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의 인간사냥, 설정부터 '신선한' 문제작
[하성태 기자]
"사랑은 증오를 이긴다."(Love trumps hate)
지금으로부터 5년 전, 팝가수 레이디 가가가 피켓을 들고는 눈물을 훔쳤다. 그는 미국의 제45대 대통령으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거리로 나가 1인 시위에 나섰다. 유리천장을 깨겠다던 민주당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패배에 좌절한 절반의 미국인들, 트럼프의 승리에 충격을 받은 이들의 심정을 레이디 가가가 대변한 것이다.
그랬던 레이디 가가가 지난달 20일(현지시간)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지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레이디 가가는 큼직한 황금 비둘기 브로치를 달고선 미국 국가를 개성 있게 열창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열렬한 민주당 지지자인 그는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유세 당시에도 연단에 오른 바 있다.
레이디 가가와 같은 열혈 민주당 지지자, 즉 미국을 옳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자부하는 '리버럴리스트', 소위 좌파들은 '트럼프의 시대'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이들의 투쟁 결과가 결국 '바이든의 시대'를 도출했고, 그 선봉이 바이든의 취임식에서 '밈 신드롬'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상원 예산위원장이 된 버니 샌더스와 같은 강성파였을 것이다.
여기, 무척이나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있다. '트럼프 시대'에 더 극심해진 정치적 양극화의 책임을 온전히 트럼프와 그 지지자들에게 돌리는 게 온당하냐고 묻는 영화가 넷플릭스를 달구는 중이다.
더 정확히는 트럼프 지지자들이 아닌 엘리트 리버럴리스트들은 정말 증오심이 없었느냐고, 마치 '니들은 정말 사랑으로 같은 국민들을 품은 게 맞느냐'고 낄낄대는 영화. 훨씬 더 정확히는 소위 '입진보', '패션좌파'들에게, 다른 말로 '리무진 좌파', '캐비어 좌파', 'Leftard'(left(좌파)+retard(바보)), 'Libtard(liberal(리버럴)+retard(바보))들을 소환하여 양극화의 책임이 과연 한쪽 탓일까란 의문을 던지는 <헌트>(2020)가 바로 그 문제작이다.
▲ 넷플릭스 영화 <헌트> 포스터. |
ⓒ 넷플릭스 |
넌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눈을 떠보니, 어딘지 모를 숲 속이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것도 억울한데, 재갈까치 물려 있었다. 둘러보니, 그런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곳은 숲 중앙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는 벌판.
누군가가 용기를 내서 상자 문을 열었더니, 꽃단장을 한 새끼 돼지가 걸어 나온다. 뒤이어 위용을 드러내는 갖가지 총기류. 이것은 흡사 사냥 놀이인가. 내가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 건가. 그때 갑작스레 들려오는 총성. 그 즉시 금발 여성이 쓰러진다. 아니다. 죽게 생긴 것은 누군가가 아니라 바로 나다.
<헌트>의 아이디어는 이렇게 '신박하다'. 그에 앞서, 영화의 오프닝은 이 쫓기는 자들에게 감정을 이입할 관객들을 위해(?) 공포감을 한층 고조시킨다. 역시나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비행기 안, 망중한을 즐기는 승객들 가운데로 누군가에게 끌려온 것 같은 백인 남자가 튀어나와 도와 달라 호소하다 기어코 날뛰기 시작한다.
이 남자를 폭력으로 제압하는 승객들 중 군계일학은 남자의 왼쪽 눈에 하이힐의 굽을 꽂아 넣은 후 튀어 나온 눈알을 담담하게 빼버리며 전쟁을 선포하는 한 여성이다. "감상은 금물"이요, "전쟁은 전쟁"이라 선포하는, 마치 리더와 같은 이 여성에게 자비란 없다. 이들은 누구이고, 이 리더는 왜 이렇게 화가 나있을까.
그렇다. 누군가에는 놀이가 누군가에는 목숨이 오가는 전쟁일 수 있다. 아프가니스탄 참전 군인이었던 주인공 크리스털(베티 길핀)은 후자 쪽이다. 간신히 재갈을 풀고 무기를 '겟'했지만, 벌써 몇 명이나 죽어나갔다. 왜가 왜 중요한가. 일단 살고 볼 일이다.
크리스털이 차량을 구해볼까 들른 주유소 겸 식료품으로 피해봤지만, 여기 분위기도 심상치 않다. 담뱃값을 틀린 가게 주인 부부를 향해 일말의 의심도 없이 총을 발사하는 크리스털. 사실 이 부부는 바로 직전 미국 각지(인데 트럼프의 승리지역)에서 왔다는 다른 도망자들 셋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죽여 버린 직후였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진상은 이렇다. 누군가가 크리스털과 사람들을 납치, 어딘가에 풀어놨다. 여기가 미국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일단 살기 위해 도망치긴 했는데,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죄다 인간 사냥꾼들로 보인다. 주유소에서 만난 또 다른 도망자 남성도, 간신히 올라탄 열차에서 만난 난민들도, 크리스털을 구하기 위해 나타난 대사관 직원까지도. 게다가, 지금 이곳이 미국도 아닌 저 동유럽 크로아티아라니!
그런데 이걸 어쩌나. 사람 잘못 골랐다. 크리스털이 그리 호락호락 당할 사냥감이 아니었던 것을. 대략의 상황을 파악한 크리스털, 바로 복수에 나선다. 사실 복수라기보다 생존을 위한 쟁투에 가깝다. 그리고 크리스털의 손에 의해 시체가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한다. "감상은 금물"이라던 그 무자비한 리더에게 다가가는 그 순간까지도.
풍자 혹은 냉소주의
<헌트>를 보다 질색했을 이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놓고 눈알이 튀어 나오고 살점과 핏물이 튀는 'B급 고어' 장르를 표방한 표현 수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렇다고 딱히 액션영화도, 그렇다고 서스펜스 드라마도 아니다. <헌트>의 정체는 의외로 정치색 짙은 풍자극이다. 맞다. 제작사가 <파라노멀 액티비티> 시리즈로 돈을 벌고, <겟 아웃>으로 명가의 반열에 오른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이다. 그런데 하필 정치 풍자극이라니.
문제작이라고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일단 설정부터(?) 신선하다. 인간사냥에 나선 이들이 엘리트 '리버럴'들이고, 사냥을 당하는 이들은 전형적인 트럼프 지지자들(로 보이는 이들)이다. '트럼프 시대'의 저항을 떠맡아 온 할리우드 주류의 관점을 일거에 전복하는 인물 구도다.
누군가에겐 분명 어쩔 수 없는 불편함으로 다가올 설정이다. 제작자인 제이슨 블룸을 비롯한 <헌트>가 노린 전복과 풍자의 지점이 바로 거기 있다. 그 노림수가 노골적이다. 우선 캐스팅. 크리스털을 연기한 베티 길핀의 외모는 흡사 이방카 트럼프를 연상시키는 금발의 글래머러스한 여성이다.
반면 사냥꾼들의 리더인 아테나(지혜의 여신인 바로 그 아테나)를 연기한 배우는 오바마의 지지자이자 미셸 오바마와 친분을 과시했던 <밀리언 달러 베이비>의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사장 힐러리 스웽크(심지어 이름도 힐러리)다.
이렇듯 <헌트>는 '트럼프 지지자'처럼 보이는 주인공이 사냥감으로 쫓기다 종국엔 자신을 증오하며 학살하려던 힐러리, 아니 아테나를 때려잡는 이야기다. 여기서 끝이었다면 시시한 'B급 고어' 역할극에서 멈췄을 터. 영화는 '흑백' 논리로 빠지는 우매한 길을 선택하지 않는다. 몇 가지 단순해 보이는 단서들을 흩뿌리는 것만으로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려 애를 쓴다.
그 제작진의 의도가 상당히 직설적이다. 한 마디로, 성공적이다. 아테나는 적대적 지지층을 '사냥'해 버리자는 농담(영화 속 '저택게이트')이 온라인상에서 유출돼 나락으로 떨어진 최상류 기득권층이다. 그런 아테나가 열이 받았다. 자신을 비방하고 가짜뉴스를 퍼트린 이들 중 맘껏 사냥감을 골랐고, 역시나 같은 부류들을 규합해 진짜 인간 사냥에 나선 참이었다.
여기서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건 이중의 의미다. 참전 용사인 크리스털은, 그야말로 액션 영웅이다. 아테나를 제외하고, 총도 제대로 못쓰고, 그나마도 본인의 정치적 신념이나 취향에 목을 매는 상류층과는 결이 다르다. 그들과 질적으로 다른 크리스털은 이 부당하고 초현실적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크리스털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내가 제대로 잡아온 거지?"란 아테네의 물음에 크리스털은 그저 동명이인일 뿐이라며 아테나가 엉뚱한 사람을 잡아왔다고 답한다. 크리스털은 미국에서 애국자로 떠받들어지는 참전 용사였고, 아테나가 잡으려던 이는 '모두에게 정의를'이란 아이디를 썼다. 심히 고약하지만, 그러한 모호함이야말로 <헌트>의 (영화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영리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아테나와 동료들이 크리스털을 '스노볼'이라 부른 것 또한 직선적인 장치다. '스노볼'은 조지 오웰의 소설 <동물농장> 속 독재에 항거하고 이상주의를 추구하다 동료들에게 모함을 당했던 '돼지'의 이름이다(영화의 말미, 아테나는 크리스털에게 심지어 <동물농장>을 읽었느냐는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진다).
그에 앞서 크리스털은 살짝 비틀어진 '토끼와 거북이' 우화를 들려준다. '거북이와의 경주에서 오만함 때문에 패하고 거북이 가족을 몰살해 버리는 토끼'로 말이다. 이러한 크리스탈의 정체성이나 이중성을 우화로 비유, 모호하게 처리한 대목은 <헌트>의 주제와 맞닿아 있다.
크리스털은 스노볼인가 아닌가. 누가 거북이고 토끼인가. 그렇다면 이 스노볼이 우화 속 토끼처럼 경주에서 이긴 거북이들을 쏴죽일 (정치적)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은 또 옳은가. 아니, 애초에 크리스털은 스노볼이 맞았나. 마지막에 함께 사냥을 당했던 남성을 쏴죽이는 크리스털처럼, 애초 진영 따윈가 뭐가 중요한가. 그저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열심히 사는 이들이 대우받고 살아남는 것이 정당한 것 아닌가.
블룸하우스의 이런 결론을 철없는 양비론이라 비판할 이들도 없진 않을 것이다. 어쨌든 이런 류의 '시니시즘'(냉소주의)을 어떻게 봐야 할까. '트럼프 시대'의 스트레스로 인해 발현된, 두 진영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할 '나르시시즘'인가, '정치'(精緻)하지 못한 '반정치'의 선동극일 뿐인가. 판단은 관객의 몫이지만, 유일한 생존자이자 주인공이 백인 여성 참전용사란 사실에서 어떤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트럼프 시대의 상흔
그렇다면 어떤 배경에서 <헌트>란 작품이 나왔을까. 트럼프 당선 직후, 여러 분석이 쏟아졌던 가운데 힐리러 후보의 책임론이 제기됐다. 이른바 '이메일 스캔들'은 일종의 '진보의 위선'으로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게다가 민주당과 힐러리 역시 막대한 '슈퍼팩'(super PAC·특별정치활동위원회)을 굴리는 '금권주의'의 포로였다.
심지어 미국 내 '리버럴'들조차 기득권 정치와 '엘리트' 주의에 신물을 내고 있었다. 또 굳건한 양당 체제의 폐해에 치를 떠는 이들조차 당시 돌풍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를 민주당 후보로 옹립하는데 좌초해 버렸다. 그들 중 일부는 애초부터 개혁 의지가 부족했을 수 있다. 또 일부는 샌더스의 급진성을 버거워했다.
경제는 어땠나. 1990년대 이후 미국의 중산층은 붕괴돼 가고 있었고, 월스트리트'발' 금융위기는 그 정점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공화당은 이른바 '오바마 케어'(건강보험 개혁안)을 좌파 정책으로 몰아붙였고. 그리하여 몰락한 중산층과 하층 계급 백인들의 구세주로 떠오른 것이 TV 예능에서 백만장자 사업가 이미지를 쌓아 올린 도널드 트럼프였다.
이렇듯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체제의 변증법적 퇴보(?)로 도출된 이단아 트럼프가 미국을 어떻게 망쳤는지는 부연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다만, 이후 더 극단적이고 폭력적으로 나아간 트럼프 지지자들이 힐러리와 민주당에 대한 증오를 먹고 무럭무럭 자랐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도만 다를 뿐 그 반대편 역시 같은 양상일 수 있고.
웃지 못할 영화 밖 상황의 주인공도 역시나 트럼프였다. <헌트>는 원래 트럼프의 실정이 절정을 향해 가던 2019년 개봉 예정이었다. 원제는 <레드 스테이트 대 블루 스테이트>, 즉 공화당과 민주당의 강세 지역 간 대결을 제목으로 내세웠다.
지난 2019년 9월, 영화를 보지도 않은 트럼프가 발끈했다. 그는 트위터에 "곧 개봉할 영화는 혼란을 일으키고 불을 지피기 위해 만든 것"이라며 "그들은 폭력을 만들어내고 다른 사람들을 비난하려 하는 진정한 인종차별주의자이며 이 나라에 매우 나쁘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가 <헌트>를 지목하진 않았지만, 결국 배급사인 유니버셜 픽쳐스는 부담을 느꼈는지 예정됐던 미국 개봉을 취소해버렸다. 아울러 트럼프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영화들을 쏟아냈던 할리우드를 향해 "진보적인 할리우드는 엄청난 분노와 증오에 찬 최고 수준의 인종차별주의자"라며 "그들은 자신을 엘리트라고 부르기를 좋아하지만 그들은 엘리트가 아니다"라는 독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헌트>는 북미에서 지난해 3월 개봉했다. 국내에선 다음 달 극장 개봉했고, '바이든 시대'를 맞아 넷플릭스를 통해 재공개됐다. 트럼프에게 공격을 받은 그 '진보적 할리우드' 평론가들은 <헌트>에 혹평을 내놨다. 트럼프가 이 저예산 B급 풍자물을 직접 봤다면 어땠을까. 무척이나 머쓱해하지 않았을까.
이제 트럼프의 시대가 저물고, 바이든의 시대가 왔다. 블룸하우스의 냉소주의가 트럼프 시대를 끝장내는 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헌트>가 트럼프 시대를 상징하는 극단의 정치적 양극화를 함의나 표현 수위 모두에서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작품이란 사실일 것이다. 바이든의 당선으로 그 상흔이 얼마나 치유됐는지, 또 치유될지도 아직 미지수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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