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남편의 맛'도 보여주면 안될까요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의 남편 자랑은 끝이 없다. 단골 레퍼토리 중 하나가 이거다. “우리 두기(더그 엠호프의 애칭)가 가장 잘생겨 보일 때요? 어니언 고글을 썼을 때랍니다.” 양파를 썰 때 눈이 매운 걸 방지하기 위해 쓰는 일종의 물안경이 어니언 고글이다. 배우 정우성이나 미켈레 모로네가 써도 잘생김이 반감될 이 고글을 착용해도 남편이 멋지다는 의미. 행간엔 더 중요한 자랑이 녹아있으니, 어니언 고글을 자주 쓸 정도로 요리도 열심인 ‘21세기형 남편’이라는 얘기다. 태평양 건너 한국은 어떤가. 남편에게 어니언 고글을 씌우는 건 언감생심. 어니언 고글을 직접 쓰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야 득표한다는 공식이 2021년 대한민국의 여전한 상식이다.
최근 모 종편 채널 예능 ‘아내의 맛’에 등장한 나경원 전 국회의원과 박영선 전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이 딱 그랬다. 프로그램 제작진은 불과 100여일 후 치러지는 서울특별시장 선거에 출사표를 낸 이 둘을 집중 조명하면서 이렇게 밝혔다. “(이들의) 가족과 일상을 최초로 공개하며, 정치인이 아닌 아내와 엄마로서의 삶을 선보일 예정”이라고 말이다. 출연 시기에 대한 논란은 차치하고, 내용 역시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여성 정치인이 프렌치토스트를 굽거나(나 전 의원), 자신이 바쁘기 때문에 남편의 취미 사진 실력이 늘었다는(박 전 장관) 내용이 서울 시정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과문한 기자로선 도통 알 수가 없다.
대한민국엔 신(新) 유권자들이 세력을 조용히 키워가고 있다. 아내도 아니고 엄마도 아닌 여성 유권자들과, 아빠이길 거부하는 남성 유권자들이다. 세력화가 덜 된 터라 목소리는 아직 크지 않지만 이들의 성장세는 무섭다. ‘특정 연령대의 여성=아내&엄마’라는 등식은 이들에겐 성립하지 않는다. “출장 가기 전엔 밤을 새워서 곰탕을 끓여 냉동고에 넣어놓았죠”나, “남편과 아이들, 친정엄마에게 항상 빚진 기분이에요”라는 여성 기업 임원이나 정치인의 인터뷰는 지긋지긋하다.
동시대를 살고 있어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은 소설가 정세랑. 그는 근작 『시선으로부터』 첫머리에 “이 소설은 무엇보다 20세기를 살아낸 여자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라고 썼다. 21세기도 벌써 20%가 지난 지금, 20세기를 살아낸 여성 정치인에게 21세기적 정치를 기대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인 듯싶다. 적어도 위의 예능은 그렇다는 사실을 씁쓸히 인증했다. 21세기적인 여성 정치인과 그들의 남성 배우자들은 태평양 건너에서만 실화인 걸까. 22세기쯤엔 누군가 이 글을 읽으며 “이럴 때도 있었다니”라고 혀를 끌끌 차면 좋겠다.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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