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효승의 역사 너머 역사⑭] 배는 바닥이 닿으면 운항할 수 없다
1866년 7월 ‘제너럴 셔먼’이라는 이름의 이양선 한 척이 조선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왔다. 조선은 언제나 그러하듯 이 배에 쌀과 고기 등을 제공했다. 그리고 관리를 보내 조선에 온 이유 등을 묻고, 조속히 떠나기를 요구했다. 이 같은 행동은 앞서 5월에 미국의 서프라이즈 호가 평양 인근에 표류했을 때, 조선은 물과 고기 등을 제공한 후 중국까지 안전하게 호송해 돌려보냈기에 똑같이 대응한 것이다. 조선은 이방인에 대한 일방적 적대 행위가 또 다른 보복 행위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정책은 선현(先賢)의 말씀에 따른 것이다. 선현의 ‘멀리서 온 빈객을 유하게 대하면 사방에서 귀의하리라’(柔遠人則四方歸之)는 말씀은 조선 정부의 정책이 갖고 있는 함의를 잘 보여줬다. 다만 조선은 그들이 귀의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용히 떠나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조선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면, 중국을 핑계로 사절(謝絶)했고, 그들의 통상 요구에 대해서는 단호히 거절(拒絶)했다.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온 이양선은 멀리서 왔지만, 선현이 말씀하던 빈객이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멀리서 온 것도 아니었다. 진즉에 중국에 터를 잡고, 항구와 도시를 건설한 상태였다. 그들의 목적은 조선을 상대로 직접 무역이나 선교 등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여의치 않을 경우 무력시위를 하기 위해 대포 등을 싣고 왔다. 실제로 이양선에 오른 조선 관리를 억류하고, 군중을 상대로 총포를 쏴 인명을 살상했다. 이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군민을 모아 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
이 정도가 지금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의 제너럴 셔먼 호 사건에 관한 서술이다. 조선은 중국과 일본 이외에는 교류를 사절했고, 통상 요구를 거절했다. 서구인이 보기에는 조선의 거리두기(절대 일본이 취하던 쇄국정책이 아니다)가 세계와 동떨어져 홀로 있고자 하는 은자(hermit)처럼 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은자가 살고 있는 곳은 미지의 땅이 아니었다. 조선에 오려던 서구인들은 조선에 누가, 어떻게 사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조선에 오는 것은 미지의 땅을 탐험하고,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먼 곳으로 싸우러 가는 원정(遠征, expedition)일 뿐이었다.
조선은 서구 국가와 공적으로는 교류하지 않았지만, 이미 많은 이들이 조선 땅을 오가고 있었다. 우선 서프라이즈 호에는 이미 조선에서 수개월 동안 살았고, 조선어도 할 줄 아는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라는 영국인이 타고 있다. 그는 중국에 돌아간 이후 프랑스 해군을 따라 다시 조선에 돌아올 계획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함대가 갑자기 인도차이나 반도에 파병되면서 계획을 바꿔 제너럴 셔먼 호에 오른 것이었다. 그는 단순히 조선까지 가기 위해 제너럴 셔먼 호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이 배를 타면 손쉽게 조선의 내륙까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 인근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여기서 잠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증기선에 대한 것이다. 흔히 우리가 역사에서 산업혁명의 상징처럼 배우는 증기기관은 선박에도 적용되어 증기선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그런데 사실 증기선에는, 증기라는 동력기관과 별개로 중요한 두 가지 변화가 있었다. 첫 번째는 동력 전달 방식이 돛에서 바퀴와 스크류 등으로 변화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체 구조물이 나무에서 철로 바뀐 것이다.
먼저 동력 전달 방식의 변화를 살펴보자. 돛에서 스크류 등으로 동력 전달 방식이 바뀌면서 동력 수단이 바람에서 기계로 바뀌었다는 점 외에 배의 ‘흘수’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럼 여기서 ‘흘수’란 무엇일까. 대체 ‘흘수’가 무엇이기에 배의 운용에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 ‘흘수’는 배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선체가 수면 밑으로 가라앉는 깊이이다. 흘수는 배의 무게에 비례하기 때문에 대포를 많이 싣거나, 사람을 많이 태우면 더 깊어졌다. 최대 흘수라는 것도 있어서 배에 적재한 무게가 배의 부력을 초과하면 배는 더 이상 떠있지 못하고 가라앉았다. 흔히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유레카’로 상징되는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도 이와 관련된 것이다. 배는 적재할 수 있는 무게, 즉 배수량이 정해져 있고, 흘수에 따라 육지에 접근할 수 있는 한계가 있었다.
심지어 동력 전달 방식이 돛인 경우 서양 범선은 흔히 킬(keel)이라고 불리는 용골이 필요했다. 이런 추가적인 구조물 때문에 범선은 수심이 낮은 곳에서 운용하기 어려웠다. 만약 수심이 배의 흘수보다 낮을 경우 선저 혹은 킬이 바닥에 닿아 좌초될 수 있었다. 그런데 스크류 등으로 움직일 경우 용골 같은 구조물이 없어 무게에 따른 흘수만 고려하면 되었다. 이처럼 흘수는 배를 운용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이러한 점에서 서구인이 보기에 서해와 한강은 난관 그 자체였다. 한강은 폭이 꽤 넓지만 조수 때문에 곳곳에 모래톱이 있었고, 하루에도 9미터 이상의 수심차가 발생하는 강이었다. 이런 곳에서 배를 운용하기란 지극히 어려웠다. 역시 가장 큰 고려 요소는 흘수였다. 실제 병인양요 직전 프랑스 함대의 사령관인 로즈 제독은 직접 서해를 정찰했는데, 이 과정에서 타고 온 배의 흘수 등을 고려해 수심이 14미터 이상인 곳에 정박했다. 하지만 하룻밤 사이에 수심이 4미터 정도까지 낮아지면서 좌초 위기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로즈 제독은 한강을 따라 함대를 이끌고 서울로 바로 진출하는 것을 포기했다. 공격 계획 변화에 환경적 요인이 작용한 것이다. 로즈 제독은 공격 계획을 세우면서 군사 작전의 범위를 선박이 접근하여 함포로 지원할 수 있는 곳으로 한정하였고, 그 결과가 강화도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한강의 인후부인 강화도를 점령하면 서울로 향하는 조운을 차단할 수 있어, 이를 통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까지 서구 열강의 해군은 흘수가 깊은 범선을 주력 군함으로 운용 중이었다. 이러한 군함은 수십 문의 함포를 적재하여 막강한 화력을 자랑하였지만, 흘수 때문에 해안가에 접근하는 데에는 한계가 명확했다. 더군다나 황해처럼 조수간만의 차가 극심한 곳에서는 자칫 썰물에 좌초할 경우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썰물 전에 멀찍이 해안에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일한 수단은 흘수가 낮은 포함(砲艦)뿐이었다.
병인양요 때도 로즈 제독은 이러한 서해안의 환경을 고려해 7척의 함대 중에 2척의 포함을 합류시켰다. 그런데 이 포함은 다른 프랑스 군함처럼 자국의 조선소에서 건조한 이른바 ‘프랑스제’가 아니었다. 중국 닝보항의 조선소에서 건조한 ‘중국제’였다. 프랑스 해군이 포함을 중국에서 건조한 것은 유럽에서 동북아시아까지 인양해오는 것도 문제였지만, 동북아시아 특히 중국 등의 하천에서 운용하기 위해 현지 환경을 고려하여 건조한 측면도 있었다.
로즈 제독이 이끌고 온 포함 2척(Le Tardif,Le Breton) 모두 중국에서 건조한 군함이었다. 두 척은 같은 종류의 군함이었다. 이런 종류의 군함 중 가장 먼저 만들어진 배가 Kenney라서 흔히 Kenney Class라고 불렀다. Kenney Class를 살펴보면 배수량은 253톤에 적재한 함포는 16파운드 포 2문과 12파운드 포 1문로 총 3문이었다. 덕분에 Kenney Class의 흘수는 2미터에 불과하여 왠만한 하천에서도 운용이 가능했다. 이러한 특징은 병인양요 당시 로즈 제독의 기함이었던 LaGuerrière와 비교하면 더 잘 드러난다. LaGuerrière의 경우 배수량은 3600톤에 적재한 함포만 34문이었다. Kenney Class인 Le Breton 등과 비교하면 규모는 14배 이상, 함포는 10배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LaGuerrière는 만재시 흘수가 7미터로, 그래도 수심이 8미터 이상인 곳에서 운용 가능했다.
왕좌로 가든 지옥으로 가든 홀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다. 하지만 배는 바닥이 닿으면 운항할 수 없다. 다음에는 또 다른 변화인 선체 구조의 변화가 가져온 역사 너머 역사를 살펴보자. 역시 역사는 그 너머도 함께 볼 때 더 흥미롭다. (다음에 계속)
신효승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soothhistory@nah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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