지도는 나를 보더니 "인연이 참 기네요"하고 말했다. 나는 '건강이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물어 대답하기도 귀찮은 질문일 것이다.

장영식 사진작가도 만났다. 장영식 작가는 사회적인 약자나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 등을 카메라에 담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지난번 김진숙 지도가 박문진 복직 투쟁을 응원하기 위해 대구까지 걸어갈 때도 함께 가면서 사진을 찍었다.

대구에서 한티재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 변홍철 선생도 왔다. 한티재 출판사는 <한국 탈핵>(김익중, 2003년), <성서, 퀴어를 옹호하다>(박경미, 2020) 등 환경 도서와 성소수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책들을 출판해 왔다. 왜 오셨나고 물으니 "세상이 어지러워 걸어 보려고요"하고 웃으면서 답했다. <달빛노동찾기>(오월의봄, 2019) 책에 사진 작업을 한 윤성희 작가도 왔다.

기념사진을 찍으려고 모였는데 대충 세어 보니 마흔 명가량이다. 11시에 출발했다. 머리가 하얀 분이 교통 정리할 때 쓰는 신호봉으로 지휘를 하고 있다. 김진숙 지도 걸음걸이가 무척 빠르다. 금방 읍내를 지나 허허벌판 길로 들어선다. 서상교차로 표지판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는다. 청도천을 가로지르는 유등교를 건넌 뒤 잠깐 쉰다고 멈췄다. 12시 20분이다. 김진숙 지도는 차에 들어가서 쉬고 있다. 청도역에서 팔조령휴게소까지는 12킬로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세 시간밖에 안 걸리기 때문에 건강한 사람은 문제가 없지만 김진숙 지도는 몸이 아파 쉽지 않을 것이다.
 
 씩씩한 걸음걸이로 금방 청도 읍내를 벗어나고 있다. 사진 오른쪽이 차해도 전 지회장.
ⓒ 안건모
   
나는 걸어가면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금속노조 한국게이츠지회 노동자들은 오늘 네 분이 참석했다. 현대·기아차 1차 협력업체인 한국게이츠(주)는 30여 년 동안 해마다 이익을 냈던 기업인데 지난해 6월 26일 코로나19를 핑계로 일방적으로 폐업하고, 철수 결정 통보를 했다. 알고 보니 폐업이 아니라 국내 생산 공장은 폐쇄하고, 중국에서 생산한 부품을 가지고 와 현대차를 비롯한 국내 완성차업체에 판매하면서 돈벌이를 계속한다는 계획이었다.

한국의 정부를 우습게 본 건 그럴 만한데 한국의 노동자들까지 너무 만만하게 본 건 아닐까. 대부분 정리해고를 받아들였지만 한국게이츠지회 스물네 명은 그런 불의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들은 청와대와 서울 현대차 양재동 본사 그리고 해외 자본의 횡포로 규정하고 서울 미 대사관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에서 해고된 청원경찰도 참석했다. 박대근 분회장, 김희진 조직부장, 지춘근 사무국장과 조합원 3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지금 646일째(1월 5일 현재) 싸우고 있다.

"2020년 4월 1일 해고됐죠. 대우조선 정문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하고 있어요. 거제도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김진숙 지도와 함께 걸어야겠다 싶어서 나왔어요."

오늘 행진 지휘를 하는 이와 말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전 지회장 차해도씨였다. 지금은 정년퇴직을 했는데 왜 김진숙 지도 복직을 위해 이렇게 고생하냐고 물었다.

"마음의 빚이 있어요. 해고되면 힘든 거 알거든요. 해고 투쟁 6년 했는데도 힘들던데. 전 원래 선박 배관하던 사람이에요. 열여덟 살에 회사를 들어갔어요. 그때는 타코마라고, 89년도에 합병되면서 90년도 해고돼서 96년도에 복직했어요. 복직 투쟁을 하는 도중에 애들 둘 낳고. 집사람이 벌어먹고 살았죠. 복직하니까 다시는 노조하지 말라고. 하하하.

15일 만에 사무국장 일을 맡았죠. 노조 상근만 20년 했어요. 단위사업 위원장도 해 보고 지회장 세 번 하고, 파견도 나가고. 2018년 12월 31일, 42년째 되는 해에 만 60세에 퇴직하고 나오고, 여행도 다니려고 하는데 김 지도가 이번 달부터 본격 투쟁을 한다고 해요.

사실 내가 지회장할 때 김 지도 복직 교섭을 네 차례나 했어요. 2003년에도 교섭했는데 결국은 다른 사람은 다 되는데 김 지도는 안 된다는 거야. 경총, 전경련에서 김 지도는 안 된다, 이거요. 그래서 내가 퇴직했지만 김 지도 복직까지는 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연말까지 (복직 투쟁) 열심히 하면 안 되겠나 했는데…."

오래전에 풍산에서 해고당한 오홍재 선생도 걷는다. 오홍재 선생은 전국민주화운동경남동지회 운영위원장이다. 2008년도에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도 옆에서 같이 걸었다. 옛날 신발 만드는 노동자일 때 해고된 경력이 있다니 김진숙 지도와 비슷한 시기였나 보다. 현재 김진숙 지도와 교대로 한진중공업 앞에서 1인 시위를 한다.
 
 팔조령휴게소에 도착해 기념사진을 찍었다.
ⓒ 안건모
 
폐쇄된 팔조령휴게소

2시 20분, 팔조령휴게소에 도착했다. 팔조령이라는 이름은 옛날에 도적떼가 많아 8명이 조를 짜서 넘어야 했다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했다. 지금은 터널이 뚫려 있다. 휴게소는 폐쇄된 휴게소인지 화장실 문도 잠가 놓았다. 기념사진을 찍고는 차 몇 대에 나눠 타고 헤어졌다.

나는 KBS 취재 차를 얻어 타고 청도역으로 왔다. 같이 탄 사람들이 철도 노동자들이었다. 심재문, 이경필, 임재환씨라고 했다. <작은책> 한 권을 드렸더니 한 분이 "아, 안건모님이세요?" 하고 반가워한다. 정기 구독자는 아니지만 <작은책>을 몇 번 읽었단다. 이분들에게 김진숙 지도와 같이 걷게 된 까닭을 물었다.

"철도노조 차원에서 온 건 아니고요, 독서 모임을 하는 사람들이에요. KTX 여승무원 투쟁 때 김진숙 지도위원이 강연을 한 번 온 적이 있어요. 그때 강연이 너무 좋았죠. 그걸 듣고 '생각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런 인연으로 오게 됐어요."

청도역에 도착해 그이들과 같이 추어탕집으로 들어갔다. 다른 차를 타고 온 일행 한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의당 대구시당 여성위원장 황선희씨였다. 그 자리에서 <작은책> 독자가 되기로 했다. 밥을 먹으면서 수다를 떨다 열차 시간이 다 돼 헤어졌다. 나는 청도역 근처를 구경하다가 일찌감치 숙소를 잡고 들어갔다.

짐터교차로에서 물놀이장 스파밸리까지

다음 날 1월 6일, 10시 반에 다시 청도역으로 갔다. 차해도 전 지회장이 운전하는 차에 김진숙 지도와 황이라 국장, 정혜금 부장, 장영식 작가가 타고 왔다. 어제 갔던 팔조령까지 다시 차를 타고 가는데 차해도씨한테 전화가 왔다. 운전하는 중이라 스피커폰을 켰다.

"청도서 정보과 ○○○입니다. 오늘 팔조령휴게소에서 출발 안 하십니까?"
"팔조령 넘었어요. 터널 지나서 짐터교차로에서 출발할 겁니다."
"아, 예, 알겠습니다."

형사가 바로 전화를 끊는다. 황이라 국장이 웃으면서 말한다. "목소리가 밝아진 거 같은데?" 모두들 웃음보가 터진다. 차해도씨가 대답한다. "아, 우리 구역 아니구나, 하는 거지. 터널 안 지났으면 나와서 사진 찍고 이래야 돼."

팔조령 터널을 지나가니 벌써 많은 분들이 와 있었다.

마음의 빚, 또는 부채감

오늘 김진숙 지도와 함께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어제 왔던 한국게이츠 노동자들이 또 왔고, 파란 조끼를 입은 노동자들이 눈에 띈다. 앞가슴에 '대우버스 355명 부당해고철회'라고 써 있다. 어떤 사연인지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그 밖에는 정의당원들이 몇 분 있고, 우리밥연대 활동가 김주휘 씨, 그리고 일반 시민들이 참석했다. 정의당 수영구 지역위원장과 당원들 두 분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었다.

"왜 함께하려고 나왔어요?"
"마음의 빚이 있죠. 이런 데 참여 안 하면 좀 그렇잖아요."
 
 김진숙과 함께 걷는 사람들.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삼산리를 지나고 있다.
ⓒ 안건모
 
마음의 빚 또는 부채감이라는 말을 참 많이 듣는다. 차해도 전 지회장도 똑같은 말을 했다. 서로에게 미안해 떠나지 못하고 함께하는 것이다. 2006년에 박영제, 이정식 씨가 20년 만에 복직할 때 김진숙 지도가 민주노총 홈페이지에 쓴 글에도 '부채감'이라는 말이 나온다.

"한진중 해고자로 만 20년을 견뎠던 박영제 형, 이정식 형이 새해 1월 1일 복직을 합니다. 그 형들이 단지 저 때문에 해고됐다고 말하면 그분들의 신념이나 자존감들을 폄훼하는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러나 그것과는 상관없이 20년 세월 제가 지니고 있었던 건 분명 부채감이었습니다."

나는 그 '마음의 빚', '부채감'이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2011년 희망버스 때 나도, 시민들도 그런 마음이었지 않나 싶다. '김진숙 같은 이가 저렇게 정리해고 반대를 하기 위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차비 들여 내려가서, 하루 이틀 밤새는 게 대순가?' 하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번 김진숙 지도가 걷는 길에 동참하는 이들도 다들 그런 생각이 아닌가 싶다.

옆에서 걷던 학교비정규직 대구지부 부지부장 정지혜씨는 "해고자로서 끝나면 부당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꼭 복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하고 말했다. '부채감'에 이어 '부당'이라는 말도 참 많이 나온다.

정년이 지났는데 복직이 가능할까요?

사진을 찍기 위해 언제나 맨 앞에서 걸어가는 장영식 작가와 함께 걸었다. 김진숙 지도에게 묻고 싶은 말인데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질문을 했다.

"정년이 지났는데 복직이 가능할까요?"

장영식 작가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년은 의미 없어요. 지난해 6월 복직 투쟁 시작할 때 기자회견 첫날부터 '복직 없이 정년 없다'고 했어요. 복직 투쟁 시작하니까 한진중에서 찌라시를 돌렸어요. 위로금 2천만 원에, 임원들 성금 모아서 6천만 원을 제안했대요. 문성현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도 국민 성금을 제안하고, 청와대도 국민 성금을 받아 준다면 동참하겠다고 했대요.

아주 비열한 제안이죠. 김진숙 지도위원의 해고는 국가의 책임이자 회사의 책임입니다. 2박 3일간 대공분실에 끌고 가서 모진 고문을 하고, 그 이유로 해고까지 한 것은 분명한 국가 책임이죠."

장영식 작가는, 김 지도가 정년이 지났어도 끝까지 복직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렇다. '복직'은 정의를 바로잡는 일이다. 전두환 정권이 평범한 노동자를 대공분실로 끌고 가 고문하고, 회사는 해고하고, 이런 '부당했던' 짓을 바로잡는 일이다. 빨갱이로 몰려 죽도록 고문당하고 수십 년 동안 감옥에 갇혔던 이들이 왜 끝까지 무죄를 주장해 누명을 벗으려고 하는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김진숙 지도도 누명을 벗고 명예를 벗기 위해서라도 단 하루라도 복직을 해야 한다.

게다가 민주화보상위원회가 김진숙 지도위원이 민주화운동 관련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는가. 그러면 실제로 명예 회복을 해 줘야 하는 것 아닌가. '명예 회복'은 당연히 회사로 복직돼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긴 세월 동안 못 받았던 임금과 퇴직금과 고통받았던 세월에 대한 배상과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복직해야 하는 이유는 또 있다. 노동자를 부당 해고하면 무려 35년 동안, 아니 죽을 때까지 싸우는 사람도 있으니 절대로 해고하면 안 되겠다고 자본가들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라도 복직해야 한다.

김진숙 지도의 꿈은 소박하고 현실적이다. 지난해 9월 18일 YTN 라디오에서 인터뷰할 때 복직되면 가장 먼저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들어가서 제가 일할 땐 없었던 화장실, 제가 일했을 때는 없었던 식당 그런 데 가 보고 싶어요. 저는 밖에서 싸웠었는데. 현장 안에서 싸웠던 노동자들이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만들어지고 쟁취될 때 그 울렸던 함성을 저는 밖에서 들었거든요. 근데 막상 저는 그런 걸 못 보고 같이 함성을 지르지도 못했고, 그냥 그런 데 들어가 보고 가 보면서 아, 이렇게 됐었구나, 그러고 그냥 박창수가 일했던 공장에도 한번 가 보고. 주익씨 일했던 데도 한번 들어가 보고.

사실은 조선소의 근로조건이라는 게, 작업환경 개선이라는 게 거창한 게 아니라 그때는 그 높은 데 작업을 하면서 사다리를 놓는데도 안전장치 하나 없이 일을 하게 되니까 그냥 사다리를 올라가다가 사다리를 안고 떨어져서 사람이 깔려 죽는 어이없는 일들이 생기는 그런 것들이 얼마나 정돈이 됐는지. 그냥 그런 것들을 눈으로 한번 보고 싶습니다."

싸워서 쟁취했던 식당과 화장실 등 작업환경이 개선된 걸 보고 싶다는 이야기다. 그것 때문에 평생을 싸워 온 것이다. 죽은 전태일과 살아 있는 김진숙 지도에게 우리 모두 부채감을 갖고 모든 부당 해고당한 노동자를 응원해야 하는 이유다.

어느새 목적지 대구시 달성군에 있는 아이들 물놀이장 '워터파크 스파밸리'에 도착했다. 지난해 2월 코로나19 때문에 한때 문을 닫았다가 다섯 달 만에 문을 열었다는데 놀러 온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약 15킬로미터 2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금속노조 대구지부에서 떡과 우유를 가지고 나와 하나씩 나눠 준다. 모두들 끼리끼리 사진을 찍고 인사를 나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진숙 지도가 인사를 한다. 나는 김진숙 지도에게 끝내 "복직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지 못했다. '복직할 수 없는데 제가 이렇게 투쟁할까요?' 하는 대답이 나올 건 너무 뻔하니까.
 
 오후 1시 20분에 대구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에 있는 스파밸리에 도착해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 안건모
 
김진숙 지도와 헤어지고 나는 대구 쪽으로 가는 차를 찾았다. 대구지역본부 이길우 본부장이 그쪽으로 간다고 했다. 얼마 전에 새로 노조에 들어와 일을 한다는 장혜진 조직차장과 또 한 분과 함께 차를 탔다. 이길우 본부장은 자기들 두 사람은 대구에서 가장 못된 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자본가와 수구세력들한테만 그렇다는 말이다. 이길우 본부장은 두세 번 구속돼 감옥에 갔다 온 투사다. 순진한 장혜진 차장은 그런 농담을 이해 못하고 "왜요? 두 분이 얼마나 따뜻한데요." 하고 반문한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김 지도가 서울에 도착하는 날은 언제인가? 청와대 앞에서는 일곱 분이 김 지도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단식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갔던 날이 벌써 18일째다(1월 4일 현재). 헤어지기 전에 김진숙 지도한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그분들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요?" 김 지도가 씩 웃으면서 대답했다. "굶어야죠, 뭐."

세상을 달관한 듯한 대답이다. 김진숙 지도가 서울에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안 된다. 그전에 "김진숙 복직!"이라는 소식을 들어야 한다.

서울에서 김진숙 지도를 기다리는 사람들

서울로 올라온 뒤 1월 11일 편집장 유이분씨와 다시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을 갔다. 입구에서 안계섭 민중가수와 최헌국 목사를 경찰이 막고 있다. 기타를 메고 간다고 못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기타가 무기인가? 노숙 농성을 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과 기도회를 하면서 노래 한두 곡 한다는데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

공원을 들어갔더니 21일째 단식 투쟁을 하는 정홍형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수석부지부장과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 보인다. 박승렬 목사와 한경아 새세상을여는 천주교여성공동체 공동대표는 건강이 나빠져 단식을 중단했다. 다른 분들의 건강도 걱정이 된다. 정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오히려 단식 투쟁하는 이들이 스티로폼도 못 깔게 하고, 비닐도 못 치게 하고, 잠도 못 자게 하면서 방해만 하고 있다.

해고된 지 13년 만에 복직이 됐던 박문진 지도위원은 이제 김진숙 지도의 복직을 바라며 삼천배를 하고 있다. 절을 너무 열심히 해 인사도 못 하고 우리는 서울역 코레일네트웍스 단식 농성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 1월 12일 청와대사랑채 앞 공원 모습. 성미선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송경동 시인, 서영섭 신부, 김우 권리찾기 유이온 활동가, 정홍형 금속노조 부양지부 수석부지부장 등이 21일째 단식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다. 이들의 단식을 빨리 멈추게 하려면 김진숙 지도가 복직이 돼야 한다. 박문진 지도위원이 김진숙 복직을 바라며 삼천배를 하고 있다.
ⓒ 안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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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간 <작은책> 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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