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 5명은 왜 '택배 노동자 달력'을 만들었나
[윤근혁 기자]
▲ 택배 노동자 달력 뒷장에 실린 그림. 대전여고 1학년 학생들이 직접 그린 것이다. |
ⓒ 대전여고 |
▲ 택배 노동자 달력 첫장 뒷면. 스티커 자석을 붙이도록 만들었다. |
ⓒ 대전여고 |
"제가 진짜 바라는 점이 있어서... 하나 더 얘기해도 될까요?"
최근 '택배 노동자 달력'을 같은 반 친구들 4명과 함께 만든 대전여고 1학년 최다연 학생이 다급하게 말했다. 2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가진 전화인터뷰 끝 무렵에서다. 그는 '진짜 바라는 점'은 이렇다고 말했다.
"택배노동자 분들을 비롯한 코로나시대 약자와 소수자들이 저희의 작은 노력에 조금이라도 힘을 얻었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작은 일도 몇몇 사람의 시선을 바꿀 수 있으니까. 이런 작은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은 조금씩 밝게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택배 노동자들 달력 만든 대전여고 학생들
그렇다. 대전여고 교사들과 택배노동자 지원활동을 펼치던 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깜짝 놀란 일이 최근 벌어졌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대전여고 1학년 학생 5명이 택배 노동자를 생각하는 달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먼저 이들이 만든 달력을 살펴봤다. 날짜가 나온 부분은 여느 탁상용 달력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뒷부분은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 내용들로 채워졌다.
1월 날짜가 나온 첫 장 뒷면엔 '설렘을 주셔서 늘 고맙습니다'라는 글귀가 적힌 스티커 자석이 붙어 있다. "우리에게 설렘을 주시는 분들을 위해 현관 앞에 엄지척 마그넷을 붙이자"는 글귀가 적혀 있다.
나머지 장엔 택배 노동자를 돕는 활동을 펼쳐온 단체와 인물들의 글이 실려 있다.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신장식 노회찬재단 이사, '까대기'를 쓴 이종철 작가, '택배 상자 손잡이 만들기 운동'을 펼쳐온 안진걸 민생경제연구소장, 택배노동자 보호를 위한 생활물류법을 만든 박홍근 국회의원, '늦어도 괜찮아' 운동을 펼치고 있는 참여연대, 대전 우편물류에 근무하는 원유진 팀장의 글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택배연대노동조합 글은 다음처럼 달력에 적혀 있다.
"기쁜 마음으로 택배를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이 위협받는 택배는 국민 여러분 그 누구도 받고 싶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대전여고가 있는 지역 택배를 책임지고 있는 원유진 팀장은 다음처럼 적었다.
▲ 대전여고 학생들이 만든 달력 뒷장. |
ⓒ 대전여고 |
대전여고 학생들이 택배 노동자 달력을 준비하기 시작한 때는 지난 2020년 10월쯤. 9월부터 시작한 <통합사회> 수업에서 인권과 정의를 배우면서다.
최다연 학생은 굳이 택배 노동자 달력을 만들기로 한 까닭에 대해 다음처럼 말했다.
"저희가 <통합사회> 학습하면서 많은 기사를 접했는데, 택배 노동자의 죽음이 눈에 들어왔어요. 우리도 코로나 때문에 밖에 나가지 못하니까, 택배를 엄청 시켰잖아요. '생활 속에서 내가 편했던 게 다른 분들 노동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학교 1학년 학생 5명의 활동은 올해 1월 겨울방학으로까지 이어진다. '코로나섬씽어바웃'이란 모임이름까지 지어가며, 방과후학교 시간에 택배 노동자 달력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택배 노동자를 돕는 활동을 해온 이들에게 글을 부탁하고, 달력에 들어갈 삽화를 직접 그렸다.
이 같은 소식을 전해들은 대전여고는 '이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수업'이란 판단으로 달력 제작비를 대기로 했다. 지도교사로는 이 학교 조해수 교사(지리)가 나섰다.
조 교사는 "과거엔 학교에서 노동을 천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면서 "우리 학생들이 노동과 인권을 생각하며 직접 체득하는 살아있는 공부를 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며, 저도 앞으로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교육활동을 더 많이 펼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고 말했다.
"행동하며 살겠습니다"
▲ 대전여고 1학년 학생들이 '택배 노동자 달력'을 만들기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 대전여고 |
대전여고 5명의 학생들은 이 달력을 100부밖에 찍지 못했다. 이 달력을 우선 학교에 돌렸고, 택배노동자를 돕는 단체에도 보낼 예정이다. 학생들은 해당 달력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적어놓았다.
"택배 노동자의 죽음에 가슴 아파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잊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달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자리에서 작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 나의 문제로 올 한해를 고민하며 때로는 행동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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