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영준 논설위원이 간다] "내 편만 보지 말고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가 그립다"

예영준 2021. 2. 3.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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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 젊은이가 개척한 한국 원자력
국민소득 70달러 시절 유학생 파견
공든 탑 허무하게 무너뜨릴 수 없다
과학기술인 의견 존중하는 정책을


원자력 1세대 이창건 박사의 충언

1세대 원자력 공학자인 이창건 박사가 1959년에 발행된 초등학교 보충교재 ‘원자력 공부’를 보이고 있다. 머릿말에는 “원자력은 잘못 이용하면 인류를 죽이고, 잘만 쓰면 살기좋은 낙원으로 만든다”고 적혀 있다. 이 박사는 “원자력 발전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원자력에 얼마나 관심이 높았는지를 보여주는 자료”라고 말했다. 김성룡 기자

망백(望百)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중인 이창건(92) 박사는 한국 원자력 개발의 살아있는 역사다. 국내에선 원자력 발전이란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몇몇 뜻맞는 젊은 과학도·공학도들과 함께 사실상 독학으로 원자력의 세계에 입문했다. 이후 한국인 최초의 원자로 운전면허 취득에서부터 대한민국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1호기 건설을 거쳐 한국형 원자로 개발에 이르기까지 그의 족적은 한국 원자력의 성공신화와 일치한다. 그는 최근까지도 스마트 원자로에 냉동·냉방 기능을 추가하는 방안 등으로 2건의 특허를 따낸 ‘현역’ 이기도 하다.

이창건 박사가 고문으로 있는 원자력문화진흥원 사무실을 찾아간 것은 한국의 원자력 개발 역사가 문재인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으로 논란이 분분한 이 시점에 주는 교훈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는 정책 결정 과정의 주요 고비들에서 역대 지도자들이 보여준 리더십과 과학기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결합하여 최빈국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써 내려 갈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원로 과학기술자가 들려준 원자력 개발 일화와 그 속에 담긴 교훈은 직설적인 탈원전 비판보다 훨씬 더 깊고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1. 이승만과 전력 대부의 만남

학계와 원자력 업계는 흔히 1956년을 한국 원자력의 기점으로 삼는다.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이란 개념에 눈을 뜬 이승만 정부가 이 해 문교부 산하에 원자력 과를 만들었다. 더 중요한 건 그해 7월 이승만 대통령과 워커 시슬러 미국 전력협회장의 만남이었다.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의 과학고문으로 국내 화력발전소 건설에도 도움을 준 인물이다. 이 대통령이 방한한 시슬러에게 전력난 해결 방안을 묻자 그는 갖고 있던 나무 상자 하나를 열어보였다. 그 속에 자그마한 막대기 하나와 석탄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시슬러=“이게 핵연료봉이란 겁니다. 같은 무게 석탄에서 나오는 에너지의 300만배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그걸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시슬러=“에너지는 땅에서 캐는 게 아니라 머리로 개발하는 겁니다. 헌신적인 과학기술자를 훈련시켜야 합니다.”

이승만이 원자력 엔지니어 양성을 결심한 순간이었다.

#2. 12명의 젊은 과학·공학도

1959년 7월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 기공식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공사 첫 삽을 뜨고 있다. [중앙포토]

그에 앞서 사실상 독학으로 원자력을 공부하고 있던 젊은 과학도·공학도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서울대 전기공학과를 갓 졸업한 젊은 날의 이창건 박사였다.

“1950년대 초반의 이공계 엘리트 중에는 공군 소속 기술 장교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산업기반이 전무하던 시절 그나마 전공을 살릴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한 사람이 제대하면서 미군 장교로부터 『원자력공학 입문』이란 책을 선물받았는데, 이 교재를 갖고 물리학·공학 전공의 공군장교 출신 12명이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매주 한 차례 문교부 창고 건물에서 세미나를 했다.”

6·25 때 특수공작부대인 KLO부대 출신인 이 박사도 학과 선배의 권유로 이 모임에 가담했다. 그는 “전기공학과에서도 배운 적이 없는 교재인데 1권 밖에 없으니 가장 막내인 내가 일일이 타자를 쳐 나눠줬다. 변변한 옷이 없어 군복 차림으로 온 사람도 많았다 ”고 회고했다. 원자폭탄은 알지만 아무도 원자력 발전소는 생각도 못한 시절, 스승도 없는 상태에서 언제 어떻게 써먹을수 있을지도 모르는 지식에 그들은 빨려들어갔다. 따지고보면 문교부 청사의 창고가 한국 원자력의 산실(産室)인 셈이다.

이 이야기는 시슬러와의 만남 뒤 원자력에 꽂힌 이 대통령의 귀에 들어갔다. 국무회의에서 “우리도 원자력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묻자 물리학 박사인 최규남 문교부 장관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있다”고 보고한 것이다.

이 대통령의 지시로 국비 유학생이 선발됐다. 10년간 236명의 엘리트가 미국·영국·캐나다에서 원자력을 공부했다. 그 속에 스터디 멤버들도 포함됐다. 스터디 그룹의 좌장은 당시 서울대 물리학과 조교수였던 윤세원이었다. “윤 선배는 문교부 원자력과 과장으로 옮겨갔는데 원자력 관련 법률 제정 등으로 국회를 포함,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예산이 부족해 서대문 집과 용인 고향 땅까지 팔았다”고 이창건 박사는 회고했다.

“이 대통령은 1인당 연간소득 70달러이던 시절, 1인당 6000달러가 드는 해외 연수에 10년간 236명을 보냈다. 시슬러는 20년이 지나야 그 혜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했다. 그때 이 대통령은 나이 80을 넘었다. 자기 당대에 덕을 보려한 게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3. 전문가 의견에 손들어준 박정희

1960년대 중반 박정희 정부는 본격적인 원자력 발전소 건설에 나섰다. 어떤 노형(爐型)을 도입할 것인지를 놓고 정부는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당시의 3가지 노형 가운데 비등경수로(후쿠시마 원전에 쓰인 모델)는 조기 탈락하고 미국형 가압경수로와 영국형 가스냉각로 두 가지가 남았다. 동해화력, 인천제철 등을 짓기 위한 차관 도입을 성사시켜 한국 정부에 발언권이 컸던 유대인 숄 아이젠버그가 가스냉각로를 밀고 국내 정치인들이 가세했다. “정상배들이 작당하여 가스 냉각로를 밀어붙였고 정치적 배려를 하면 가스냉각로가 채택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기술진들은 자리를 내놓을 각오를 하고 가압경수로를 추천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이 내린 최종 결정은 가압경수로였다. 가압경수로는 안전성과 방사선 관리 면에서 가장 뛰어난 모델로 주류가 됐고 가스냉각로는 지금 거의 쓰이지 않는다. 만일 이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눈부신 한국의 원자력발전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창건 박사는 “당시만 해도 국가 최고지도자가 기술인의 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강조했다.

#4. 원자력 원로가 국립묘지 찾은 이유

2009년 12월 27일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소식을 듣고 환호의 도가니에 빠진 한국전력 임원과 기술진. [중앙포토]

2009년 한국이 UAE에 원자력발전소 4기를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후발주자 한국이 기술을 배워 온 미국 등을 따돌리고 거둔 쾌거였다. 며칠 뒤 이창건 박사는 서울 동작구 국립묘지를 찾았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이승만 대통령 묘역. 그는 수출 성공 기사가 실린 신문을 놓고 젊은 시절 부르던 호칭을 사용하며 이렇게 보고했다. “할아버지께서 50년 앞을 내다보시고 저희를 훈련시킨 보람이 있어 이번에 중동에 원자로를 수출했으니 기뻐하십시오. 앞으로도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다음으로 박정희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각하 한국 원자력계가 드디어 중동 사막에 무궁화 꽃을 피웠습니다.”

뒤이어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묘소도 찾았다. “DJ는 야당 지도자 때부터 목포선언 등을 통해 원자력 발전을 지지했고, 노 대통령도 반(反)원전주의자들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집권 2년 후부터 원자력발전을 인정하고 육성했다”는 게 그 이유다. 실제로 두 대통령 시절엔 원자력발전소가 추가 건설됐다.

이창건 박사가 훗날 다시 국립묘지를 참배할 날이 올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탈원전에 대한 의견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Q : 문재인 대통령은 왜 탈원전에 집착한다고 보나.
A : “영화 ‘판도라’를 보고 그랬다고도 하는데, 과학기술 전문가들의 말에 귀를 닫고 정치적으로 ‘내 편’의 말만 듣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문 대통령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죽은 사람이 1368명이 죽었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다. 방사선 누출로 사망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런 왜곡된 정보로 국가 기간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전직 대통령들과는 정반대 아닌가.”

Q : 앞으로 원자력 발전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
A : “결국 국민이 선택할 문제 아닐까 생각한다.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는 후보들이 탈원전 정책 존속 여부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국민에 물어야 한다는 얘기다. 현명한 국민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하게 판단할 것이라 본다. 힘들게 쌓아올린 원자력 성공신화가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예영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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