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방치로 수익률 바닥 퇴직연금..디폴트옵션으로 체질 바꾼다

안효성 2021. 2. 2.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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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퇴직연금 확정기여(DC)형 상품에 가입한 직장인 오모(35)씨는 최근 수익률을 확인한 뒤 속이 쓰렸다. 퇴직연금의 연 환산수익률은 1.34%에 불과했다. 투자금의 절반 이상이 연이율 0.9%인 3개월 만기의 정기예금 상품에 투자돼 있었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던 탓이다. 오씨는 “투자처를 바꾸려 해도 어떤 상품에 투자할지 몰라 난감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더불어민주당이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 제도) 도입을 추진한다. 셔터스톡


투자자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이 ‘디폴트 옵션’(사전 지정 운용 제도) 도입을 추진한다. 국회 정무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김병욱 의원은 2일 이러한 내용을 담은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개정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같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인 안호영 의원도 법안 개정안을 발의한 상태다.

퇴직연금은 두 가지로 나뉜다. 퇴직 시점 평균 임금과 근속 연수에 따라 결정되는 퇴직급여(DB)형과 운용수익에 따라 연금 수령액이 달라지는 DC형이다. 때문에 DC형은 투자수익률이 특히 중요하다. 디폴트 옵션이 도입되면 DC형 퇴직연금 가입자가 별도의 운용지시를 하지 않아도 금융회사가 가입자 투자성향에 맞게 알아서 자산을 굴려주게 된다. 지난해 기준 DC형 퇴직연금 적립액은 67조2000억원이다. 김병욱 의원은 “미국 등의 퇴직연금은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며 안정적인 노후 수단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며 “퇴직연금이 국민 노후 생활의 안전판 역할을 할 수 있게 신속한 법안 통과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예·적금에 넣은 퇴직연금 수익률 1.6%…주식투자 상품은 13.2%
2020년 기준 DC형 퇴직연금 투자 수익률은 3.47%로 2019년(2.83%)보다는 높아졌다. 그런데 상품별로 따져보면 상황이 다르다. DC형 퇴직연금의 83%(56조원)를 차지하는 원리금 보장형의 수익률은 1.69%에 불과하다. 2019년(1.94%)보다 오히려 떨어졌다. 저축은행 1년 정기예금의 연 이자(2.04%)보다 낮다. 은행 등 퇴직연금 운용사가 수수료로 평균 0.45%를 떼가서다.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수익률.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반면 주식 등에 투자하는 실적배당형의 수익률은 13.24%로 2019년(7.63%)보다 5%포인트 이상 올랐다. 지난해 코스피 연간 상승률이 30.75%를 기록하는 등 주식시장의 호황 덕이다.

여당과 정부의 디폴트 옵션 도입 추진은 이런 상황과 맞물려 있다. 퇴직연금 가입자의 상당수가 원금 손실을 피하기 위해 가입 시 원리금 보장형을 택한다. 이후 금융상품에 대한 지식 부족과 번거로움 등을 이유로 투자 상품을 변경하지 않는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가입자의 91%가 별도의 운용지시를 하지 않았다. 사실상 방치하는 셈이다.

고금리 상황에서는 원리금 보장형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퇴직연금이 도입된 직후인 2006년의 은행 예ㆍ적금 금리는 5% 수준이었다. 하지만 초저금리 시대를 맞으며 상황은 달라졌다. 지난해 말 기준 시중은행의 정기 예금 금리는 평균 0.9% 수준이다. 저금리 상황에서는 다양한 자산군에 투자해야 수익률을 올릴 수 있다. 국내외 주식과 채권 등 다양하게 투자하는 국민연금의 연평균 누적 수익률은 5.93% 수준이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펀드ㆍ연금실장은 “연금 자산을 운용할 때 실질적인 위험요인은 단기 손실이 아닌 장기수익률 하락”이라며 “20~30년 끌고 가야 하는 퇴직연금의 경우 현재의 원리금 보장 위주 구조로는 물가상승률 이상의 수익률을 얻기도 힘든 상황”이라고 말했다.

최근 정부ㆍ여당이 추진하는 뉴딜펀드도 디폴트 옵션 도입에 힘을 싣고 있다. 은행 예ㆍ적금에 묶인 퇴직연금을 뉴딜펀드로 투자할 길이 열려서다. 최현만 금융투자협회 부회장은 지난해 8월 ‘뉴딜펀드 정책간담회’에서 “(뉴딜) 인프라펀드에 연결해서 퇴직연금을 운용할 경우 수익률이 안정적으로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연간 3~4%가량의 안정적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깔려 있다.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현황.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원금 손실 가능성에, 손실 보면 책임은 누가?
디폴트 옵션은 투자자의 무관심에 방치된 퇴직연금에 심폐소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원금손실 가능성이다. 디폴트 옵션 도입 관련 법안이 쉽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한 이유다. 2018년에 원리금보장형은 1.72%(DC형 기준)의 수익을 낸 반면, 주식시장 등에 투자하는 실적배당형 상품은 -5.5%의 손실을 봤다.

국회 환노위도 지난 2020년 디폴트 옵션 도입과 관련한 검토보고서에서 “추후 손실 발생 시 설명의무 위반 여부에 대한 법적 다툼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을 냈다.

안정성을 보완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타깃데이트펀드(TDF)가 꼽힌다. 투자자의 예상 은퇴 시기에 맞춰 운용사가 주식과 채권, 원자재 등 자산 비중을 조절해 운용하는 상품이다. 미국의 DC형 퇴직연금 중 TDF 상품에 투자 비중은 2018년 기준 24%다. 반면 한국은 2019년 기준으로 DC형 퇴직연금 중 1.2%(7365억원)만 TDF 상품에 투자돼 있다.

권태완 미래에셋 연금마케팅 팀장은 “개인이 시장 상황을 판단해 자산을 재배분하기는 쉽지 않다”며 “생애주기에 맞는 TDF 펀드 등을 통해 위험성 낮출 수 있다”고 말했다. 김병욱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에도 운용 기간 경과에 따라 투자 위험이 낮은 자산 비중을 늘리거나 위험 수준을 조절하는 것을 디폴트 옵션 상품의 조건으로 들고 있다.


해외는 퇴직연금 백만장자만 26만명
해외의 경우 퇴직연금에 디폴트 옵션을 도입해 연간 5~7%의 수익을 내고 있다. 미국의 401K 퇴직연금은 디폴트 옵션으로 연간 7%의 수익률을 거두고 있고, 호주의 마이슈퍼 디폴트 옵션은 연평균 수익률이 6.8% 수준이다. 이 때문에 퇴직연금으로 100만 달러 이상의 자산을 쌓은 ‘401K 백만장자(401K millionaire)’ 등도 나오고 있다.

피델리티 자산운용의 은퇴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3분기 기준 401K 백만장자는 26만2000명으로 전 분기보다 17% 늘었다. 김병덕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미국과 호주 등은 디폴트 옵션이 도입된 뒤 퇴직연금이 안정적인 수익률을 보인다”며 “한국도 디폴트 옵션을 도입하고 퇴직연금 자산을 해외 투자나, 대체 투자 등 다각화해 수익률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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