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로 만든 공룡' 위를 달려 세워진 도시, 서울

이영천 2021. 2. 3.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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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잇는 다리] 무거운 역사의 무게를 묵묵히 떠안고 있는 한강철교

[이영천 기자]

한강에 최초로 만들어진 현대식 다리가 한강철교다. 기다란 쇠를 조립해 만든 트러스교다. 흔히 트러스교를 '쇠로 만든 공룡'이라고 부른다. 쇠를 조립해 하천이나, 계곡, 바다를 횡단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큰 아픔으로 남아있는 성수대교가 트러스교다.

게르버 구간 힌지 시공 불량으로, 게르버 트러스가 끊어져 사고가 일어났다. 한강철교는 4개 철도교량이다. A선은 1900년 7월에, B선은 1912년 9월에, C선은 1944년 8월에, 1994년 12월에 D선을 건설하였다. 서에서 동측으로 차례대로 C-D-A-B선 순으로 놓여있다.
  
▲ 한강철교 서측 모습 맨 좌측 C선 모습이 뚜렷하다. 교각 모양도 각기 다른 모양이다. 4개 철교는 운행하는 열차가 도시철도, 광역철도, 간선철도, KTX 등 각 노선별로 분리되어 있다.
ⓒ 이영천
 
미국인 모스, 경인철도부설권을 얻다

1883년에 인천(제물포)이 개항한다. 한강 조운(漕運)에 의존하던 한양으로의 물류흐름을, 육상으로 돌릴 계획이 구상된다. 바로 철도다. 산업화와 근대화에, 뒤늦었지만 비로소 눈을 뜬 것이다. 철도부설권은 수탈은 물론 막대한 이권이 걸린 사업이다. 따라서 열강들은 후진국 철도부설권을 얻거나 빼앗으려 혈안이었다.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 철도부설권을 노린다. 여기에 경쟁자가 등장한다. 바로 미국인 모스(James R. Morse)다. 모스는 '주조선 미국 전권공사' 직책을 갖고 있는 기업인이다. 미국 공사관 알렌(Horace N. Allen)을 통해 조선조정에 지속적으로 철도부설권을 타진한다. 1891년 모스는 드디어 조선과 '철도창설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책략이 끈질기다. 청일전쟁이 빌미가 된다. 일본은 1894년 8월 조선과 '조일잠정합동조관'을 통해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부설권을 차지하게 된다. 조선이 가난해 돈이 없어, 일본 자본력과 기술력을 빌려 써야 한다는 명분이다.

이 해에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동시에 일어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지나친 전쟁보상을 요구한다. 1895년 '삼국간섭(일본이 얻은 요동반도를 러시아·독일·프랑스가 개입, 요동반도 반환요구를 관철시킨 사건)'이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철도부설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관파천이 일어난 50일 후(1896년 3월 29일), 경인선 철도부설권을 모스가 얻게 된다. 당시 고종을 보호하던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지원도 한몫 한다. 어부지리인 셈이다.
 
▲ 한강철교 건설장면 교각 사이에 임시가설물(벤트)을 올리고 그 위에서 곡형 와렌 트러스를 강결시키는 장면이 뚜렷하다. 1899~1900년 사이로 추정되는 모습이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모스와 조선 조정은 '경인철도특허조관'을 체결한다. 조관은 '미국 자본을 유치하고, 1년 내 기공과 3년 내 준공, 한강에 인도교 설치, 다리 중앙으로 배가 다닐 수 있게 가동교를 만들거나 형하고를 높게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조관 내용대로, 1897년 3월 22일 경인가도가 있는 우각현(牛角峴, 현재 도원역 인근)에서 기공식을 치르고, 착공에 들어간다.

다시 일본에게

하지만 일본은 음흉하고 악랄하며, 끈질기다. 미국인 투자자들을 상대로 조선 정치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악의적인 소문을 흘린다. 이에 미국 투자자들이 투자를 멈추고, 투입한 자본 회수에 나선다. 모스는 극심한 자금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진퇴양난이다. 설상가상으로 난공사 구간을 만나, 기술력 한계까지 보이기 시작한다.

모스는 방법이 없었다. 급기야 1898년 5월 10일 부설권을 일본에 1백만 불에 넘기고 만다. 하부구조인 노반공사가 어느 정도 완성된 상태다. 경인선 부설권을 얻은 일본은 '경인철도합자회사'를 세운다. 전면에 시부사와 에이이치라는 인물을 내세워 공사를 진행시킨다. 1899년 9월 18일 인천역∼노량진역까지 33km, 7개역으로 경인선이 1차 개통된다.
  
▲ 1900년대 한강철교 현재 노량진 수산시장 부근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강철교 모습이다. 강 위에 나룻배들이 유유히 떠 다니고, 반대편으론 남산 자락이 어렴풋하다. 단선으로 놓인 한강철교 A선으로 보아 1912년 이전 모습이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하지만 일본은 한강철교에 투입할 기술력이 절대 부족했다. 차일피일 시간을 끌면서, 경인선이 개통된 지 10개월을 더 허비한다. 이후 한강철교 공사는 우여곡절 끝에 1900년 7월 5일에야 끝이 난다. 일본은 인도교를 설치할 수 없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전체 공사비도 늘어났다며 생떼를 쓰기도 한다. '눈 가리고 아웅'이다. 비로소 노량진역∼용산역∼서울(경성)역 구간이 완성된 것이다.

한국전쟁 때 끊어진 다리

1950년 6월 25일, 민족 최대 비극인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권력을 잡고 있던 이승만 일파는 서울시민들에게 '끝까지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는 방송을 한다. 하지만 이는 녹음된 음성으로, 방송이 나오던 시점에 이승만을 비롯한 권력집단은 이미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 중이다.

임진왜란 때 도성을 버리고 신의주로 도망친 선조보다 더 비열하다. 그리곤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한강철교와 한강인도교를 폭파시켜 버린다. 북한군 남진을 제지한다는 명분이다. 800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시민들은 물론이고 많은 군인들마저 퇴로가 끊겨버린다. 군인들은 중장비와 무거운 무기를 부득이 버려야만 했다. 후퇴 할 수밖에 없었다. 퇴로도 만만치 않았다. 한강 이북의 수많은 시민들은 북한군이 점령한 곳에서 버티거나 견뎌내고 있어야만 했다.
 
▲ 한강철교 A, B선 1912년에 B선이 완공된다. 따라서 1912년 이후 모습이다. 사진에서 곡형 와렌 트러스와 벽돌로 쌓은 교각 모습이 뚜렷하다. 1944년에 만들어진 C선과 함께 1950년 6월 28일 3개 철교가 폭파된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폭탄을 투하한 한강철교 3개 중 1개는 불완전하게 끊어진다. 북한군은 1개 철교를 급하게 임시복구하고, 기차를 통해 군수품을 실어 나른다. 결과적으로 한강다리 폭파는 실패한 작전이었다. 남한지역의 신속한 점령이 이뤄진다. 낙동강을 경계로 전장이 굳어진다. 피아간에 엄청난 소모전이 전개되었다.

연합군 인천상륙작전이 9월에 이뤄진다. 반도 허리를 가르는 전략이다. 28일 서울이 수복되고 전장은 북으로 밀려가기 시작한다. 서울을 위시한 주변 도시에선, 부역자 색출작업이 진행된다. 그들의 입으로 피난길을 막았다. 서울을 사수할 것이니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하라 말했다. 그리곤 없는 죄를 묻는다. 이율배반이다.

다리를 끊어 피난길을 막아 놓고선, 이제 적에게 협력했다는 죄목을 덧씌운다. 무자비한 공포와 만행이 휩쓸고 지나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다. 고양시 '금정굴 민간인 학살사건'이 대표적이다. 수복지역에서 1950년 10월부터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학살사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 때 끊어진 한강철교 C선은, 수평 더블 와렌 트러스로 1957년 7월에 복구된다. 전쟁이 끝나고 4년 만이다. A, B선은 1969년 6월에 복구된다. 일제 때 곡형 와렌 트러스로 만든 구조물을, 복구하면서 수평 와렌 트러스로 바꾸었다. 1994년 12월에 완공된 D선은 수직재가 있는 수평 와렌 트러스로 만들었다. 현재 한강철교의 트러스 구조는 한강의 남측 중간부분까지다. 예전 한강 폭이다. 북측 교량부분은 거더교로 이어져 있다.

아픈 한강의 얼굴

서울역과 용산역에서 한강 이남을 잇는 모든 철도는 한강철교를 지난다. 철도를 통한 관문으로, 한강과 서울의 얼굴이다. 한강철교 역사는 민족 수난의 역사 그대로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다. 철도부설권을 매개로 한 침략의 상징이기도 하다. 한반도를 전쟁기지로 만들려는 그네들의 좋은 먹잇감이 철도였다. 그들은 일본∼부산∼서울∼평양∼신의주라는 대륙진출의 길을 철도로 만들어낸 것이다.

한강철교는 또한 민족상잔의 비극과 비겁한 권력집단의 치부를 드러내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한국전쟁의 참상을 말할 때 수많은 민간인 학살과 함께 한강다리 폭파장면이 등장한다. 한강철교는 식민지 수탈과 더불어, 전쟁이라는 극한을 감내해야 했던 민족사의 처참한 비극을 끌어안고 있다. 전쟁의 참화를 피하지 못한 시민들은 억울한 누명과 탄압에 비명을 지르며 신음해야 했고,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앗기어야 했다.
  
▲ 1939년 서울(경성)역 모습 경인선이 1900년 7월 한강철교를 완공하면서 인천~남대문역까지 철차를 운행하기에 이른다. 이 구간 개통과 함께 1900년 염천교 아래에 10평짜리 목조건물인 남대문 정거장을 세운 것이 서울(경성)역 시초다. 사진에 보이는 서울(경성)역은 1925년에 완공되었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120년 전에 검은 연기를 내뿜는 철차와 함께 근대화의 물결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우리 힘으로 일궈야 하는 자주적인 근대화는 식민지 침략 앞에서 길을 잃었다. 수탈적인 근대화가 이식되었다. 그마저도 남의 손으로 얻은 해방은 곧장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져, 쓰라린 아픔을 감내해야 했다.

오래된 우리

철교는 또한 산업화와 경제발전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난한 시골에서 짐 싸들고 모두가 서울로 몰려든다.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 최고 덕목이다. 혹은 공부하기 위해 기차를 타야만 했다.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간절하다. 모두가 땀을 흘렸고, 부지런히 일했다. 무능한 권력은 독재의 길로 나아갔고, 국민들의 힘으로 얻은 자유는 쿠데타 총칼에 무너지고 말았다.
  
▲ 한강철교 모습 총 4개의 트러스교로 이뤄진 한강철교 모습이다. 서울역과 용산역을 지나는 모든 철도가 이 다리를 건너 한강 이남으로 뻗어 나간다. 서럽고 쓰린 우리 근현대사를 오롯하게 껴안고 있는 다리다.
ⓒ 이영천
 
긴 군사독재 터널에서 신음해야 했다. 하지만 독재 권력에 끈질기게 저항한다. 긴 암흑기를 이겨내고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이런 근면함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의식변화가 눈부신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견인해 낸 원동력이다. 어느 독재자가 경제를 살려냈다는 말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시민들의 열망과 땀에 의해, 그리고 변화하고 진화한 시민의식이 경제발전의 바탕이었다. 시민들의 땀과 열정이 경제를 일구고 살려낸 진짜 주인공이다.
  
▲ 한강철교 하부 모습 좌로부터 C, D, A, B선이다. C와 D선은 더블 와렌 트러스로, A와 B는 수평 와렌 트러스로 만들어졌다. 하현재와 상현재, 그리고 트러스를 구성하는 각 부재와 브레이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이영천
 
1987년에서야 비로소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얻어냈을 뿐이다. 그마저 몇 번 반동의 길을 걸으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끊임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열차의 길을 닮았다. 한강철교는 모든 것을 지켜냈다. 철교 밑을 흐르는 강물은 유유하다.

철교 위를 빠르게 지나는 열차는, 묵직한 힘으로 가야만 하는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철교는 무거운 역사의 무게를 묵묵히 떠안고 있다. 잘 짜인 트러스교의 운명인가? 철교 위를 지나며, 마음속으로 되묻는다. 우리는 지금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로 나아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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